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89화 (189/207)

#189화. Chapter 46. 대화 (4)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라는 거, 들어본 적 있어?”

올봄에 악마의 손 탈취 작전을 마친 후였다. 뚜렷한 정체도 모르는 그것의 존재를 내가 처음 안 건.

집에 돌아와 올해의 첫 번째 객관식 질문을 사용하면서, 그때 알게 됐다.

+

객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세계의 수호자>의 주인공 이시혁과 히로인 정세빈,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이도진, <킬 더 이블>의 등장인물 이세아. 네 사람이 동시에 생존할 방법이 무엇인가.

[보기] (질문자 이도진을 기준으로 서술합니다.)

a.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을 교체시킨다

b. 특성 ‘검은 심장’을 완전하게 각성한다

c.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파괴한다

d. <킬 더 이블>의 주인공과 싸워 패배한다

➀ a, c

➁ b, d

➂ b, c

➃ a, b, d

➄ a, c, d

+

기실 홀로그램을 믿지 않은 질문이었다.

‘행복하게’ 살 방법이라고 묻지 않았다. 놈을 신뢰할 수 없어서. 조건을 더 구체화해도 마찬가지다.

‘질문자인 이도진의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 방법.

‘이시혁, 정세빈, 이도진, 이세아 넷 모두 행복하다고 여기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 방법. 그런 식으로도 묻지 않았다.

답변을 얻을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함정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주 교묘하게, 내가 아무리 궁리해도 어떤 게 함정인지 알아낼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기어이 목적을 이루어낸 다음, 그제야 겨우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하도록, 홀로그램은 그런 답변을 건네줬겠지.

그래서 나는 한 가지만을 물었다.

우리 가족 네 사람이 동시에 생존할 방법. 홀로그램을 통해 알아낼 건 그거면 족하고, 나머지 조건은 내가 앞으로 달성해나가야 할 부분이라 판단했다.

질문의 범위를 크게 잡았으니 추론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아질 거고, 그게 오히려 함정에 당하지 않을 방도라고 여겼다.

그리고 지난 반년을 고민하고 궁리한 결과, 나는 반쯤 확신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뭐든, 홀로그램이 뭘 노리든, 행복과 불행을 배제한 답에 한 가지만은 포함될 거라고.

보기 b.

특성 ‘검은 심장’을 완전하게 각성한다.

이건 꼭 들어가겠지. 이 조건을 성립하지 않고도 우리 가족 넷이 동시에 생존하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거고.

그리고 보기 b가 확실하다고 가정하면 선택지는 셋으로 줄어들게 된다.

➁ b, d

➂ b, c

➃ a, b, d

a, c, d 모두 아직 유효하다. 아무래도 연관성이 있는 듯한 a와 d의 상관관계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고, 현재 가시권이라 할 만한 보기는 c밖에 없다. 등급 외 보물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파괴할 것.

천 년도 훨씬 더 이전, 은마산에서 타락한 장생종 무리를 쓰러뜨린 토끼 가면이 당시 그것의 소유자였다.

그 잔여 마력으로 운용된 은마산 유적은 검은 심장과 관련이 있다 추측되고, 세아와 진유리가 수학여행에서 겪은 사건으로 볼 때 <킬 더 이블>의 핵심적인 비밀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을 터였다.

토끼 가면은 은마산 전설로부터 백 년이 지난 시점에도 이 땅에서 고대의 각성자들과 함께 싸웠고.

이 정보들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그걸 알지 못하는 가운데 토끼 가면이 내 질문에 답했다. 조용하고 나직한 어조로.

“달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져요.”

“······그렇지.”

그녀의 대답이 옳다. 정상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달도 해와 같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흐르니까.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라는 이름 자체부터가 모순이겠지.

예전엔 이걸로 떠올린 가설이 하나 있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0에 가깝다.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도 무방하다.

서연희가 내게 말해줬으니까.

토끼 가면은 팬텀에 입단해서 나와 처음 만난 게 확실하다고.

또한 절반의 확률로, 그 가설을 폐기하는 데 힘을 실어줄 말이 있었다.

‘토끼 걔······ 도진이 너 보자마자 홀딱 반한 것 같던데?’

서연희가 알려줬다.

토끼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나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게 관심과 애정을 내비치니까.

그러니 아닐 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고.

내심 힘주어 되뇐 나는 토끼 가면에게 재차 일렀다.

“근데 그걸 말한 건 아니야.”

“······.”

말없이 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밤에 밝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곤 다시 나를 응시한다. 옅게 떨리는 눈동자. 나는 원하는 걸 명확히 지칭했다.

“‘동쪽으로 흐르는 달’이라고 하면 너도 알 것 같은데. 지금 가지고 있어?”

토끼 가면도 그 이름으로 알고 있는진 모르지만.

그걸 언급함으로써 경계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말했다. 최대한 감추는 것 없이 들으려면 정공법이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걸 말하는 건가요?”

토끼 가면이 품에서 자그마한 구체를 꺼냈다. 영롱하게 붉은빛을 내는 보석. 그 안의 풍경이 내게도 보인다.

이 세상을 작게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 밤하늘에 뜬 달이······ 정말로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유의미한 결과. 나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걸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

“예전부터요.”

“네가 만든 거야?”

“······전부 다는 아니에요.”

대답이자 경고였다.

토끼 가면은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언제 만들었는지 말할 생각이 없다. 누구와 함께 만들었는지도.

강한 직감이 예언처럼 일렁인다.

당장 은마산 얘기를 꺼내면 안 돼. 섣불리 거기까지 가면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종적을 감춰버릴 거다.

나는 에둘러 돌아가듯 그나마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파악하려 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아?”

“보스가 알려줬나요?”

“아니, 보스는 모르는 일이야.”

방금 대화로 정보를 얻었다. 서연희조차 알지 못한다곤 하나 ‘동쪽으로 흐르는 달’의 존재가 철저히 비밀은 아니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는 이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훗날을 기약해야 할까. 아니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더 나아가야 할까.

양쪽 다 장단점이 있다. 가장 나쁜 결과도 감당을 못할 수준은 아니고. 그래서 단순한 이유로 정했다.

홀로그램. 놈은 내가 이쯤에서 멈췄으면 하겠지.

나는 그것과 반대로 행동했다.

“아······.”

토끼 가면이 실낱처럼 작게 말을 흘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놀람과 충격을 담아내며 나를 응시한다.

가면을 벗고 마법을 해제한 본래 모습. 내 정체를 공개한 나는 살짝 멋쩍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아?”

***

꿈결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벌써 삼 년을 알아 온 팬텀의 이인자. 이도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토끼 가면은 생애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다. 이대로 계속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도 고민할 것 없이 이대로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이도진이 차분하게 말을 끝마쳤다.

“그래서, 은마산에서 알게 된 거야. 네가 그 당시부터 활동하고 있던 것도, ‘동쪽으로 흐르는 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아까 말해줬지? 나는 그런 게 가끔 보이거든.”

그리고 침묵.

나눌 이야기는 거의 끝났다.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테러리스트 일을 해나가는지, 그런 건 얼추 들었다.

‘어떻게 하지······.’

토끼 가면은 마음속으로 초조하게 되뇌었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 분이라도, 단 일 초라도 이 시간이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허심탄회하게 말한 이도진과 달리 그녀는 그가 듣길 원하는 대답을 회피했으니까.

붉은 보석을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무엇을 담고 있는지도.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토끼 가면 자신의 정체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도진도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았고, 그러니 토끼 가면에게는 남은 말이 없다. 기껏 떠올린 건 뻔뻔한 질문뿐.

“왜 반말해요?”

“응?”

“나이, 제가 당신보다 많잖아······요.”

그러자 이도진이 피식 웃는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워낙 키 차이가 나서 저절로 내려다보는 시선.

이내 그가 반문했다.

“존댓말 듣고 싶어?”

“아뇨.”

사실 거짓말이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듣기에 어색하고 기분도 이상할 것 같으니 많이는 말고 딱 한 번만. 그때 그가 기습적으로 말했다.

“토끼 누나? 이러면 되나요? 아, 되게 좀 어색하네.”

“아니라고 했는데······.”

가면 속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여실히 느끼며 그녀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이도진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창피해하는 것 같은데 맞아?”

“아니에요.”

붉어진 얼굴색을 들키지 않는 게 다행. 보여줄 마음도 없으면서, 토끼 가면은 두근거리는 충동을 꺼내어 물었다.

“안 궁금해요?”

“뭐가?”

“가면, 벗은 거요.”

“글쎄? 섭섭한 거 반에 궁금한 거도 반?”

그의 입에서 ‘섭섭하다’라는 단어가 나온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보여줄 수도 없는 주제에 말을 꺼내지나 말걸. 뒤늦게 찾아온 후회를 되뇌며 그녀는 또 한 번 변명했다.

“안 궁금해도 돼요. 별로······ 하나도 안 예뻐요.”

“내가 안 봤는데 어떻게 알아? 봐야 아는 거지. 아, 맞다. 이건 물어봐도 되나? 너 눈이랑 머리카락 색 있잖아. 그거 자연이야?”

“······그런 거 염색해본 적 없어요.”

그건 그녀의 신체적인 콤플렉스다. 새빨간 눈. 은빛 머리칼. 다른 곳들도 썩 마음에 들진 않으나 특히 그 두 가지가 싫다. 거울을 볼 때도 이상하고, 다른 의미로도.

“눈도 빨갛고, 머리카락 색도 이상하고, 그래요.”

“그래?”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이도진이 한 말.

그가 보기에는 이게 예쁜 걸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녀 자신에겐 저지른 죄를 상기시키는 표식일 뿐인데.

그때 하나 말해야 할 게 떠올랐다. 이걸 언급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염치가 없고, 말하자마자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

“미안해요.”

“왜?”

“당신 동생이랑······ 알고 있죠?”

런던에서 겁 없이 덤비길래 혼쭐을 내준 이세아.

이도진은 그녀의 오빠고, 한데도 그는 그걸 추궁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러니 먼저 사과해야겠지. 너무나 뻔뻔스러운 말인 걸 그녀 스스로 알면서도.

잠시 말이 없던 이도진이 답했다.

“그 일 때문에 걔랑 싸웠는데. 왜 말을 안 했냐, 내가 뭘 잘못했냐, 지금 화해도 제대로 못 했어.”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토끼 가면은 또 사과했다.

“미안해요······.”

“뭐, 솔직히 괜찮단 말은 못 하겠는데, 그래도 괜찮아.”

뜻밖에 서글서글한 어조.

토끼 가면은 이유를 물었고, 이도진이 웃으며 답한다.

“오늘 집에 가면 화해할 거거든.”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

“나 왔어.”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고 들린 말.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세아는 몸을 일으켰다.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연습한 대로 하자. 일단 평범하게, 태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거실로 나가서 목격했다.

“어······.”

말끔해진 집안을 둘러보는 이도진의 표정. 무척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연습한 대로 하자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오빠의 반응에 기쁨이 차올라서, 저도 모르게 발음이 꼬이고 말았다.

“다, 다녀왔, 셨어······요?”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말.

“어······ 뭐라고?”

고개를 갸웃한 이도진이 긴가민가하며 물었고, 이세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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