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86화 (186/207)

#186화. Chapter 46. 대화 (1)

저벅, 저벅.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르디 문트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진다.

“너희가······.”

놈은 망설이고 있다. 싸워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주해야 할지.

물론 놈도 강하다. 지닌 무력 자체도 S급에 해당하며 인간과 사투를 벌인 경험은 동급의 강자보다 훨씬 많으니까.

영웅 수준의 각성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놈과 대적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거다. 도주를 막는 건 그보다도 어려울 테고. 하지만······.

“겁이 나는가 보군.”

나와 맞설 순 없다. 놈이 내게 이길 승산은 극히 적다. 그야말로 제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놈보다 강하고, 놈과 싸워 9할 이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영웅 수준의 각성자이며, 인간과의 실전 경험 또한 양과 질 모두 유의미하게 놈을 앞선다.

자기보다 힘을 덜 갖춘 사람들을 죽이고 테러할 때야 편했겠지. 근데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어.

화르륵-!

검은색의 불꽃 같은 마력을 피워 올리며 놈에게 일렀다.

“덤비지 않겠다면 내 쪽에서 시작하지.”

“잠깐! 기다려봐라.”

조르디 문트가 다급히 외쳤다.

전투와 도주.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거다. 놈이 고른 선택지는 ‘대화’였다.

“지금까지의 소동은 불문에 부치지. 우리를 이런 식으로 겁박하는 건 너희에게도 좋을 게 없을 거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콰아앙! 퍼어어어억!

내가 달려가 내지른 주먹에 놈이 십수 미터 이상 밀려났다. 간신히 방어했으나 타격이 작지 않았을 테고, 힘겹게 입가의 피를 닦는 놈에게 나는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좋을 게 없다······. 혹시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슈아아아!

놈과 나 사이에 두 개의 마력이 일렁였다. 직사각형으로 각각 자아낸 홀로그램. 한 사람과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형, 저희도 진행 중이에요!]

[이봐, 오늘은 다 죽여도 되는 거겠지? 죄다 버러지뿐이잖아.]

아이와 거한.

쿠엘라 순교회의 근거지에 침입한 두 단원이 반갑게 말한다. 어조가 들떠 있으면서도 그들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다. 피와 살점, 끔찍한 비명. 쓰레기들이 쓰레기처럼 죽어 나간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여긴 끝났어. 어디 소문날 일 없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서연희가 여유롭게 일러줬다.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레스투르 마력 해방 결사의 은신처. 초토화됐다는 표현 외에는 쓸 말이 없었다.

행동도 빠르지. 내가 담배 하나 있냐고 안토니오 나바스에게 묻기 직전. 그때 나한테 마법으로 신호를 주고, 그 시점부터 시작해 벌써 다 해치운 거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짓는 조르디 문트와 카일리 던을 눈에 담으며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오늘부로 쿠엘라와 레스투르는 없다. 결속을 위한 희생양으로써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지워진다.”

“왜 우리가!? 맹세코 당신과 팬텀에 아무 피해도 끼친 적이 없-”

슈아아악-! 서걱!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치던 카일리 던의 오른팔이 잘렸다. 토끼 가면이 뻗어낸 마력의 실에 칭칭 감겨서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아아악!”

새된 비명을 배경음처럼 들으며 나는 전황을 살폈다.

“조용히들 가시게나.”

다채로운 복합 마법으로 적들을 무력화시킨 노인 가면이 손을 휘젓는다.

쿠웅- 쿠아앙!

갈라진 땅이 솟구쳐 오르며 운신을 제한한다. 미로처럼 복잡해진 공간. 오갈 길이 막힌 범죄자들이 당황했고······.

콰아아악!

천장과 바닥이 서로 급격히 접근하며 합쳐졌다.

“끄아아아악!”

그 사이로 낀 범죄자들이 속절없이 압사했다. 단말마와 돌 틈으로 흘러나온 핏줄기만이 그들의 죽음을 설명했다.

“그러게 착하게들 살지 그랬나.”

노인 가면이 때늦은 충고처럼 읊조린다. 자신도 테러리스트긴 하나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다니엘 콘트라스.

남미의 마도 명문 콘트라스의 전전대 가주.

<세계의 수호자> 시점엔 아직 전성기가 아니었던 샬럿 테이트보다 강했고, 심정웅과 어깨를 나란히 한 마학의 대가.

그가 영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당시 병환이 깊었던 아내 곁을 한시라도 떠날 수 없어서.

영웅으로 칭송받지는 못했으나 반려로서 책임을 다한 자. 그러나 정명한 성품을 지녔기에 이 세상에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자.

그에게는 자격이 있다.

저 쓰레기들을 벌할 자격이.

영웅 중에 타락한 자들이 일부 있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나마 책무를 다하고자 내 영입 제안에 응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어디 도움을 줄 곳이······.”

허허 웃으며 노인이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곤 싱겁다는 듯이 말한다.

“다들 잘하고 있구먼.”

쿠오오오오!

온몸에서 황금빛 마력을 뿜어내며 유해빈이 돌진했다.

체구는 크지 않으나 이 건물 따윈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는 파괴력. 전신에 두른 마력이 실체를 이루었고, 거기에 얻어맞은 적들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다.

“후우······ 으아아압!”

아주 잠깐 눈에 스친 망설임. 이내 쩌렁쩌렁하게 외친 기합.

유해빈이 쏘아낸 마력이 적들을 가뒀다.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두고, 그다음에는······.

서걱! 서걱-!

마력의 칼날이 놈들의 팔다리를 끊었다. 처음엔 힘줄만. 나중으로 갈수록 상처가 깊어졌고, 결국 맨 마지막 놈은 완전히 사지를 절단했다.

“하아, 하아······.”

별로 지친 것 같지 않으면서도 유해빈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애는 사람에게 이만한 중상을 입혀본 적이 없고, 죽여본 적은 더더욱 없으니까.

그즈음 나와 토끼 가면도 맞서는 상대를 거의 제압했다.

퍼어억!

내가 후려친 주먹에 조르디 문트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전의를 상실한 눈빛. 그러나 나는 눈치챘다.

+

-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

“크아아악!”

일순간 놈이 괴성을 질렀다. 퍼엉! 퍼어엉! 여태 모아두었던 마력을 모조리 쏟아내 마탄을 퍼부으며 뒷걸음질한다. 이어진 도약.

콰앙!

놈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천장을 뚫어내고 탈출하려 한다. 미리 대비했던 나는 차분히 마력을 끌어냈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수동발동형 특성 ‘파헤치는 손’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스킬 ‘형상화’를 발동합니다. (랭크 A)

+

심상이 현상으로 구현된다.

“뭐!?”

건물을 빠져나가기 직전의 조르디 문트가 외마디 소리를 냈다.

별안간 나타난 거대한 손. 피하기도 전에 그것이 놈을 덮었고, 이제 놈은 내 앞에 있다. 도망치는 상대를 추격해 데려오는 소환 마법.

가면을 걷어내 보이는 입가로 피식 웃으며, 나는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퍼억!

내 손이 놈의 가슴 중앙을 관통했다. 이내 구현한 마법으로 마력을 흩어내고, 전방위적으로 움직임을 막았다.

듣고,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

오직 그 세 가지만 가능하게 된 놈을 건물 바닥에 내던졌고, 토끼 가면도 전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쾅! 콰앙!

재빠른 움직임. 상처가 극심한 카일리 던에겐 대응은커녕 눈으로 좇는 것만도 버거운 속도다. 이내 토끼가 열 손가락을 펼쳤다.

스파앗!

거미줄처럼 몇 겹으로 두른 마력의 실이 카일리 던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서거걱!

얼굴과 상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잘렸다. 사지는 물론이고 머리칼조차도.

“끄어억, 으헉, 아아아악!”

카일리 던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다. 이전보다 무척 짧아진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챈 토끼 가면이 무신경하게 손을 휘둘렀다.

퍼억!

공중을 날아간 카일리 던이 땅에 나동그라졌다. 그 옆엔 비슷한 꼴로 무력화된 조르디 문트가 꿈틀거리고 있다.

얼추 정리된 듯해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쿠엘라와 레스투르 소속이 아닌 범죄자들.

애써 태연한 척하나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 이만큼 강경한 수단을 쓸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그야 내가 그렇게 말을 안 했으니까.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는 자들에겐 주의를 좀 줄 계획이라고, 그렇게만 말했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적당히 그들을 응시하며 계속 구경만 하라고 경고한 나는 유해빈에게 다가갔다.

“소감이 어때?”

“그냥······ 그냥이요.”

답하는 목소리가 어둡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서 데려오긴 했는데······ 조금 지나치게 빨랐던 걸까.

그때 유해빈이 내게 물었다.

“선배님.”

“왜?”

“저기 저 인간들, 쓰레기들 맞죠?”

눈짓으로 가리킨 곳.

자기가 제압한 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나는 확고하게 답했다.

“어, 맞아.”

살아 있으면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놈들. 나 자신이라고 떳떳한 건 아니지만, 저들은 분명히 그렇다.

이 대답으로 유해빈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었으면 했고, 한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견한 대답이 돌아왔다.

<첫 살인이니 뭐니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기 싫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마력으로 전한 말.

그리고 결심처럼 말한다.

“한꺼번에 죽일게요. ······제가.”

화르륵!

불길이 솟구친다. 유해빈의 마력으로 피어난 불꽃이 범죄자들을 불사른다. 대견하고, 미안하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 애가 오늘 어떤 각오를 다졌는지. 하지만, 그래도 멀쩡히 견디긴 어려운 일이었다고.

유해빈의 어깨와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네······.”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서, 처음에 못 했던 포옹과 닮은 자세를 만들며 유해빈이 작게 답했다. 그리고 남은 할 일.

조르디 문트와 카일리 던에게 다가가며 나는 떠보듯이 물었다.

“사실은 알고 있지?”

“커흑······.”

“뭐, 뭘······?”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카일리 던이 나를 올려다보며 반문한다.

자세를 낮춰서 그녀와 눈을 맞추고, 나는 다시금 물었다.

“왜 너희만 이 꼴로 만들었는지. 알고 있잖아?”

“몰라······ 모른다고······. 난 정말로 억울-”

“윤의성, 아니면 에블린 그레이스.”

“······!”

카일리 던이 눈을 부릅뜬다. 의식이 희미하던 조르디 문트조차 어렵사리 나를 본다. 일이 잘 풀려 내심 쾌재를 부른 나는 말을 이었다.

“둘 중 누군진 모르겠군. 하지만 연락이 닿지?”

“그, 그건······.”

배신자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배후라 할 수 있는 자.

현직 미합중국 대통령,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

내가 아는 정보를 종합해 대균열에 개입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웅이라고 유추해낸 자.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의 수장, ‘곡예사’ 윤의성.

둘 중 하나겠지 싶었다. 본래 대균열에 개입해야 했던 조직, 쿠엘라와 레스투르에서 끈이 닿는 영웅은.

반응을 보니 정답을 맞힌 것 같고.

나는 흥얼거리듯 그들에게 동아줄을 내려줬다.

“그 둘 중에 누군지, 언제부터였는지,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 먼저 말하는 놈은······ 글쎄, 살려줄까 하는데. 둘까진 필요 없으니까 먼저 말하는 한 놈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가 황급히 입을 뗐다. 살아날 수 있는 동아줄을 잡고 싶어서. 썩어 문드러진 줄이라 싹둑 잘라버릴 것도 모르고.

***

서울 시각으로 10월 23일 오후 4시. 한국 각성자 협회의 최상층.

“어우······.”

업무를 보던 윤의성은 피곤함에 찌든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커피······ 녹차, 녹차······. 어느 걸로 고를까-요.”

한국의 수십만 각성자들의 정점에 서 있는 이의 말이라기엔 채신머리가 없는 중얼거림. 하지만 윤의성은 지위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이라 알려져 있고, 모두가 그런 그를 존경했다. 이 또한 타인의 우러름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기에, 윤의성 자신도 그렇듯 소탈한 태도를 보이길 좋아했고.

커피 믹스를 종이컵에 한 잔 타고, 탈탈 털어 포장지를 버린 윤의성은 호로록 커피를 들이켜며 생각했다.

‘도진이 그놈이 보고 좀 느끼는 게 있으려나?’

그 자신이 손을 썼다는 걸 들키지 않게 공을 들여 내보낸 기사 하나. 생명력 연구는 없던 걸로 돌리고 집어치우라고.

경고와 배려를 담은 기사를 이도진이 읽었는지,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윤의성은 그게 궁금했다.

‘삼촌 말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미안하긴 하니까.

조카를 해치고 싶진 않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일이나 하자, 일.”

잠시의 휴식을 뒤로한 윤의성은 책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할 일이 산더미고, 그는 자신의 업무가 그토록 과하고 중대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자였다.

결정할 수 있다는 것.

마력이라는 힘을 더욱 반짝반짝하게 빛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그의 목표이자 행복이니까.

그리고.

읏차차, 우스꽝스러운 기합성을 낸 윤의성이 의자에 앉은 그때.

위유우웅-

책상 위로 마력이 일렁였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그곳에서 어떤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삼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외모.

새까만 흑발에 초록색 눈.

아름답지만 그보다 훨씬 짙게 표정에서 느껴지는 오만함.

그녀가 내리깔아보듯이 말을 건넨다.

[광대, 바쁜가?]

“좀 그런 편이긴 한데······ 왜 그러지? 급한 일인가?”

긴장하면서.

귀찮아하면서.

윤의성은 시큰둥한 어조를 꾸며서 물었다.

여성이 자조처럼 답한다.

[급하다면 급한 일이지. 내가 너 따위한테 직접 연락까지 했으니 말이야.]

모욕적인 언사.

윤의성은 참는다기보단 그저 흘려 넘겼다.

원래 저런 여자고, 엄밀히 따지면 저런 말을 할 자격도 있으니까.

과거의 영웅이자 지금의 미국 대통령.

윤의성이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

그녀가 말한다.

[‘저쪽’에서 지시가 왔거든.]

에블린 그레이스가 말하는 ‘저쪽’의 의미를 윤의성도 알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세계 최고의 마도 명문 그레이스 가문의 혈통.

가장 강한 각성자.

그녀의 프로필은 그게 다가 아니다.

한때 영웅이었던 그녀는, 이제는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윤의성은 물었다.

“어느 마왕이?”

영웅 에블린 그레이스.

마왕의 대리자이자, 이 세상과 균열 너머 세상을 연결해주는 연락책.

그녀가 기대하듯 웃으며 답한다.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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