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Chapter 45. 선전포고 (3)
이세아는 조용히, 낮게 호흡하며 기사를 읽었다. 제목만큼이나 본문도 쓰레기 같았다. 아니, 그냥 쓰레기 자체였다.
어처구니없는 문장과 단어들에 손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래도 겨우 다 읽고 나서 한 생각.
‘그게 왜 오빠 잘못인데?’
마력과 호응하는 새로운 에너지의 도입.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혼란이 어쩌고저쩌고, 연구의 책임이 어쩌고저쩌고.
까놓고 말해서 이런 소리였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마력이나 연구하라고. 괜히 일 벌였다가 자랑스러운 부모님 얼굴에 먹칠이나 하지 말라고.
‘정신 나갔나?’
이세아는 이 기사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댓글 반응도 그러했다. 온갖 참신한 욕설로 제기한, 아주 정당한 비판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속이 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뭐야?’
그런 의견이 백 퍼센트는 아니다. 일부라곤 하나 기사에 동의하는 자들도 있고, 이세아는 그게 충격적이었다.
이딴 기사가 어떤 정신 나간 인간 한 명의 의견이 아니라는 게. 진심으로 동조하는 자들도 있다는 게. 그리고 기사 끝에 적힌 문장. 거기서 거론한 집단이 있다.
‘마력 원리주의······.’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들.
올해 몇 번 마주친 팬텀 같은 범죄자들.
마치 협박이나 경고처럼 마력 원리주의를 언급한 문장이······ 불안하게 마음에 걸렸다.
***
현지 시각으로 10월 23일 오전 열두 시 삼십 분.
서울도 점심때가 지났을 텐데 세아는 밥 먹었으려나, 시험 끝났다고 아직 늦잠 자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한잔 받아줄래?”
내게 말을 건 카일리 던이 가볍게 눈을 찡긋한다. 술병을 쥐고 걸어와선 아래로 기울이듯 뻗었고, 시선을 내 쪽으로 고정하며 묻는다.
“잔이 비었길래. 아까부터 말이 없어졌는데 설마 취하진 않았겠지?”
쪼르르-
그리곤 적갈색 액체를 내 잔에 따라주며, 은근한 어조로 말을 더한다.
“아니면······ 우리 뒤통수라도 치려고 술은 이만 자제하는 건가?”
“그렇다면?”
부정하는 대신 되물은 말.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이던 카일리 던이 이내 활짝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한잔할까? 난 보면 볼수록 당신이 마음에 들거든.”
째앵, 잔을 부딪치고 술을 들이켜며 나는 주위를 살폈다.
“그렇구먼. 그쪽도 제법 성공 가능성이 있겠어.”
노인 가면이 네 명의 수장과 대화하고 있다. 분위기는 노인이 이끄는 중이며, 적당히 담소를 나누면서도 계획을 구체화한다.
서울에 침투할 인원. 한태강과 윤의성을 비롯한 한국의 헌터를 막을 방법. 팬텀까지 총 여섯 조직이 각자 어떤 권한을 가지고, 이도진을 확보하면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그에 따른 이권의 분배는 어떻게 되는지.
“으음······.”
유해빈은 가만히 앉아서 팔짱만 끼고 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이 자리가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선명하고, 자기 앞에 놓인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토끼 가면은 아예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안주로 마련한 과자와 과일만 깨작깨작 먹고 있다. 그러다 이따금, 여기 와서부터 계속 내게 사적인 말을 거는 카일리 던을 노려보는 정도. 새빨간 눈동자가 싸늘함을 담고 있다. 카일리 던은 네가 불만이면 어쩔 거냐는 식으로 코웃음을 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갈 즈음. 쿠엘라 순교회의 수장, 조르디 문트가 나를 불렀다.
“다른 건 그런대로 가닥이 잡혔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봐.”
“이도진의 재능이 뛰어난 건 나도 알고 있다. 놈이 말한 생명력이라는 개념도 완전히 거짓만은 아니겠지. 결코 마력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자네가 처음에 말했지. 각성자의 비율을 줄이려 한다고. 무작정 이도진을 데려와 요구한다고 그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 않아. 그 주제로는 말을 아끼는 것 같던데······ 아직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계획이라도 있나?”
찌르듯이 던진 질문. 카일리 던이 대수롭지 않게 되받았다.
“그건 데려와서 생각해도 되지 않아? 하루 이틀 연구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이도진도 목숨이 아까우면 뭔가 쓸 만한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겠어?”
“아니, 근시일 내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 대답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의 눈이 내게로 쏠리는 가운데, 나는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균열과 마력은 불가분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마력 원리주의자들도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마력이 특별한 힘이고 각성자가 선택받은 존재인 건 사실. 하지만 저쪽과 이쪽을 연결해주는 균열이 사라진다면, 마력도 결국 이 세상에 흘러들어올 수 없게 된다고.
이건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인지하는 진리와 상식의 문제다. 내 의도를 얼추 깨달은 좌중이 열기에 휩싸였고, 나는 결정적인 키워드를 꺼냈다.
“대균열.”
대균열 이후로 균열 현상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 세상에서 마력이 사라지지 않게 됐다. 그걸 다르게 이용한다면?
“균열을 조정해낸다면 가능할 거다. 마력은 사라지지 않으면서, 균열과 연결된 그 힘을 우리가 독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커다란, 초월적인 규모의 균열을 일으켜서.
십 년 만에 다시금, 이 세상에 대균열을 발생시킴으로써.
“이도진은 그쪽 방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지. 몽상가와 힘을 합쳤긴 하나 S급 균열을 뚫어냈다더군.”
“그러면······ 그런 뜻이네? 이도진을 데려와서, 균열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대균열까지 일으켜서, 그때 흘러나올 힘을 우리가 가지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 균열 자체를 통제할 거다. 그자가 주장한 생명력 이론까지 활용할 수 있겠지. 균열이 우리의 소유가 되는 거야. 오직 우리와 우리가 선택한 자들만이 마력이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할 거다.”
“······너무 멋진데?”
내 옆에 앉은 카일리 던이 유혹하듯 말한다. 그리고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당신이 말한 우리에 당연히 레스투르도 포함되겠지? 전적으로 협력하고, 당신과 앞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물론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원 포함이다. 그러려고 부른 것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나는 정말 실낱처럼 미약하게 전해진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소리조차 아니다. 당사자인 나 이외에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극히 희미한 감각.
그걸 감지한 나는 오른손을 얼굴 쪽으로 올렸다.
스으으······.
내 손에 닿은 가면 아랫부분이 재가 되어 사라진다. 반의 반절만 드러난 얼굴을 유심히 살핀 카일리 던이 만족스럽게 웃었고, 나는 근처에 서 있는 범죄자에게 물었다.
“담배 하나 있나?”
지목받은 사내가 내게 걸어온다. 담뱃갑과 지포 라이터를 꺼냈고, 조르디 문트가 그자에게 명했다.
“정중히 대해라.”
“네.”
묵묵히 답한 사내가 담배 한 개비를 건넨다. 받아서 입에 물자 불을 켠 라이터를 내 쪽으로 가져온다.
“나도 줄래? 스페인 건 맛이 어떤지 궁금한데.”
카일리 던이 흥얼거리듯 일렀고, 나는 불을 붙여주는 사내를 응시했다.
삼십 대 중반.
키는 180cm 정도.
이목구비가 흐릿하며 과묵하면서도 차가운 인상.
나는 이자의 이름을 안다.
안토니오 나바스.
쿠엘라 순교회 내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의 서열.
A급 상위 수준의 각성자이며 쿠엘라 순교회 소속으로 도합 열 번의 일급 테러에 가담. 직간접적으로 살해한 인간은 족히 세 자릿수.
두말할 것 없이 죽여 마땅할 쓰레기다.
나는 그렇게 했다.
“자세가 건방진데.”
툭 내뱉은 말에 안토니오 나바스가 시선을 내게 향한 직후.
콰직! 스아아아!
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첫 번째는 내가 뻗은 오른손이 놈의 목을 단번에 꺾어서 부러뜨린 소리.
두 번째는, 내 몸에 쌓이던 취기가 마력에 휩쓸려 기화한 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아아앗!
단 한 번 발을 굴러 빛살같이 접근한 토끼 가면이 카일리 던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갈랐다.
“허억!”
신음성을 내뱉은 카일리 던이 뒤편으로 땅을 박차며 손을 휘두른다. 순식간에 형체를 이룬 열 개의 마탄이 토끼 가면을 노린다.
스아아악!
물론 토끼가 둘러친 마력의 실에 가닥가닥 끊겨 힘을 잃었고.
한 모금만 들이켠 담배를 바닥에 튕기며 나는 단출하게 명했다.
“시작해.”
“네, 선배님.”
“오랜만에 정리 좀 해보겠구먼.”
씩씩하게 답하는 유해빈.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곤 회색빛의 마력 구성체를 허공에 띄우는 노인 가면.
“이게 무슨 짓이지?”
조르디 문트가 묻는다.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 놈의 수하들은 팬텀 단원들에게 발이 묶였고, 다른 조직도 개입하지 않는다.
나는 놈에게 짧게만 일렀다.
“뒷주머니 차는 놈들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것 말고는 네가 알 것 없고.
띠링-
시야에 홀로그램이 비친다.
+
-경고합니다.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킬 더 이블>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에 개입할 범죄 조직들의 리스트
-답변: 쿠엘라 순교회, 레스투르 마력 해방 결사
-주관식 질문의 정보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주관식 질문의 정보를······.
+
“꺼져.”
조소처럼 대꾸한 나는 홀로그램을 산산이 흩트렸다.
위반? 경고?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먼저 선전포고한 건 너잖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건 너라고.
세아가, 내 동생이 혼자가 된다면서. 난 그딴 걸 허락할 생각이 없는데.
주관식 질문.
4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균열에 어떤 범죄 조직들이 가담하는가.
그걸 질문한 시점부터 이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홀로그램이 제시한 조직.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대균열 관련 사건은 발생할 거다. 이건 필연적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외에 정해진 게 있을까?
홀로그램은 정해뒀을지도 모르지. 그야 친절하게 리스트까지 알려줬으니까.
근데, 내가 거기에 동의하냐는 별개의 문제잖아.
자, 이러면 어떡할래.
네가 미리 점찍어둔 요소. 개입할 집단. 그것들을 모조리 다 까부술 건데.
퀘스트는 어기지 않고, 네가 꾸미는 계획만 어그러뜨릴 건데.
대균열이 발생해야만 한다면 내가 통제할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순간조차 홀로그램이 의도한 걸지도 모르겠지. 거짓말은 안 해도 속이는 건 잘하는 놈이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계속 이길 거니까.
홀로그램이 3권 마지막에 휘갈긴 문장.
이세아는 혼자가 됐다.
그걸 현실로 만들 생각이 절대 없으니까.
넌 나한테 안 돼.
애초에 네가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야.
기껏 글자 쪼가리로 개입하는 너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할 수 있는 일의 차원이 달라. 물론 마음가짐도.
대답할 수 있으면 대답해봐.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검은 심장을 완전히 각성시켜서 나를 마신으로 만들고 싶어?
세아랑 내가 원수가 되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게 만들고 싶어?
그러면 글이 좀 재밌어질 것 같아서?
나 죽이고 세아가 펑펑 우는 모습으로 결말내면 호응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네 자유긴 한데, 난 너처럼 시시한 이유로 이 짓거리 하는 게 아니야.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안 하고는 살 수가 없어서.
그래서 하는 거야.
위반이니 경고니 어설프게 말고 제대로 해봐.
이시혁과 정세빈의 소생. 그 보상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이라도 해봐.
못하지?
넌 거짓말은 안 하니까.
내가 이렇게 망쳐놔도, 그래도 나한테 요구하고 얻을 게 있으니까.
그러면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
네가 뭘 건드렸는지.
쿠아아아아-!
분노와 결의를 담아 칠흑빛의 마력을 끌어내면서 조르디 문트에게 일렀다.
“덤벼봐.”
널 죽이면 홀로그램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지, 그게 정말 궁금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