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Chapter 47. 오월동주 (2)
바로 서연희의 저택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긴장되는 일인데 심지어 그녀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다. 이도진과 한세라도 오기로 했다.
유해빈이 알기로 한세라와 이도진과 서연희 셋이 모이는 건 여름방학의 사건 이후 무려 두 달 만이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지.’
도진 바다의 유일한 항해자가 되고 싶은 둘의 싸움. 거기 휘말려 등이 터질 안타까운 새우는 유해빈 자신이겠지. 하지만······.
‘난 새우가 아니라 용이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서연희와 한세라 둘 다 서로만 경쟁 상대로 의식하니 그 틈을 노리면 된다. 마침내 그들도 깨닫겠지. 어리고 귀여운 용용이가 그리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만약에 가서 막 쭈뼛대고 쫄면 앞으로 내 이름 유해빈이 아니라 새우빈이야.’
개명할 생각이 일절 없는 그녀는 집에 돌아와 교복을 벗었다.
오늘 패션 콘셉트는 과하지 않고 적당히 힙한 느낌에 시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블랙. 그동안 제법 많이 길어 끝을 묶고 다니는 머리는 풀어서 산뜻하게 정리했다. 사놓고 거의 쓰지 않은 향수도 뿌리니 그야말로 완벽. 영락없이 놀러 나간다고 꾸민 여자 고등학생이다.
‘이만하면 괜찮지?’
일전에 확인한 자랑스러운 본모습만은 못해도 현재 가능한 최선. 자기가 전교에서 옷을 제일 잘 입는 줄 아는 진유리보단 확연히 낫다고 자평할 수 있고, 여러 각도로 거울을 보며 흡족해한 그녀는 신발을 신고 기다렸다. 그리고······.
위유우웅-
허공에 일렁인 마력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을 느낀 직후.
“아······.”
“안녕?”
“해빈이 어서 와.”
구체적으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작정하고 꾸몄는지 평소보다 훨씬 예쁜 한세라와, 딱히 꾸민 것 같지도 않고 간소한 원피스 차림이지만 실로 아득한 미모인 본래 모습의 서연희를 보며, 유해빈은 얼떨떨하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맞아, 그랬지······.’
서연희와 한세라가 유해빈 자신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 그만큼 예쁘니까. 서로 저만큼 예쁘니까. 어린애 한 명쯤은 의식할 이유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는 거다. 그래도 우열을 가려본다면······.
‘보스가 낫나?’
사실 객관적인 외모만 보면 큰 차이는 못 느끼겠다. 한세라도 충분히 최고점에 이르러 있으니까. 본모습이라면 키도 그녀가 좀 더 크고 피지컬로는 밀릴 게 없다.
하지만 뭔가, 그냥 딱 봤을 때, 자신에게 정말 잘 어울리게 꾸민 한세라보다도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서연희가 살짝 낫다.
‘분위기 이런 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 한세라가 그저 예쁘기만 한 사람도 아니고 세련된 분위기가 아주 빼어난데도 서연희와 비교하니 아직은 덜 완성됐다는 느낌이다. 둘 다 가련한 용용이에겐 지나치게 막강한 적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그즈음 한세라가 친절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해빈이는 전에 봤다고 들었는데.”
눈짓으로 서연희를 가리키며 한 말. 분명 상냥한 말투와 표정인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닌 듯하다. 그럴 의도는 없겠지만 추궁을 들은 것처럼 위축된 유해빈을 대신해 서연희가 답했다.
“응, 도진이 집에서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나저나 세라 넌 아까부터 놀라는 티를 전혀 안 내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요? 변장한 모습일 줄은 예전부터 알았고요.”
“그래? 반응 기대했는데 아쉽네.”
‘무서워······.’라고 유해빈은 생각했다.
‘내가 너보다 별로일 줄 알았니? 어딜 덤벼.’라는 말을 태연하게 건네는 서연희도.
심가의 사건이 있기 전부터 유해빈 자신이 여자라는 걸 눈치챘다고 하며, 오늘 처음 서연희의 본모습을 봤는데도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난 잘 모르겠는데?’라고 응수하는 한세라도.
어리고 가엾은 용용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날카롭고 험악한 공방. 그녀는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근데 교수님은요?”
유해빈은 마음속으로만 초조하게 되뇌었다.
‘도진쿤, 빨리 와요······!’
이 무섭고 거북한 분위기를 그나마 가라앉히려면 그가 어서 와야 한다. 하지만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도진이 이삼십 분은 더 있어야 올걸?”
“왜요······?”
“내가 그때 시간 맞춰서 오라고 했거든. 우리 셋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먼저 차나 한잔 마시고 있으려고.”
“아, 네······. 그렇게 깊고도 원대하신 뜻이······.”
이도진이 오기 전에 교통정리를 끝내겠다는 의미겠지. 물론 실의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건 그녀 혼자뿐이고, 한세라는 차분한 어조로 서연희의 말에 동의했다.
“괜찮네요. 차 종류는요?”
“저기 우려뒀는데 마시고 싶은 거 골라. 네가 마셔본 건 어지간하면 다 있을걸?”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무슨 의미로?”
“좀 많이 오래 사셨으니까요?”
한마디씩 주고받는 대화. 더 버티기 어려웠던 유해빈이 헛기침하며 나섰다.
“으흠, 저희 조직의 신입이자 제일 어린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요······.”
“어머, 그럴래?”
“고마워.”
“아뇨, 별말씀을요······.”
그냥 당신들 옆에 끼어있기 싫은 거라고, 대놓고 할 수 없는 말을 내심 되뇐 유해빈은 몸을 으슬으슬 떨며 부엌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가져온 차를 마셔 보니 향과 맛이 대단히 훌륭했다. 고풍스러운 저택 내부도 박물관에라도 온 것처럼 인상 깊다. 그것까지만 좋고 나머진 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힘이 빠지는 게 문제고.
칼날 같은 대화가 조용하게 흐른다.
“요즘 어떠니?”
“도진이한테 듣지 않으셨어요?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글쎄? 도진이랑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데. 걔랑 나랑 네 이야기 할 이유가 없잖아?”
서연희 가볍게 1승.
“그러고 보니 당신이랑 어릴 때부터 알았는데 여기 오는 건 처음이네요. 저 태어나고는 저희 엄마랑 그렇게 왕래가 없었잖아요?”
“응, 자주 보는 건 아니었지. 싫어서 피한 건 아니고.”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봐.”
“평소에 도진이랑 얘기할 때 저희 엄마랑 도진이 어머니 존칭 쓰나 해서요. 그분들한테도 그렇고, 저랑 도진이한테는 엄밀히 따지면 이모뻘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도 차후에 신분을 바꿀까 생각 중이야. 이 모습으로 꽤 오래 있었고, 나이 같은 건 나한테 의미 없거든.”
“그래요? 저희한테는 의미가 있는데.”
잘 받아 치려고 했으나 한세라의 여유로운 1승.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니?”
“네, 그건 왜 묻죠?”
“갈수록 우리 할 일이 어려워질 텐데, 네가 감당할 수 있으려나 걱정돼서. 버겁다 싶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돼. 훈련을 시켜주든 역할을 줄여주든 조치해줄 테니까.”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도진이랑 상의할 문제네요. 걔랑 제가 직접적인 당사자잖아요? 짐이 될 생각도 없고.”
얼추 무승부.
그 후로도 이십여 분 동안 말로 찌르고 말로 막는 싸움이 펼쳐졌다.
‘이게 되네······.’
유해빈은 지금껏 미처 알지 못했다.
오직 교양 있고 정제된 단어만 구사해서, 사람은 타인에게 이만큼 날카로운 공격을 날릴 수 있는 거다.
차라리 대놓고 욕하거나 주먹을 뻗어 무력을 겨루는 것보다도 더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거다.
균열 너머와 이쪽 세상, 양쪽을 통틀어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을 본 적이 없는 두 미인이 몹시 우아하고 차분하게 서로를 찌르고 할퀴는 걸 보며, 용족의 공주 유엘 비안느는 자신이 참전하고자 하는 싸움의 진정한 레벨을 실감했다. 그리고 다시금 간절하게 되뇌었다.
‘도진쿤 제발······.’
여기서 더 듣고 있다가는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까 제발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
바로 그때.
스아아아아-!
허공의 공간이 마력으로 일렁였다. 그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도진이, 적잖이 놀란 눈치로 세 사람에게 말했다.
“다들 와 있었네?”
의아해하는 기색.
자기도 약속 시각에 맞춰서 온 건데 왜 벌써 셋이 한참 전에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있는 건지 미심쩍다는 얼굴. 자신이 없는 동안에 무슨 난리가 난 건지 파악하려는 눈치.
그리고 유해빈은 깜짝, 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왔어?”
“밖에 쌀쌀하잖아. 세라랑 해빈이 왔길래 차 마시고 있으라고 했지.”
한세라와 서연희가 맑게 웃으며 이도진을 반긴다. 방금까지 그토록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아놓고선,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쾌활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반갑게.
“아, 그래요?”
그리고 유해빈은 이것도 깨달았다.
‘도진쿤 알고 있어.’
서연희와 한세라가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했으나 이도진을 속이진 못했다. 그는 틀림없이 깨달았으리라.
왜 자기만 늦게 온 건지.
그동안 둘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이도진 자신이 오는 시점부터 휴전하자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까지도 안 거다.
그리고, 그걸 다 알고,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 거다.
자기가 개입한다고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닫고서.
‘짝, 짝, 짝······.’
유해빈은 말없이 박수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소파에 앉는 이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진쿤도 나름대로 고생이 많구나······.’
여태까진 몰랐다. 서연희와 한세라. 저 둘 사이에서 때로는 모른 척하고, 때로는 조율도 하고, 지극히 어려운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거다.
돌이켜보면 서연희와 함께 있을 때, 한세라와 있을 때, 유해빈 자신과 같이 있을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서연희와 있을 땐 여왕과 그녀를 모시는 기사 같은 분위기. 한세라와 있을 땐 서로 대등하게 함께 나아가는 동료이자 친구 느낌. 유해빈 자신과 있을 때는······.
‘주인님이랑 철이 덜 든 시종······?’
그것도 되게 잘 쳐준 거라고 침울하게 자평한 유해빈은 이도진에게 물었다.
“저기요, 교수님.”
“왜?”
“혹시 있잖아요······. 새우는 어떻게 울어요?”
인간은 응애.
용용이는 용용.
그렇다면 등이 터지는 안타까운 새우는 어떤 울음소리를 낼까.
“새우?”
이 말의 의미까지는 깨닫지 못한 똑똑한 빡대가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이건 또 어떻게 눈치챈 건지 한세라와 서연희는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에 담긴 의미는 설명 듣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안다고요······.’
쓸데없이 일러바치면 너한테 좋을 게 없을 거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눈빛. 유해빈은 당연히 이도진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절대로 저 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프라이버시니까.
***
“저희가 대처할 수 있는 만큼, 규모를 최대한 키울까 해요.”
그간 있었던 일과 정보를 차례로 교환하고 내가 말했다.
계획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언해주던 서연희와 세부적인 요소를 점검해주던 세라가 묻는다.
“어떤 식으로?”
“난 서두르는 것보단 천천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두 사람 다 우려하는 목소리다. 대균열과 윤의성. 그것만 해도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상당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힘주어 일렀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엮을 수 있는 놈들은 모조리 엮어낼 거야.”
무모하게 덤비는 게 아니다.
<킬 더 이블> 4권의 퀘스트, 며칠 전 대화로 파악한 윤의성의 심리 상태, 그 외 모든 요소를 고려해도 자신이 있고, 나는 확고하게 선언했다.
“일이 잘 안 풀려도 최소한 하나. 잘 되면 둘이나 셋, 혹은 그 이상.”
이번 사건을 통해 노리는 목표.
조만간 가져갈 배신자들의 목숨 숫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