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Chapter 47. 오월동주 (3)
염의준, 안드레이 일린, 아르노 뒤레.
내가 죽였거나, 죽인 것과 다름없거나, 처리를 보류한 셋.
윤의성, 에블린 그레이스.
이름을 알되 죽이지는 못한 둘. 대균열을 일으킨 동기, 내 부모님을 직접적으로 노렸는지, 균열 너머의 마왕들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 그런 건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은 셋. 확인된 배신자가 총 여덟 놈이니 셋이 더 있다.
북미와 중남미에서 하나.
중국과 일본에서 하나.
그 외의 나라에서 하나.
그자들은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번 기회에 한 놈은 끌고 나오려고요. 보니까 윤의성도 저 혼자 하수인 노릇 하긴 싫은 것 같고.”
놈이 내게 요구한 것, 본래 레스투르와 쿠엘라에 시키려 했던 일은 복잡한 게 아니다.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내세울 흉수.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면 테러하는 시늉만 해달라. 그러면 염의준과 심정웅을 죽인 걸 불문에 부칠 거고, 대놓고 줄 순 없으나 상당한 이득도 있을 거라고.
목 뒤로 찰랑이는 머리칼을 자꾸 매만지며 이야기를 듣던 유해빈이 물었다.
“근데 교수님 진짜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것까지만 듣고 어떻게 ‘후후, 네놈 속셈을 훤히 알겠군. 대균열을 일으키려는 거지? 진정한 배후는 에블린 그레이스일 테고. 크흐흐, 으하하핫!’ 이 추측이 바로 나오냐고요.”
“······.”
나는 말없이 유해빈을 쳐다봤다. 짐짓 흑막 같은 표정에다 의미심장한 손짓까지 동원해 열연을 펼쳐놓고선 내 시선에 민망해하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꼰다.
“어······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 표정에 목소리, 말투랑 제스처, 그거 다 뭐야.”
“아······ 그게, 교수님 가면 쓰고 계실 때는 되게 나쁜 사람 같고······ 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그때 서연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며 놀리듯이 말한다.
“왜? 은근히 비슷한데.”
“제가 언제 저렇게 말했어요, 언제.”
“지금은 아니고, 몇 년 전에 아직 나쁜 사람 흉내 어설펐을 때? 그때랑은 좀 비슷하지 않아?”
“오······ 교수님 예전에는 어떠셨는데요?”
궁지에 몰렸던 유해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고, 서연희가 입을 뗀다. 나는 반박하길 포기하고 세라에게 물었다.
“설마 믿는 건 아니지?”
“글쎄? 난 최근 이 년밖에 모르니까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아니,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저 말을 믿냐고요.”
“모르지? 직접 본 증인도 있고, 원래 본인은 본인 언행이 어떤지 잘 모르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은 정도? 아닐 수도 있고.”
피식 웃으며 세라가 답을 피했다. 서연희는 장난기가 한껏 어린 어조로 내 과거 행적을 유해빈에게 일러주는 중이다. 들어보니 사실관계는 얼추 맞는데······ 나 그런 식으로 말 안 했잖아요. 일부러 분위기 잡은 거 아니라고.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꿀꺽꿀꺽 들이켠 나는 화제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하던 얘기 계속할게요. 아무튼 윤의성한테 시시콜콜 말은 안 했고, 자기도 썩 내키지 않는 게 있는지 묘하게 협조적이었어요.”
당시 대화에서 에블린 그레이스는 언급되지 않았다. 내가 먼저 그녀를 거론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고, 윤의성도 불만이 있어 보이긴 하나 그 정도 분별은 했다.
내가 던진 미끼는 비교적 리스크가 적으면서도 놈이 솔깃할 만한 것. 최근에 끌어들인, 마력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세 조직의 이름이었다. 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윤의성은 내 의도대로, 그걸로 추측해냈고.
“대놓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력에 관심 있냐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균열을 통해 마력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그 말에 윤의성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기라더니, 이러던걸요.”
“어······ 교수님, 저 질문 하나 있는데 해도 되나요?”
“뭔데?”
내가 허락하자 유해빈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으, 살짝, 쪼오금 위험한 거 아니었나 해서요. 의심 살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의미에서?”
“순서대로 이어지는데 크게는 세 가지 정도요.”
“대균열에다 윤의성 본인, 거기서 내 정체까지?”
“네.”
이런 뜻이다. 내가 대균열의 진상을 일부 알고, 윤의성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고, 그 모든 진실에 도달할 수 있던 건 부모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이도진이기 때문이라고, 놈이 그걸 의심할 수 있지 않냐는 말.
“그냥 보면 당연히 모를 것 같은데 교수님이 균열이랑 마력 얘기도 하셨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잘 찍어 맞추면 앞뒤가 착착 맞네? 이런 생각 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이게 제가 교수님 못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걱정돼서······ 응? 보스랑 여우 선배, 저 왜 그렇게 보세요?”
“기특해서?”
서연희가 상냥한 어조로 답했고, 유해빈의 우려를 거두어준 건 세라였다.
“그것까진 알고 싶어도 모를걸?”
“어째서요?”
“왜냐면, 도진이가 에블린 그레이스 얘기는 전혀 안 했다잖아.”
그러니 내 정체까지 이를 순 없다. 이번에 일으킬 대균열을 주도적으로 제안한 게 그놈이 아니니까.
팬텀과 에블린 그레이스가 전부터 연줄이 있었던 것만 아니라면, 그녀가 지시를 내릴 때 마침 나와 팬텀이 균열에 접근한 건 우연의 일치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내가 생명력 이론을 주창해 파장을 일으킨 것 또한 하나의 안전장치로 작용하고.
얼추 이해한 눈치인 유해빈에게 나는 다시금 확언해줬다.
“윤의성은 이렇게 생각할걸? 어이구······ 이젠 하다못해 시답잖은 범죄자들까지 균열이랑 마력에 눈독 들이네. 이거 증말 말세다, 말세야. 이 정도?”
“저기, 도진아.”
“네?”
“방금 그거 혹시 윤의성 흉내야?”
“알아보시네요. 어때요?”
“어······ 응?”
“비슷했냐고요.”
“으음, 그게······.”
차마 대답 못 하겠다는 듯이 말을 흐린 서연희에 이어 세라가 정곡을 찔렀다.
“너 성대모사는 소질 없어.”
“그래······?”
거의 똑같지 않았나? 내가 약간 낙담하고 있는데 유해빈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아까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요. 교수님은 윤의성 목적이 대균열, 시킨 사람은 에블린 그레이스, 이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건 내 노하우라 비밀인데.”
대균열이 발생할 건 <킬 더 이블> 4권의 고유 퀘스트를 통해서 알았다.
배후가 에블린 그레이스라는 건 내가 십 년 동안 모아온 정보에, 올해 두 번째로 얻은 객관식 질문을 취합해서.
그것까지 다 설명할 순 없으니 말을 아껴야겠지.
“어쨌든 윤의성이 어느 정도 언질을 줬고, 주말에 만나면 더 확실해질 거예요.”
혼자서 올 것인지.
아니면 에블린 그레이스에게 지시받은 배신자를 더 데리고 올 건지.
“저는 후자일 확률이 7할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은 누구 데려가실 건데요?”
“토끼 대기시켜놓긴 할 건데 일단 그 자리에 가는 건 나만.”
무작정 싸우려고 가는 게 아니고, 윤의성만이 아니라 한두 명 더 오더라도 놈들이 나를 공격할 확률은 희박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도주에 성공해버리면 뒷감당이 안 되니까.
“음······ 으음······.”
유해빈이 눈가를 좁히며 작게 침음을 낸다. 못내 걱정스럽다는 눈치에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타일렀다.
“괜찮아. 도진이 이런 건 철저하거든. 애가 정이 많아서 가끔 맺고 끊는 걸 못 하긴 해도.”
그 말에 세라가 즉답했다.
“그렇긴 해요. 워낙 착하니까 그거 믿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고.”
“어머, 세라 네가 보기에도 그러니? 나도 되게 뻔뻔하고 염치없는 애 한 명 아는데.”
“그래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애’라고는 못하는데. 저희 또래 아니라서.”
“누구?”
“있어요.”
일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세라와 서연희가 태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한다. 그리고 내게 느껴지는 시선.
“······.”
유해빈이었다.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듯한 눈빛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당신 책임이니까 빨리 수습해달라는 간청. 근데······ 내가 조율은 하고 있었다고. 급발진하는 건 어떻게 말릴 겨를이 없고.
진짜 갑자기 왜 이래. 방금까지 둘이 사이좋게 나 놀리면서 화기애애했잖아. 일부러 윤의성 말투까지 따라 했는데 왜 그러냐고.
내가 오기 전에 둘이 격돌한 건 알았다. 그야 서연희가 본래 외견에 세라가 먼저 와 있었으니까. 나 도착하고부터 날 선 말이 없었으니 여기까지만 하자고 미리 약속한 건가 싶었고, 그러면 분란 일으킬 것 없이 가만히 있자고 생각했는데······ 이게 또 이렇게 된다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연희가 담배를 하나 꺼내면서 유해빈에게 양해를 구했다.
“해빈이한테 연기는 안 갈 건데 피워도 괜찮아?”
“아, 네······. 당연하죠. 보스 집이시고, 보스 원하시는 대로 하셔야죠······.”
“고마워. 도진이는 안 피워?”
“제 거 필게요.”
상황이 이러니까 한 대 피우고 싶긴 하네. 나도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고, 그러자 세라가 말한다.
“나도 줄래?”
“어······ 여우 선배도요?”
“응, 도진이 피울 때는 피우거든.”
친절하게 답한 세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유해빈에게 물었다.
“근데 해빈아.”
“네······?”
“너랑 나랑 그래도 몇 달 알았는데, 왜 계속 여우 선배라고만 부르나 해서. 언니라고 해주면 좋은데.”
은근한 압박이다. 서연희한테만 살갑게 굴지 말고 나랑도 친하게 지내자고. 유해빈이 어깨를 흠칫하며 답한다.
“아, 그으, 제가 누구 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럼 나중에 편해지면 나 제일 먼저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다. 우리 앞으로도 자주 봐야 하잖아?”
생긋 웃으며 강요하는 으름장.
그러자 서연희까지 요구한다.
“그러고 보니까 해빈이 나한테 보스라고 하는데, 난 호칭 편하게 해도 되지 않아?”
“어떻게요······?”
아니, 묻지 마. 물어볼 필요 없어. 애초에 언니 말고는 선택권 없다고.
그거 외에 다른 호칭은 아예 생각도 안 하면 좋겠는데······ 세라가 기어이 말한다.
“해빈이 곤란하겠는데요?”
“어째서?”
“제가 이유를 말하면 당신이 곤란할 것 같고요.”
“그래? 해빈이한테 물어볼까?”
“저한테 뭘요······?”
뭐긴 뭐야. 이럴 때는 둘이 또 손발이 척척 맞았다.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를 묻는 것처럼 서연희와 세라가 묻는다.
“한 명만 언니라고 부른다고 치면.”
“나랑 세라 중에 누구?”
“어······ 어······.”
유해빈은 난처함을 넘어서 숫제 울기 직전인 표정이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창백하다가 점차 새빨개진다.
좀 민망하긴 해도 나는 이쯤에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처신이 문제가 아니라 유해빈을 위해서. 저건 선 넘었지. 압박을 주려면 나한테 줄 것이지 왜 죄 없는 애를 괴롭혀.
바로 그때.
나와 서연희와 세라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유해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완전히 피가 몰린 얼굴색이 몹시 빨갛다. 그리곤 소리 높여 따지듯 외친다.
“왜, 왜 나한테 그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무도 언니라고 안 불러! 보스랑 여우 선배, 지금 나, 나 무시하는 거예요!?”
아니, 무시한 건 아니지. 오히려 유해빈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서 영입 시도를 한 거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으려나. 내가 보기에는 그런데······.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어째 세라와 서연희는 반성하는 눈치였다. 유해빈에게 미안해하고, 사과하려고 한다. 정말로 중재해야겠다 싶어 내가 말했다.
“해빈아, 그게 아니고-”
“으아아아! 모르면 가만히 있어요! 이 똑똑한 빡대가리!”
“어?”
똑똑한······ 빡, 뭐?
내 말에 더욱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한 유해빈이 서연희와 세라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나 무시하는 거 맞잖아요! 쟤는 뭐, 견제할 필요도 없다, 급이 안 맞다, 적당히 내 부하로 써먹자, 이거 맞잖아!”
견제? 급이 안 맞아?
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급속도로 맞춰진다. 유해빈이 방금 한 말, 서연희와 세라의 대답, 여태까지 유해빈과 내가 나눈 대화, 나를 대하는 행동, 그 모든 것들이······.
그리고 내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성을 잃은 유해빈이 힘껏 외쳤다.
“내가······ 내가 우스워 보여요!? 나도 교수님 좋아한다고!”
어······ 어?
나와 서연희와 세라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고 유해빈을 바라봤다. 나만 원망스럽게 노려본 유해빈이 새된 목소리로 비난한다.
“이거 봐, 전혀 몰랐지······. 내가 본명까지 알려줬는데······. 착하고, 잘생기고, 멋있고, 싸움 잘하고, 똑똑하면 뭐 해. 눈치가 해츨링 모이만큼도 없는데······. 뭘 멀뚱히 보고 있어요! 이 착한 쓰레기! 똑똑한 빡대가리-!!!”
그러곤 곧바로 거실을 빠져나가 현관을 향해 내달린다. 저택 밖으로 나서려는 모양. 아니, 너 그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퍼억!
“쿠악!”
외마디 비명을 외친 유해빈이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니까, 그쪽으로 가도 못 나간다고······.
현재 이 저택과 바깥은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 오늘 여기서 작전 회의를 해야 하니까.
나는 서연희를 보며 눈으로만 물었다.
<말 안 해줬어요?>
<이럴 줄은 몰랐지······.>
하긴 공간이동으로 왔고 공간이동으로 귀가할 건데 현관으로 나갈 일이 뭐가 있겠어.
심호흡한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유해빈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내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려니 유해빈도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상체만 일으키고, 슬쩍 발을 뻗어서 투명한 벽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아······.”
이제야 이성이 돌아온 표정.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했다. 이 집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안색이 새파랗다.
나도 당황스럽지. 고백을 안 받아본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처음이니까. 들은 나보다 말한 얘가 훨씬 곤란할 거고.
그리고 내가 ‘해빈아’라고 이름부터 부르려던 그 순간.
“억······ 어억······!”
짤막한 소리를 내며 애가 다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기절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
나는 깨우려 하지 않고 그저 유해빈을 품에 안아 들었다. 부드러운 향기가 내게 훅 끼친다. 별생각 없었는데 얘 오늘 향수도 뿌리고, 옷도 예쁘게 입었고, 머리칼도 평소에 묶고 다니는 거 풀어서 꾸미고, 그랬네······.
<해빈이 괜찮아?>
<기절한 거야?>
본인들도 난처해하며 세라와 서연희가 눈빛으로만 묻는다. 나도 마주 눈빛으로만 힘주어 일렀다.
<그냥 둬요.>
진짜로 기절했든.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쩔 줄 몰라서 기절한 척하고, 심장이 쿵쿵 뛰고, 몸이 자꾸 떨리는 거든.
그게 중요하겠냐고.
지금은 그냥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내 이름은 유해빈.
본명은 유엘 비안느. 균열 너머 세상에서 태어난 용이다.
용의 언어로 ‘짓’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간으로 치면 생식 기관을 속어로 이르는 단어인데, 쓰이는 용법도 상당히 흡사한 면이 있다.
아주 큰 일이 났을 때 용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짓됐다’라고.
그리고 이 순간, 나는 그 표현을 너무나도 절박하게 쓰고 싶다.
아무래도 짓된 거 같다.
내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나는 짓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