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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91화 (191/207)

#191화. Chapter 47. 오월동주 (1)

***

어마어마한 불공정계약을 맺었다.

1. 이세아 (이하 ‘갑’)은 이도진 (이하 ‘을’)에게 주 2회, 회당 최소 한 시간 이상의 가사 노동을 제공한다.

2. 을은 갑에게 주 2회, 회당 최소 삼십 분 이상의 안마권과 월 1회의 (나들이 혹은 여행을 겸한) 외식권을 서면으로 지급한다.

3. 가사 노동을 제공할 시간은 갑과 을이 협의해 결정한다.

4. 을은 갑의 가사 노동이 조금 서투르더라도 이해하며 넓은 마음으로 가르쳐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5. 갑이 소유한 안마권과 외식권은 을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은 한 자유롭게 발동할 수 있다.

6. 갑이 상기 외 추가적인 가사 노동을 제공하거나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을 또한 갑에게 추가적인 안마권 혹은 외식권을 지급해야 한다.

7. 추가적인 가사 노동을 할지 말지는 갑의 의지로 결정하며, 을은 갑이 가사 노동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할 때 거부할 수 없다.

8. 갑이 학업에 열중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그 평가는 전적으로 갑 본인의 판단에 따른다.

9. 추가 안마권과 외식권의 세부는 갑과 을이 협의해 결정하나 근로기준법에 의거, 최소 기본 조건 이상의 비율로 지급해야 한다.

10. 본 계약은 계약일부터 즉시 효력을 발휘하며 갑과 을이 동거하는 한 어느 일방의 의사로 파기할 수 없다.

“자, 서명해.”

노트를 대충 찢어서 자필로 작성한 계약서를 들이밀며 세아가 말했다. 본인은 이미 서명을 마쳤고, ‘이도진’이라고 적은 것도 보인다. 저기 서명하라는 말이지. 이 말도 안 되게 사악한 계약서에다가······.

“이거 쓴다고 방에서 안 나오고 있었어?”

안마받으면서 옷이랑 전신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서 씻고 온다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왔다. 피곤해서 침대에 누웠나 싶었는데 이런 걸 가져올 줄은 몰랐지.

하지만 세아가 태연하게, 아주 뻔뻔한 표정과 목소리로 답한다.

“양식 찾는다고 좀 걸렸어.”

뭔가 뿌듯해하는 기색도 보인다. 저 나름대로 법률적인 용어를 구사해 어엿한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게 자랑스러운 걸까. 나는 저항이라도 해보고자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서명 못 해. 안 해.”

“해.”

“저기요, 이세아 씨.”

“왜?”

“이거 조건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 그걸 왜 본인이 판단하냐고요, 네?”

합당한 의문 제기와 해명 요구.

슥슥, 펜으로 줄을 긋고 조항 하나만 고친 세아가 다시 종이를 들이밀었다.

“이제 됐지? 빨리 서명해.”

8. 갑이 학업에 열중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그 평가는 을이 주 1회 출제하는 쪽지 시험에 갑이 통과했는지로 판단한다.

“오······.”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오고 말았다. 쪽지 시험은 아이디어가 괜찮은데······. 마법역학만 빼고 봐주면 되니까.

아니, 아니지. 현혹되면 안 돼. 저 조건이 있다고 쳐도 지나치게 불합리한-

“여기.”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솔깃해한 걸 예리하게 알아챈 세아가 내 손에 펜을 쥐여 줬다.

“어, 어?”

심지어 자기 손으로 감싸곤 강제로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타의로 작성한 서명은 필체가 몹시 삐뚤빼뚤했고, 서명을 마친 세아가 계약서를 홱 빼앗아 갔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계약서 원래 나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오빠 나 못 믿어?”

“······됐다. 근데 안마권이랑 외식권? 그거 서면으로 지급한다는 건 뭐야?”

“이거.”

세아가 입고 있는 후드 집업 주머니에서 조그만 종이 두 장을 꺼낸다. 하나는 안마권, 다른 건 외식권이라고 적혀있다.

“방금 한 번 받았으니까 양심적으로 안마권 하나에다가 외식권 하나. 안마권은 내일 놀러 갔다 와서 쓸 거고, 외식권은 다음 주에 쓸 거니까 참고해주면 돼.”

“내일 놀러 가는 건 외식권 한 번으로 안 치나?”

“······동생한테 왜 그렇게 야박해?”

야박한 건 네가 억지로 쓰게 한 계약서고요······.

어쨌든 결론은 난 상황. 무표정하면서도 무척 흡족하단 눈치로 계약서를 확인한 세아가 짐짓 무언가를 고민하듯 중얼거린다.

“아니면 그냥 지금······.”

“씻고 와놓고 또 해달라고?”

안마권을 당장 쓰려는 것 같다. 그거 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또 땀 흘리고 또 씻고 귀찮잖아.

그러자 세아가 새침하게 되받는다.

“내 잘못 아니야.”

중독시킨 내 책임이라는데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반박할 생각도 안 든다.

“그럼 내일은 안 해준다?”

“내일 내가 밥하고 설거지도 할 거니까 괜찮아.”

“그게 그렇게 된다고······?”

“그렇게 돼.”

그리곤 소파로 척척 걸어가 엎드려 누우려 하던 그때.

“아, 세아야.”

“왜?”

“그러고 보니까 오빠 연구 때문에 뭐 좀 처리해야 할 게 있어서 지금은 안 되겠는데.”

“······갑자기? 진짜로?”

“그럼 진짜지. 계약서에 있지 않나? 을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하는 거.”

“······.”

아쉽고 미심쩍단 눈길로 나를 보던 세아가 겨우 수긍했다.

“알겠어. 내일 쓸게.”

뻔뻔한 거짓말로 세아를 자기 방에 보낸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창문 쪽에 통신 마법 홀로그램이 일렁이고, 그걸 통해 보이는 서연희가 내게 말한다.

[연락이 왔어.]

“벌써요? 눈치챈 건 아닐 건데.”

[응, 아직 답은 안 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저쪽에서도 용건이 있나 보던데?]

잠시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체화한 나는 그녀에게 답했다.

“답신은 제가 할게요. 최대한 저희 정해놓은 그대로 진행하는 거로 해서요.”

[그럴래? 알겠어.]

이 건은 이걸로 일단락. 한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서연희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

[여긴 언제 올 거야? 토끼랑 무슨 얘기 했는지도 자세히 듣고 싶고.]

“음······ 일단 내일은 안 될 것 같고, 다음 주 초쯤 어때요?”

본래는 내일 만나서 보고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세아와 선약이 잡혔고, 통신으로 말하긴 중요한 문제니 다음 주 시간을 내서 방문해야겠지. 서연희의 집에.

[궁금한 거 하나만 미리 물어봐도 돼?]

“뭔데요?”

[너 가면 벗었을 때, 토끼 걔 반응이 어땠는지.]

굉장히 흥미롭다는 어조. 나는 몇 시간 전 토끼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봤다. 내가 가면을 벗고 드러낸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그냥, 좀 많이 놀라더라고요.”

[좋은 의미로?]

“아마도요?”

[그래?]

자기가 못 봐서 아쉽다는 듯이 말한 서연희가 마지막으로 일렀다.

[알겠어. 너 수업 없을 때,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봐. 해빈이랑 세라도 그때 시간 되는지 물어볼게.]

“걔들도 같이요?”

[응, 걔들한테도 설명해야 하잖아. 같이 봐서 같이 상의하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좋지 않아?]

“그렇긴 한데요.”

그런 뜻으로만 부르려는 거 아닌 걸 아니까 이러지.

여하튼 통신을 마치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서연희가 말을 꺼내서 떠오른 것. 토끼 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평소엔 뭐 하고 지내?’

‘그냥······ 쉬면서 가끔 훈련해요.’

‘뭐 하면서 쉬는데?’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마력으로 몸 풀면서 휴식하고, 밖에는 잘 안 나가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고?’

‘······그런 거 없어요.’

‘아······ 음, 뭐, 그래.’

‘당신은 바쁘게 지내죠?’

‘나? 그냥저냥 연구하고, 수업하고, 주말에는 너처럼 집에서 쉴 때도 있고.’

‘약혼자······ 있었다고 들었는데.’

‘응. 그것도 알고-’

‘아니에요. ······실례했어요.’

그런 대화들이었다. 토끼가 어디 사는지, 가면 안 쓰고 있을 땐 어떤 모습으로 다니는지, 그런 것들은 모르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예 없단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는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챙겨줘야 할 연하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그녀와 대화하는 중에 계속 살폈던 ‘동쪽으로 흐르는 달’. 그것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킬 더 이블>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지니고 있을 토끼 가면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토끼 가면 본인에게도 신경이 쓰인다.

거의 모든 비밀을 공개하지 않은 그녀가 딱 하나, 작별 인사를 나누기 직전 나한테 알려준 정보를 포함해서.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악마, 장생종, 용. 그들처럼 지성을 지녔으나 인간이라 칭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했다.

무척 자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털어놓곤 자취를 감췄다.

“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상념을 흩어냈다. 중요한 할 일이 있으니 계속 토끼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의 불을 끄고, 흰 가면을 꺼내어 썼다.

위유우웅-

내게서 두 갈래 마력이 퍼져나간다. 그중 하나는 방에 스며들었다. 나와 내가 자리한 이 공간을 마력적으로 유리시키는 작업.

한마디로 말해, 물리적 수단이 아니라 마법을 통해서는 내가 서울에, 이 집에 있다는 걸 모르게 하는 장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스아아아······!

창문을 넘어 뻗어나간 마력이 하늘 저편으로 향하다가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됐다. 수천 킬로는 훌쩍 떨어진 장소. 태평양의 망망대해까지 도달할 터다.

그곳에 뒀으니까. 카일리 던과 조르디 문트를 죽이고 빼앗은, 윤의성에게 온 연락을 받게 해줄 마법을.

놈은 레스투르와 쿠엘라 양쪽 모두에 연락했다. 확인해보니 무척 단출한 전언. 한마디만 보냈을 뿐이다. 이걸 확인하자마자 답하라고.

나는 놈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답장했고, 십여 분이 지나 마침내······.

우웅, 우우웅-

희미하게 떨리는 마력이 직사각형의 홀로그램을 자아냈다. 그곳에서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곡예사’ 윤의성. 대균열을 일으킨 배신자이자 극단적인 마력 원리주의자. 나와 마주한 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넌 뭐야?]

“답장을 확인하지 않았나? 쿠엘라와 레스투르의 동의를 얻어 권한을 넘겨받았다. 나눌 이야기가 있다면 나와 하면 돼. 그들보다 내 쪽이 월등하게 나을 거다.”

[동의? 다 죽여버린 게 아니고?]

“죽음도 동의를 얻는 하나의 방법이지.”

[하, 나 참. 이거 순 미친 새끼 아니야?]

황당하다는 듯한 대답. 그러나 윤의성은 통신을 끊을 수 없다. 먼저 연락한 시점부터 이미 내게 주도권을 뺏긴 거다. 영웅이자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의 수장이 사적으로 테러조직 두 곳에 접근했으니까.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 레스투르와 쿠엘라에 요구하려 했을 내용을 내게 말하는 게 놈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온 세상에 떠벌리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보단 그게 백번 낫겠지.

그리고 윤의성이 물었다.

[얼추 짐작은 가는데······ 그래서, 네 신원이 정확하게 뭐지? 자기소개나 해봐라.]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민망하지만······.

나는 세간에서 칭하는 내 이명을 밝혔다.

“팬텀의 ‘영웅 살해자’라고 하면, 당신도 알겠지?”

***

10월 27일, 수요일 저녁.

수업을 마친 유해빈은 힘차게 다짐을 되뇌었다.

‘이건 기회야. 유엘 비안느, 넌 할 수 있어. 도진쿤이랑 보스랑 여우한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 침착하게 하면 돼.’

오늘 방과 후, 전쟁 같은 자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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