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83화 (183/207)

#183화. Chapter 45. 선전포고 (1)

부웅-

도로가 한산해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한 목적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한태강이 나를 보고 다가왔다.

“일찍 왔구나.”

“아저씨가 부르신 건데 빨리 와야죠.”

한태강이 흐뭇해하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안해하는 웃음을 짓는다. 심가의 사건 이후로 계속 그래왔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런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걸 굳이 언급하진 않고, 정원을 걸으며 그에게 물었다.

“세라는 회사 갔어요?”

“준비 중인데 거의 다 됐을 거다.”

그 말대로였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니 세라가 거실에 서 있다. 주말 출근이라 평일보다는 편한 차림에 옅은 파란색 가방을 어깨에 맨 모습.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묻는다.

“어울리나?”

“응, 예쁜데 새로 산 거야?”

“아니, 엄마 옛날에 매시던 거. 이제 나 쓰려고.”

“······예쁘네. 잘 어울려.”

“고마워. 다녀올게요.”

한태강에게 인사한 세라가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말한다.

“나 저녁 전에는 마칠 것 같은데, 일하면서 세아한테 연락할게. 내가 데리고 저녁 같이 먹을 테니까 넌 좀 쉬다가 와.”

나를 배려한 말이었다.

작전이 끝난 다음,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세아를 볼 수 있도록.

한태강이 또 한 번 웃는다. 이번에도 흐뭇해하고, 나와 세라에게 미안해한다.

그리고 세라가 눈을 빛내며,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캐내듯이 내게 물었다.

“내일은 보고하러 가지?”

“그러려고.”

한태강이 있어 대놓고는 묻지 않은 질문. 내 답에 작게 고개를 주억인 세라가 가뿐히 손을 흔들곤 문밖으로 향했다.

둘만 남게 되고, 한태강이 부엌에서 건강음료를 가지고 와 내게 건넸다.

“마시고 가거라. 아직 아침 안 먹었으면 차려줄 테니 든든하게 먹고 가고.”

“아니요, 먹고 왔습니다. 시간 되면 곧바로 출발하려고요.”

“그래······.”

한태강이 거실 탁자에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올렸다. 대외적으로는 식사나 하자고 나를 부른 자리.

물론 명분만 그러할 뿐이며 나는 곧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서울을 넘어, 일만 킬로 이상 떨어진 나라로.

조금 시간이 남아 한태강에게 물었다.

“술 드시려고요?”

“꺼내놓은 김에 한두 잔만 마실까 했지.”

가라앉은 안색.

나는 일부러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고요.”

바로 그때.

위유우웅-

내 앞에 붉은색 마력이 일렁인다. 안개처럼 퍼져나가더니 세로로 긴 직사각형 같은 형태를 이룬다. 그 틈으로 얼핏 보이는 광경이 이질적이다. 어둡고 적막한 장소. 서연희가 구현한 공간이동 마법이 안내하는 곳이다.

빛무리로 발을 내디디며 마지막으로 한태강과 대화했다.

“조심하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 순간.

슈아아아악!

미약한 현기증이 이는 걸 느낀 나는 발에 와 닿는 감촉을 파악했다. 실외가 아니라 건물 내부. 인위적인 불빛 없이 껌껌하고, 창밖에서 흘러든 달빛으로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인다. 이내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이게 몇 달만이에요?”

중성적인 어조. 성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체구. 그런 걸 떠나서 나한테는 씩씩하고, 귀엽고, 잘 챙겨주고 싶으면서도 놀리는 맛이 있는 애다.

용 가면을 쓴 유해빈이 척척 걸어와서 팔을 활짝 벌린다.

“선배님, 제가 진짜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데······ 한 번 안아봐도 돼요?”

“마음만 받을게, 마음만.”

포옹하려고 달려드는 유해빈의 양팔을 붙잡아 아래로 내리며 눈빛으로만 물었다.

-뭐 하냐?

-에이, 연기죠. 오랜만에 만난 연기. 교수님도 협력을 해주셔야지 그렇게 쌀쌀맞게 구시면 어떡해요?

“······.”

들어 보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는데······ 반갑다고 껴안는 게 더 의심 사지. 그즈음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내게 일렀다.

“자네 오랜만이구먼.”

“그렇군요.”

등이 굽고, 체구가 왜소하고, 노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쓴 단원.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온 그가 인사치레로 말한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3월 이후로 처음 아닌가. 그간 소식은 들었네만······ 꽤 바삐 지냈나 보더군.”

그의 말대로 올해 3월 13일 로버트 그린을 살해하고서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노인뿐만 아니라 아이와 거한도. 통신 마법으로 지시는 가끔 내렸지만 내 일로 워낙 바빠 대면한 적은 없었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던 노인이 흥미롭고 궁금하다는 듯, 가면 속의 눈에 시린 빛을 담으며 묻는다.

“그래, 심정웅은 어떻던가. 아직 노망이 나지 않았다면 염의준보다는 상대하는 맛이 났을 터인데.”

“제대로 보셨습니다.”

여러모로 염의준보다 더했지.

가진 힘도, 하려던 짓거리도, 마지막 순간만은 영웅이기를 바라던 그 낯짝도.

대균열에 일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염의준이 심정웅보다 못하지 않지만.

나는 가볍게 떠보듯 노인에게 물었다.

“한데 하실 말씀은 그뿐입니까?”

내가 알기로 이자는 심정웅과 면식이 있었다. 절친하다고는 못해도 한때는 그리 가볍지 않은 친분이었다. 그러나 노인이 하찮다는 듯이 답한다.

“죽을 때가 된 놈이 죽은 게지. 내 일전에 심정웅을 보았을 때, 그때 이미 그놈 눈빛이 탁하더구먼.”

“그렇습니까?”

“애초에 영웅이라는 자리가 놈 분수에 맞지 않았어.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제 몸에 덧칠이야 했겠다마는 그것이 오래 갈 리가 없지. 이십 년이면 질기게 버틴 게고, 도금이 벗겨졌으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

내 옆에 찰싹 붙어 대화를 듣던 유해빈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심정웅을 이렇듯 자연스레 깔보며 말할 수 있는 자가 많지는 않으니까.

얘한테 아직 노인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오늘 일을 끝내고 말해줘야 하려나.

미리 알려줬다가 혹시 노인이 알아채면 불쾌해하고 신뢰가 깨질까 봐 숨겼는데······ 별 신경 안 쓰고 말하는 걸 보니 유해빈과 내 관계를 파악한 모양이다.

내가 이 애와 다른 단원들보다 훨씬 깊은 사이며, 유해빈이 안다 한들 자신의 비밀이 새어 나가진 않으리라고. 적어도 그 정도는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의도로 말하는 거다. 아마 유해빈이 나한테 포옹하려고 다가왔을 때 눈치챈 거겠지.

나는 노인에게 답하듯 양팔을 벌리며 유해빈에게 말했다.

“자.”

“네······?”

“안아봐도 되냐면서. 안아도 돼.”

“어······.”

유해빈이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재차 확인한다.

“진짜요?”

“네가 반가워서 포옹하고 싶다며. 해도 된대도.”

“어······ 음······ 이게 좀, 뭔가 멍석 깔아주니까 또 살짝 좀 그런데······.”

노인은 구경하듯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는지 유해빈이 걸음을 세게 내디디며 말했다.

“그러면 합니다······? 할게요?”

그대로 팔을 벌리고, 내 품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쿠웅-

“아얏!”

돌격해오던 유해빈이 머리를 감싸 쥔다. 별로 아프게 때린 건 아닌데. 어쨌든 예상치 못하게 꿀밤을 맞은 유해빈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봐. 속은 내가 바보지······.”

“허허, 자네들 사이가 좋구먼그래.”

“그런 편입니다.”

방금 노인과 나는 무언으로 약조했다.

그는 유해빈을 통해 내 정체를 캐지 않을 거라고.

나는 노인이 명시적으로 허가하지 않는 이상 유해빈에게 그의 정체를 알리지 않을 거라고.

상황을 모르는 푼수 용용이만 배신감에 몸을 떨었고, 그때 허공에 빛무리가 일었다.

스아아아-!

빛을 넘어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은발에 새빨간 눈. 가녀린 체구.

그리고 얼굴에 쓴 토끼 가면.

마치 공들여 빗질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본래도 길고 아름다웠던 머리칼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가지런히 찰랑였다.

“어, 안녕하세요?”

“호오, 네 번째는 자네였구먼. 자네도 런던에서 활약이 대단했다지?

유해빈과 노인 가면이 건넨 인사는 가뿐히 무시.

이 자리에 당도하자마자 나를 본 토끼 가면이 조금은 느릿하게 걸어온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선, 조용히 나를 올려다본다.

마음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른 나는 사무적인 어투로 그녀에게 일렀다.

“일 분 늦었다. 앞으로는 주의해.”

“······.”

꽤 차갑게 건넨 말. 토끼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올려다보기만 한다. 다만 눈빛에서 어떤 감정이 읽히는 듯했다.

원망, 서운함, 그리고 안도.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 말만 하고선 몸을 홱 튼 토끼 가면이 구석으로 향한다. 모일 사람이 전부 모였고 내가 대표로 앞장서며 말했다.

“저쪽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지.”

나를 비롯한 네 사람은 건물을 나섰다.

서울에서 일만 킬로도 넘게 떨어진 도시. 시차는 열세 시간.

보름달만큼은 못해도 제법 밝은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그런데도 흉험한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게 느껴진다.

뒷짐을 진 노인이 후미.

토끼 가면은 내 주위를 맴돌듯이 거리를 약간만 둔 채로 걸었고, 내 옆에서 걷는 유해빈이 확인하듯 묻는다.

“저거 일부러 하는 거죠?”

“그럴 거야.”

저편의 서 있는 건물을 시야에 두며 답했다. 지나다니는 인적이 없다시피 한 도시 외곽. 그중에서도 공사가 끝나기 전에 버려진 건물. 지금 그곳에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자리해 있을 터였다. 일반적인 헌터보다 강하지만 결코 헌터라 불릴 수 없는 자들이.

우리의 접근을 감지하고 쏘아낸 마력을 흩어내며 나는 유해빈에게 일렀다.

“긴장할 것 없어. 작정하고 싸우면 다 네가 이길 놈들뿐이니까.”

“에이, 선배님 절 어떻게 보시고.”

툴툴대듯 답한 유해빈이 어조를 강하게 해 말을 이었다.

“저보다 세다고 쳐도요, 그래도 무섭다고 쫄지는 않아요.”

“좋은 자세일세. 나도 젊었을 땐 자네 같은 포부가 있었지.”

“그렇군요.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토끼 가면이야 원체 이런 말을 안 받아주고 유해빈도 별 반응이 없어 그래도 예의를 보이고자 답한 다음.

터억-

내가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밝은 불빛이 켜졌다.

“드디어 왔군.”

누군가 툭 던진 말.

방금까지 고요하던 공간에 수십 명의 인기척이 인다. 오늘 모인 자들은 팬텀을 제외하고 도합 서른둘. 그중 다섯이 인사를 건네며 내 쪽으로 온다.

“만나서 반갑네.”

“당신들 소문은 자주 들었지. 요즘은 특히나 더.”

나는 그들을 눈여겨봤다.

남성이 셋에 여성이 둘. 연령대는 다양하다. 삼십 대로 보이는 자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그들 모두 세간의 기준으로 S급을 상회하는 각성자들이다. 또한 제각기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범죄 조직을 이끄는 자들이기도 하다.

나머지 스물일곱 놈도 저들이 신임하는 수하. A급 미만의 각성자는 단 한 명도 없다.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킬 더 이블>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에 개입할 범죄 조직들의 리스트

-답변: 쿠엘라 순교회, 레스투르 마력 해방 결사

+

홀로그램의 정보로 두 곳을 알아냈다.

둘 다 마력 원리주의를 기치로 내거는 집단이다.

그들을 이곳으로 불렀고, 또 놈들에 못지않은 범죄 조직들도 자리해 있다. 마찬가지로 마력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자들.

나는 서른두 명의 쓰레기들에게 일렀다.

“와줘서 고맙군. 좋은 뜻으로 모여달라 한 것이니 우선 얘기를 들어주겠나?”

그야 좋은 뜻이다.

저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좋은 뜻.

홀로그램으로 알아낸 조직은 둘.

불러 모은 조직은 다섯.

써먹을 놈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늘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다.

어디 한번 잘 지켜봐.

네가 멋대로 지껄인 답변을 내가 어떻게 이용하는지.

홀로그램에게 되뇐 나는 서두를 꺼냈다.

“최근에 만나보고 싶은 자가 하나 생겨서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