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Chapter 46. 대화 (5)
‘다녀왔어?’라고 차분하게 말하지 못했다.
잘못을 반성하고 화해를 청하는 뜻을 담아 ‘다녀오셨어요?’라고 공손히 인사한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던 것 중에 가장 어설프고 창피한 대사가 나와버렸고, 동생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잠시 되짚는 눈치던 이도진이 이내 모른 척해주며 마주 묻는다.
“응, 저녁 안 먹었지?”
물음에 답하려 반사적으로 입을 떼면서 이세아는 고민했다.
안 먹었다고 간소하게만 답할까.
아니면 지금 여섯 시도 안 됐다고 조금은 퉁명스럽게 답할까.
정작 꺼낸 말은 둘 다 아니었다. 저절로 흘러나온 투정이 따로 있었다.
“오늘 아직 한 끼도 안 먹었어.”
“한 끼도? 왜, 컨디션 안 좋아? 몸살기 있어?”
“······오면 같이 먹으려고.”
당황해 걱정하는 오빠에게 답한 이세아는 쌩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배가 하나도 안 고팠건만 오빠한테 하소연처럼 말하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
이런 다툼이 또 있으면 좋겠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 신비로운 현상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면 다이어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에 둔 종이를 쥔 그녀는 방을 나섰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청소해둔 거실과 부엌을 보던 이도진이 묻는다.
“대청소했어?”
“그냥, 조금.”
“조금이 아닌데?”
혼잣말처럼 반문하는 오빠의 입가와 뺨 어림으로 살짝 웃음기가 보인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효과가 확실했다.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상당히 기뻐하는 것 같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간 이세아는 대뜸 종이부터 내밀었다.
“중간고사 친 거.”
필기 시험지. 가채점해 앞장에 점수를 적었다. 한 장씩 종이를 넘기는 오빠의 얼굴을 이세아는 유심히 살폈다. 놀라고, 또 놀라고, 그러다 결국은······.
“엄청 잘 쳤네?”
무척이나 환한 웃음을 보인다.
전체평균 92점. 이세아 개인으로선 역대 최고 점수에 진유리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점수를 얻기 위해 카페인 폭탄주를 물처럼 들이켠 나날을 떠올리며, 그녀는 이번엔 괜히 새침하게 답했다.
“별로 안 어려웠어.”
“아닌데? 교수님들 다 필기 변별력 있게 냈다고 하시던데.”
교수 기준으로 ‘변별력 있다’라는 건 시험이 끔찍하게 어려웠다는 뜻. 이세아는 들뜨는 마음과 으쓱하는 어깨를 감추며 말했다.
“다 아는 거였어.”
“그래? 우리 세아 공부 되게 열심히 했나 보네.”
우리 세아.
뭔가 어린애 취급하는 말 같지만 듣기 싫지 않다. 이세아는 웃음이 나오기 전에 몸을 홱 돌리며 오빠에게 물었다.
“밥 언제 돼?”
“아, 배고프지? 밥은 있으니까 한 삼십 분? 메뉴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구워서 먹고 싶어.”
“고기? 집에 삼겹살 조금밖에 없을 건데······ 금방 나가서 사 올까?”
사실 이 대답을 노린 요청. 이세아는 마지막으로 오빠에게 답했다.
“아까 사놓은 거 있어. 마트에서 장 봐온 거.”
등 뒤에서 이도진이 행복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이세아도 마찬가지. 마음이 둥실둥실 뜨고,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십 분쯤 지났을까. 거실엔 어디 식당이라도 온 것처럼 으리으리한 상이 차려져 있다. 맥주와 소주병도 하나씩. 집에 있을 땐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데. 이세아는 조금 의아해서 오빠에게 물었다.
“술 마시려고?”
“한두 잔만?”
지글지글 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가 거실에 퍼져 간다. 얼추 다 익은 걸 확인한 오빠가 그녀의 접시에 고기를 놓아줬다.
“다 익었네. 이건 먹어도 되겠다.”
말없이 젓가락을 든 이세아는 고기를 집었다. 그리고······.
“응?”
이도진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본다. 집은 고기를 여전히 오빠의 입 근처로 가져다 댄 채로, 이세아는 눈으로만 말했다. 멀뚱히 있지 말고 주면 빨리 먹으라고.
기분이 좋고, 어색하고, 고맙고. 눈빛에 여러 가지 감정을 담은 이도진이 고기를 받아 입에 넣는다.
지글지글 굽고, 우물우물 씹고, 이제 이세아는 기습적으로 말했다.
“미안해.”
오빠는 원래 입에 뭘 넣고 있을 때는 되도록 말을 안 한다. 그 틈을 노려서, 그가 대답하기 전에 이세아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말도 안 하고 숨긴 거, 잘못해놓고 버릇없이 대든 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사과도 안 하고 있었던 거······ 전부 다.”
이세아에게 가장 두려운 건 그거였다. 당연하지 않다는 것.
오빠가 이 집에서 그녀와 함께 사는 게, 아껴주는 게, 이도진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인 이세아를 사랑하는 게,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
이세아는 열두 살 때부터 그렇게 느꼈다. 자신이 친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당연하지 않다는 건 바뀔 수도 있다는 거다. 모른다는 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순간이 당연하지 않고, 명확하지도 않았다.
몹시 심하게 다퉈도 오빠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할까. 설령 다툰 게 아니더라도 언젠가 우연히 싫은 면이 보이고 단점이 보여서,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동생이 보이면 눈살을 찌푸리고, 짜증이 치솟고, 밥 먹는 것도 꼴 보기 싫어지는 건 아닐까.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고 누가 어떻게 장담할까.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당연히 부모님의 딸이고 오빠의 동생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친딸이 아니고 친동생이 아니었는데.
이미 당연했던 게 당연하지 않게 돼버렸는데, 앞으론 그러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이건 오빠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걸 얼마나 실감하고 있느냐, 그런 것으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녀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적이 없다면 결코 이 불안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받고 있어서, 자신도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래서 불안한 거다. 단단하지 않은 지반 위에 자리한 행복이 금방이라도 스러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느껴져서.
이런 마음을 오빠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창피해서,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당연하지 않다는 걸 오빠에게 말하면 지금보다도 더 그렇게 될까 봐. 그래서 이것까진 말하기 싫다.
이세아는 그저 예전처럼 화해하고 싶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이번 다툼이 남매 사이에 단 하나 티끌만큼의 악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화해해서 이전보다 더 사랑받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녀 자신이 품은 사랑도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도진이 답했다.
“진짜로 미안해?”
“응······.”
“그래서 집도 치우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장도 봐오고 그런 거야?”
“응······.”
이세아는 고개를 떨구고 답했다. 이도진은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고 있다. 바로 그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물음이 들렸다.
“미안하고······ 불안해서?”
“아······.”
들키고 말았다. 미안한 것보다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고. 오빠를 위한 것보다도 그녀 자신이 불안한 것 때문이었다고.
이세아는 두려워하며 시선을 올렸다. 오빠가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지금 안 걸까? 혹은 이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걸까.
안다면 실망할까.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는 걸까. 이젠 정말로 당연하지 않게 되는 걸까.
그리고······.
“왜······?”
이세아는 엉겁결에 새어 나온 말처럼 물었다.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는 오빠의 눈동자가, 너무 많이 슬퍼 보여서.
그리고 들었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간직하고, 마음으로 되뇔 약속.
“오빠 절대 너 놔두고 어디 안 가. 싸웠다고 미워하지도 않을 거고.”
“······화는 냈잖아.”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이세아는 후회했다. 놔두고 안 간다고 하면 고마워만 하면 될 걸 굳이 그 얘기는 왜 꺼낸 걸까.
하지만 오빠는 언짢아하지 않았다. 고기를 몇 점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고,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디 안 가고, 안 미워하고 걱정되니까 화냈지.”
“그러면 앞으로는?”
이세아는 자기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자꾸 칭얼대는 걸까. 뭘 자꾸 대답을 요구하는 걸까. 알겠다, 고맙다, 잘하겠다, 이런 말이나 하면 될 텐데.
하지만 흘러나오는 말을 통제할 수 없고, 그녀는 기어이 이렇게까지 말했다.
“결혼하면, 이 집 나가서 살 거잖아.”
언젠가 동생과 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겠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 나가거나. 어쨌든 떨어지는 건 정해져 있다.
그러자 이도진이 답한다.
“음······ 당장 말고, 오빠 나중에 결혼하면······.”
기대와 불안.
이어진 말은 멋은 없었다.
“근처 살면 어때? 한 집은 아니라도 되게 가까이.”
“······시누이가 자기 옆집 사는 걸 누가 좋아해.”
“그거야 적당히 조율해서? 근데 막상 그때 되면 네가 오빠 지긋지긋하다고 어디 멀리 나가 살 수도 있을걸?”
“아니야.”
이세아는 그렇게만 말하고 고기를 집어 먹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기쁨과 실망과 실망.
가까이서 살자고 한 건 기쁘다. 한 집이 아닌 건 조금 싫다. 그리고······.
‘결혼하는구나.’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할 생각은 있다는 게······. 이세아는 떠오른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고기 더 구울까?”
“먹고 있어. 왜 안 먹어?”
“먹고 있는데?”
“내가 다 먹었는데 언제 먹었다고.”
“오빠도 그때 화내서 미안했어.”
“응······.”
“아니, 근데 진짜 내가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하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걸 말도 없이······ 하······.”
“다섯 번째야.”
“뭐가?”
“그 말. 나 혼낼 때 네 번 말하고 지금이 다섯 번째.”
“뭐, 그러길래 누가 말하지 말래? 이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했더니-”
“언제.”
“너 어릴 때.”
“기억 안 나.”
“사진으로 다 남아있는데?”
“······빨리 먹어.”
“설거지 내가 할게.”
“됐어, 너 오늘 집 청소한다고 고생했는데. 이거 몇 시간 걸렸어?”
“좀 오래.”
“어? 내가 한다니까?”
“오늘 내가 집 관리했으니까 내가 다 할 거야.”
“혹시 그런 건가? 얌체처럼 마지막만 홀라당 가로채지 말라고?”
“비슷해.”
“아······ 그래. 그럼 나 씻는다?”
“나도 설거지하고 씻을 건데······ 씻고 나면 ‘그거’ 해줘.”
“이거 왜 말 안 하나 했네.”
“요새 공부 열심히 하고, 오늘 집도 치워서 어깨랑 등 아프고, 팔다리도 뭉치고, 힘들어.”
“아, 예······.”
“흐으······.”
“이세아 고객님, 이제 좀 피로가 풀리시나요?”
“아직 부족해. 오랜만에 받는 거니까 오늘은 더 과감하게, 격하게,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해줘.”
“이거보다 더 세게?”
“응······. 아······.”
“어? 너무 셌나? 아파?”
“아니, 아픈데······ 근데 괜찮아.”
아파서 오히려 좋다고 말하긴 좀 그래서 둘러댄 말. 오빠가 꽤 세게 몸을 눌러주는 손길을 만끽하며 이세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랜만에 받아서 그런지 더 좋고, 몸에 열이 화끈화끈 오른다. 벌써 몸에 걸친 옷가지가 모두 축축하다.
“하아······.”
찌릿한 감각. 그러나 조금은 아쉬움을 느끼며, 이세아는 희미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으음······ 오빠······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오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말해야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다.
“오빠도······ 혹시라도, 위험한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그래야 더 잘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마력 원리주의자들도, 팬텀도, 악마도. 어느 누구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뭐······ 있으면?”
뭔가 속 시원하지 않은 대답. 이세아는 더 확실한 답을 요구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내일은 놀러 갈까?”
“응······ 좋아.”
불안은 들뜬 마음에 가려졌다. 눈앞의 행복이 너무 달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