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Chapter 46. 대화 (3)
물론 사람이 한 가지 모습만 지니진 않는다. 어떤 상황인지와 누굴 대하는지에 따라 다른 언행을 보이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차이가 크긴 해.’
이도진은 변화의 폭이 극심하다. 지금처럼 가면을 쓰고 있을 때와 가면을 벗고 평범하게 지낼 때.
서글서글한 성격에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오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을 죽이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빈틈없이 계획을 수행해나가는 테러리스트.
본래 모습에 가까운 건 전자겠지. 원해서 저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그걸 알기에 유해빈은 다시금 다짐했다.
‘도와줘야 해.’
비록 어설프나마 오늘은 그런대로 해낸 것 같다. 서연희와 한세라만큼 멋들어진 조력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
그때 이도진이 적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인가?”
유해빈이 슬쩍 듣기엔 그래 보였다.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 두 범죄 조직의 수장은 윤의성과 연락할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오래전부터.
협력 관계라 칭할 순 없다. 엄밀히 말하면 윤의성이 그들을 제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있는 한 한국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만약 조금이라도 눈에 띈다면 즉시, 무조건 너희를 추적해 말살할 거라고.
유해빈은 오늘에야 안 일이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범죄 조직과 소통한 양지 기관이 더러 있었다.
테러리스트라고 앞뒤 하나 없이 내키는 대로만 날뛰는 게 아니었다. 요령껏 눈치를 보며 주요 국가의 정세를 살피고, 만만한 곳을 골라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비겁하고 치졸한 인간들······.’
유해빈의 감상이야 어쨌든 그게 진실이었고, 레스투르와 쿠엘라는 윤의성과 좀 더 긴밀한 끈을 만들고자 애써왔다. 영웅을 뒷배로 삼을 수 있다면 큰 이득이니까.
그리고, 이걸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윤의성은 서슬 퍼런 경고를 날렸단다. 가당찮은 개수작을 부린다면 자신이 직접 그들을 소탕하겠다고.
우연의 일치인지 그게 가장 합리적인 대응이었는지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는 거의 비슷한 답을 했다. 자신과 한 번만 연락할 수 있는 마법을 윤의성에게 전한 것이다. 언제든 대화하고 싶을 때 발동하라고. 일방적으로 연결된 구성체이기에 윤의성이 그걸 없애버렸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디 꺼내 봐.”
이도진이 단출하게 이른 명령.
시종일관 두려워하며 있는 것 없는 것 다 낱낱이 실토하던 두 범죄자가 처음으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들도 직감했겠지. 윤의성의 연락을 받을 수 있는 마법만이 자신의 목숨줄이라는 걸. 이것까지 입수하고 나면 이도진이 그들을 살려둘 이유가 아예 남지 않게 된다.
“그건······.”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가 일순간 눈빛을 교환한다. 가면이 사라진 입가로 피식 웃으며 이도진이 일렀다.
“먼저 말하는 놈은 살려줄게.”
“······.”
“······.”
여전히 침묵. 그리고 이도진이 이해했다는 듯 중얼거린다.
“딱 여기까지 멍청하고, 여기까지 먹히는 거네.”
“뭐?”
“그게 무슨-”
“딜레마긴 해. 처음부터 사이좋게 입 다물었으면 둘 다 조금은 오래 살았을 텐데.”
턱, 터억.
이도진이 양손을 뻗었다. 운신할 수 없는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의 정수리에 올린다. 이내 검게 물든 마력이 일렁인다.
“아아······ 끄아아아악!”
“허어억! 으헉, 커허억!”
유해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도진이 저들을 상대로 뭔가 시험했다는 것만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지니고 있을 정신 계통 능력이 어디까지 효력을 발휘하는지.
두 범죄자가 모든 걸 숨김없이 답한 건 죽기 싫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의식에 능력이 작용한 덕분일 터였다.
S급 각성자에게는 살아날 길이 하나 남은 시점부터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이제 효용 가치가 없어진 그들을 처리하는 거다. 이도진이 조롱처럼 일러준다.
“여기까지 나불거렸으면 빼내는 게 어렵진 않거든.”
“아, 안 돼. 아아아악!”
“이 악마 같은 놈-!!!”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의 육신이 발끝에서부터 사라져 간다. 비명과 분노를 내뱉었으나 그들은 저항할 수 없다.
스아아아아!
마침내 그들의 살점과 뼈, 피 한 방울까지 희뿌연 재로 휘날렸고, 어느새 이도진의 양손엔 붉고 푸른 마력 구성체가 쥐어져 있다. 저게 윤의성의 연락을 받을 수 있는 마법이겠지. 그것들을 능숙하게 갈무리한 이도진이 뒤편으로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당신들은 가도 좋다. 속이 검은 자들은 미리 처리해뒀고, 큰일을 앞뒀으니 당분간 각자 조직 활동은 자제했으면 좋겠군. 내 말뜻을 헤아려주겠나?”
“으흠, 그건 우리가 잘 일러두겠네.”
“저 친구는 워낙 어렵게 말하는 게 취미니까 내가 쉽게 설명해주지. 우리 명령이 있기 전엔 어디 테러한다고 설치지 말라는 거다. 죽기 싫으면 말이야.”
“형, 저는 이 사람들 바로 따라가면 되는 거죠?”
조금 전부터 모여 있던 팬텀의 정규 단원 셋. 노인과 거한, 아이가 이른 말. 몹시 자존심이 상할 텐데 남은 세 조직의 누구도 따지고 들지 않는다. 유해빈이 볼 땐 그게 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무섭긴 해.’
이도진이 원한다면 여세를 몰아 세 조직 모두 궤멸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 생각할 머리가 있으면 저들도 그걸 알 거고, 인제 와서 저항할 수는 없다. 팬텀 단원 셋이 조직 하나씩을 맡아 감시할 예정이니까. 안색이 거무죽죽한 세 조직을 보며 이도진이 일렀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계획은 이른 시일 내에 진행할 것이며 당신들이 배신하지 않는다면 팬텀도 당신들과 끝까지 함께 간다. 모든 이익과 영광을 나누어 가질 것임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맹세하지.”
신기하게도 세 조직의 범죄자 모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유해빈은 황당해하며 의문을 되뇌었다.
‘뇌라는 게 없나?’
얼마나 멍청하면 저 말을 그대로 믿는 걸까. 정확히는 이도진의 정신 계열 능력이 뛰어난 거겠지만.
그즈음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지켜보던 서연희가 나섰다.
“가기 전에 서약 하나만 하고 가면 돼. 못 믿는단 건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조직의 결속도 다질 겸.”
이 일을 발설하지 못하는 금제. 거기까지 완벽히 끝마친 다음 세 조직과 세 단원이 공간을 넘어 사라졌다.
“오랜만인데 아쉽네요. 형, 다음에 또 봐요!”
“내 자네를 믿겠네. 자네도 잊지 말게나.”
“조만간 또 보자고. 그땐 더 재밌는 일이겠지?”
아이와 노인, 거한이 한마디씩 이르곤 세 조직과 동행했다.
남은 사람은 넷. 유해빈 자신과 이도진. 서연희와 토끼 가면.
그리고 서연희가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갈까?”
“어······ 저희 둘이요?”
자신에게만 한 말 같아 유해빈은 짐짓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저쪽부터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멀찍이 서 있는 토끼 가면. 넷 중에서 가장 외부인에 가까운 그녀부터 보내고, 남은 셋은 잠깐 담소나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하지만 서연희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답한다.
“토끼는 알아서 돌아간다고 했고, 내 귀염둥이는 남아서 할 일이 있다네?”
그러곤 곧장 유해빈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다.
“어? 어어?”
슈아아아-!
속절없이 공간 너머로 향하며 유해빈이 당황하는 가운데, 서연희가 타이르듯이 마지막 말을 일렀다.
“싸우지 말고.”
다음 순간.
스으으······.
자기 집 현관에 발을 디딘 유해빈은 옆에 선 서연희에게 물었다.
“어······ 교수님 왜요? 남아서 할 일? 싸워요?”
“아, 그렇게 걱정은 안 해도 돼. 도진이가 토끼랑 좀 할 얘기가 있대서.”
“무슨 얘긴데요?”
서연희는 자세히 답해주지 않았다. 본인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놓고선 조금은 근심 어린 어조로 말할 뿐이었다.
“글쎄······ 이것저것?”
***
+
<킬 더 이블> 4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조정합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0일 자정까지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곡예사’ 윤의성과 대면하고, 어떠한 신체적·정신적 위해도 가하지 않으며 협력할 것
-클리어 보상:
1) 주관식 질문 1회
2) 소질 포인트 0.3p
+
서브 퀘스트가 바뀌었다. 단지 윤의성과 만날 것에서, 어떤 식으로도 해를 끼치지 말고 협력하라는 내용으로.
클리어하면 주어지는 보상도 바뀌었다. OX 질문에서 주관식 질문으로 상향한 데다 소질 포인트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어지간히 급했나 본데.
내심 조소하며 나는 홀로그램의 의도를 헤아려봤다.
놈이 본래 원한 건 내가 쿠엘라, 레스투르와 접선하는 거였겠지. 그들을 통해 윤의성과도 대면하고 대균열 사건에 나를 끌어들이는 것. 그걸 원했던 거다.
하지만 쿠엘라와 레스투르는 내가 죽였고, 윤의성과 연락이 닿을 수단도 자력으로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홀로그램이 내게 부탁하는 거다. 지난 십 년 동안 놈이 보인 태도 중에 가장 정중하고 저자세로.
윤의성까지 죽이진 말라고. 대균열 관련 일을 내가 주도하는 건 용인하겠지만 윤의성 그놈은 꼭 살려두라고.
어떻게 할까.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거래를 제안하는 것치고는 보상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한테 주는 보상 말고, 네가 저질러놓은 짓거리 수습해볼 생각은 없나?
<이세아는 혼자가 됐다.>
그 문장을 없던 걸로 한다거나.
일단 홀로그램이 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고,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저만치에 가만히 서 있는 토끼 가면. 이따금 나를 흘끗 쳐다보다가, 그런 적이 없던 척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
저벅, 저벅.
고요한 공간에 발소리가 난다. 내가 걸음을 내디디자 토끼 가면이 흠칫하며 나를 본다. 그녀 쪽으로 계속해서 걸으며 나는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이요. 당신은요?”
“나도 그런 편이야.”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한 차례 마음에 이는 분노를 참아냈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아를 죽일 뻔한 너한테 그 일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게, 그게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남아서 할 일이라는 게 뭐죠?”
“너랑 못 본 지 오래됐잖아. 얘기 좀 하고 싶어서.”
흐으······.
무척 작게 들린 한숨. 토끼 가면의 가슴께가 살짝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그녀는 지금 긴장하고 있다.
그리고 기뻐하고 있다.
무슨 대화일지는 둘째치고, 나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서울에서의 일은 들었어요. 런던 쪽 일······ 설명해주지 않아서 미안했어요.”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건 네가 의도한 거야?”
“그냥,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런던에서 뭘 했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는 없고?”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을 때마다 사과를 듣는 것 같다.
너한테 정말 사과를 듣고 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 향후로도 그 가능성을 절대 만들고 싶지 않은 일은 따로 있는데.
그걸 언급하지 못하는 걸 답답하게 느끼며, 나는 말을 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가능하면 대답해줬으면 좋겠고.”
“······뭔데요?”
나는 그녀에게 첫 번째로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질문했다.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라는 거, 들어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