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Chapter 46. 대화 (2)
영웅과 마왕의 싸움이 마침내 막을 내렸을 때.
서른여섯이던 영웅은 스물넷이 돼 있었으며 본디 열넷이던 마왕은 여섯으로 줄었다.
‘용맹한’ 가이어.
그는 영웅 셋과 공멸했다. 무려 다섯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고, 결국 힘이 다해 사지가 찢겨 죽었다.
‘현명한’ 데유브.
그녀 또한 다섯을 당해내지 못했다.
아르노 뒤레, 샬럿 테이트, 안드레이 일린, 염의준, 심정웅. 그들의 합공에 자랑스러운 머리가 터져 죽었다.
‘호쾌한’ 레넌.
그는 이시혁과 사투를 벌여 패배했다. 후회 없는 싸움이었노라 크게 웃으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찬란한’ 세이리스.
그녀가 정세빈과 펼친 대결은 마학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 싸움을 계기로 정세빈이 모든 속성 마법의 문을 열었고, 세이리스는 인세에 길이 남을 신화의 패배자 역할로 아로새겨졌다.
‘신실한’ 엘레나.
그녀는 영웅에게 죽지 않았다. 가장 경건하게 악신을 섬긴 마왕은 주인이 균열 너머로 힘을 행사하도록 해주는 제물이 되었다.
‘악랄한’ 조네티아.
최후의 싸움에 참전했으나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다만 육신이 터져 나가기 직전 피처럼 붉은빛이 일었다는 증언, 힘을 적잖이 소진했다곤 하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즉사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악신이 제물로 삼았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오만한’ 챠브.
넷과 싸워 넷을 죽이고, 그 자신도 선 채로 죽었다.
[천것들아, 내게 손대지 말라.]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강고한’ 카르딘.
올리비아 윈과 한태강이 그와 맞서 일군 기적은 이 세상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는 영웅담이 되었다.
가이어, 데유브, 레넌, 세이리스.
엘레나, 조네티아, 챠브, 카르딘.
그렇게 여덟 마왕이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여섯.
‘나태한’ 누엔.
‘온화한’ 모시즈.
‘무구한’ 블라셰.
‘우아한’ 티엘사.
‘영원한’ 파르투스.
‘미숙한’ 히티.
단지 우연인 걸까. 아니면 필연적으로 그리될 수밖에 없던 걸까. 그도 아니라면 이 세상에 신이 있어 인간들을 도운 걸까.
어쨌든 정말 잘 풀렸다고, 윤의성은 그렇게 생각한다.
강하고 교활하기에 위협이 되는 마왕은 거의 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거의 다 죽었다. 살아남은 여섯은 비교적 급이 떨어지는 자들이다. 무력과 성정 둘 다.
물론 그들도 마왕이다.
단신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대결이 성립하려면 영웅 수준의 강자가 최소 셋은 필요하다. 샬럿 테이트와 한태강이라면 둘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영웅보다 유의미하게 강하니 논외로 둬야겠지.
단순한 무력만 해도 초월적인 경지. 게다가 무력 외의 면모 또한 그러하다.
나태도, 온화도, 무구도, 우아도, 미숙도. 그 수식의 주인이 마왕이라면 단어 그대로의 의미라 할 수 없다.
나태하기에 과감하고, 온화하기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무구하기에 잔혹하고, 우아하기에 실수하지 않고, 미숙하기에 끝없이 발전한다.
실제 결과로도 보여주었다.
살아남은 여섯 중 첫손에 꼽을 만했고, 죽은 마왕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떨어짐 없던 자. ‘영원한’ 파르투스.
올해 봄, 그자가 함정에 걸려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았으니까.
‘무구한’ 블라셰와 ‘미숙한’ 히티. 에블린 그레이스가 대리하지 않는 두 마왕이 획책한 계획에 당해서.
윤의성은 내심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리며 되물었다.
“전부라고 하면 누엔과 모시즈, 티엘사까지 셋을 말하는 건가?”
[이봐, 성가시게 굴지 마. 당연한 걸 굳이 두 번씩 확인하지 말라고. 내가 이 새벽에 너와 길게 대화해야겠어?]
에블린 그레이스가 조롱하듯 묻는다. 그녀가 머무르는 백악관은 오전 세 시.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그녀의 눈가에 졸음이 살짝 스몄고, 표정 자체는 웃고 있으나 언뜻 불쾌감과 짜증이 깃들어 있다.
하긴 예전부터 그랬다. 악마와 싸울 당시 그녀는 윤의성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나마 인정하는 또래라 하면 이시혁과 정세빈 둘뿐.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데다 아직 잠재력을 온전히 개화하지 못한 샬럿 테이트는 덜 성장한 애송이로 봤고, 염의준에 이르러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윤의성 자신은 염의준보단 조금 나았으나 그래도 대우가 박한 건 사실이다. 십여 년 전부턴 더 그렇게 됐고.
대균열. 잠시 그때의 기억을 씁쓸하게 떠올린 윤의성은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지시를 내렸길래? 요즘 그쪽 한창 바쁜 거 아니었나?”
파르투스가 죽었다. 그 일의 전말을 윤의성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세 마왕이 조사하고 추측한 정보. 파르투스의 죽음이 균열 너머의 세상에 미친 파장.
그런 걸 에블린 그레이스에게 건너 듣기는 했다.
첫째. 파르투스가 대균열을 분석해 얻은 힘으로 특수한 균열을 열었다.
그 행사에 블라셰와 히티가 은밀히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들과 파르투스가 합작한 균열일지도 모르고.
둘째. 어쨌든 균열을 통해 인세에 강림한 파르투스가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고, 블라셰와 히티가 보낸 자객, 혹은 두 마왕이 조종한 아바타와 함께 소멸했다.
셋째. 파르투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확신한 블라셰와 히티가 대군을 움직여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누엔과 모시즈, 티엘사가 공동 서한을 보냈고, 블라셰와 히티는 자신들도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그토록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냐는 추궁엔 묵묵부답.
선수를 빼앗긴 세 마왕도 군대를 동원했고, 여섯 마왕 중 가장 번성하고 강대했던 파르투스의 영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됐다.
넷째. 파르투스의 목적이 밝혀졌다. 균열 너머 세상에 존재하는 악신의 파편을 손에 넣고자 했다고.
속내야 어찌 됐든 다섯 마왕 모두 헛소리라 일축했다. 그들이 직접 균열을 살핀 결과로도, 파르투스의 수하들을 심문해 나온 결과로도, 악신의 파편이 실재한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파르투스 홀로 주장한 것이며, 해서 그건 막대한 재화를 소모해야 하는 균열 연구를 진행하려 꾸민 구실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명분과 타당한 사유를 중요시 여긴 자였으니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고.
다섯째. 하지만 세 마왕은 완전히 기대를 버리진 않았다. 협력하며, 또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악신의 파편이 정말 존재한다면 자신이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윤의성이 알 순 없는 일이지만 블라셰와 히티도 비슷한 뜻을 지녔을 터였다.
여섯째. 대균열 이후 유지되던 평화가 깨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각 세력의 양상.
대균열 전엔 여섯 마왕 모두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게 둘, 넓게 잡아도 셋으로 구분된다.
먼저 움직여 파르투스의 세력을 5할 이상 거두어들인 블라셰와 히티.
뒤늦게 움직인 탓에 고작 3할도 흡수하지 못한 누엔과 모시즈, 티엘사.
그리고 십 년을 숨죽이고 있던 저항군이 틈새를 노렸다. 그들이 차지한 파르투스의 영지는 무려 2할에 달했고, 시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현재는 제3 세력으로까지 거듭나고 있었다. 양대 세력 중 한 곳이라도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버티지 못할 테지만, 그 둘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기에 당장은 무사한 상황.
그러니 균열 너머 세상은 몹시 긴장이 감도는 국면일 텐데······ 에블린 그레이스가 윤의성의 의문에 답했다.
[이제 얼추 정리됐지. 블라셰와 히티는 저항군을 내버려 두기로 한 모양이야. 우리 쪽에서 쳐들어올 때 저지선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 저항군의 수장은 용이라고 하던데, 잔머리를 꽤 잘 굴렸다고 해야겠지.]
블라셰와 히티의 비호 아닌 비호를 받고 있다면 섣불리 공격을 감행할 수 없다. 저항군을 깨뜨리고 쳐들어갈 순 있겠으나 승산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윤의성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쪽’이란 말이지······.”
에블린 그레이스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한 말. 마왕을 ‘우리 쪽’이라고 지칭했다.
이십여 년 전엔 세상을 지키고자 맞섰던 악마. 영웅 중에서도 특히 명성이 드높았던 그녀가 그들을 한편으로 여기는 게, 한때는 같은 영웅이었던 자로서 어쩐지 씁쓸했다.
‘넌 뭘 원해서 움직이는 거지?’
에블린 그레이스.
모든 사건의 시초라고 해도 딱히 과언이 아닌 자.
십여 년 전 그녀가 영웅들을 포섭했다. 여섯 마왕과도 연락망을 만들었고, 대균열을 일으킬 수 있게 이론과 물자를 제공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이적 행위를 계속해나갔다.
누엔, 모시즈, 티엘사. 여섯 마왕 중에 셋만 따로 골라 이 세상의 대리자를 자처했다. 그들 셋은 에블린 그레이스를 매개로 모였고, 그걸 알지 못한 다른 세 마왕은 각자 움직였다.
블라셰와 히티가 힘을 합쳤다. 파르투스도 끌어들였다가 배신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재의 정세가 완성된 것이다.
“너도 참 대단해. 내가 보기엔 마왕들 다 네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같은데.”
[적절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해두지. 그 이상은 너 따위가 평해도 될 사안이 아니다.]
“아무튼, 그쪽이 쉬어가는 분위기라는 건 알겠는데 그럼 마왕들이 내린 지시는? 총애하는 대리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린 거지?”
그리고 에블린 그레이스가 답한다.
[대균열을 다시 한번 열려고 한다.]
“······어째서?”
[이유는 네가 알 것 없어. 파르투스의 영지와 연구를 흡수한 게 좋은 원동력이 됐고, 머잖아 실행할 수 있을 거야. 광대, 너는 적당히 앞에 내세울 버러지나 알아봐. 몇 놈 있지 않나? 네가 연락할 수 있는 놈들.]
“후······ 그래, 알겠-”
피슈우-
윤의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홀로그램이 사그라들었다. 지시할 것만 전달하고 에블린 그레이스 쪽에서 통신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 가지고 있는 경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하여튼 성격 참 끝내주게 좋아.”
푸념처럼 내뱉으며 헛웃음을 지은 윤의성은 책상에다 펜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앞에 내세울 버러지. 마력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범죄 조직을 몇 알고는 있다.
‘쿠엘라랑 레스투르가 좋으려나?’
업무를 마치면 연락해봐야겠다 싶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그런 자괴감이 아주 잠깐 일렁였으나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인제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라면.
그러면 애초에 에블린 그레이스에게 협력하면 안 됐다.
***
현지 시각으로 10월 23일 새벽.
유해빈은 감탄스러운 마음 절반, 안쓰러운 마음 절반으로 생각했다.
‘진짜 신기하네······.’
저만치 떨어진 곳.
이도진이 두 사람과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중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조르디 문트와 카일리 던.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질문과 두려워 벌벌 떠는 대답. 그것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유해빈은 다시금 나직이 되뇌었다.
‘도진쿤 이럴 때 보면 진짜 엄청 나쁜 사람 같아 보이는데.’
그게 감탄스럽고, 또 안쓰럽다.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