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Chapter 47. 오월동주 (4)
지금까지 되게 많이 생각해봤다. 언젠가 교수님한테 내 마음을 고백할 때 어떻게 말할까, 어떤 상황일까, 우리 착하고 멋진 빡대가리가 어떻게 반응할까.
근거는 없지만 막연하게,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일이 년 지나서 나 스무 살 넘고, 여차여차하다 팬텀이 위기에 몰리고, 그때 내가 폴리모프 풀고 힘을 개방해서 활약하고, 얼굴과 피지컬과 어른스러운 분위기까지 모두 갖춘 아름다운 본래 모습으로 눈물 한 방울 떨구면서, 그런데도 웃는 표정으로 마음을 전하는 거다. ‘좋아해요’라고.
그리고 나는 안타깝게도 고백한 직후에 생사불명이 되고, 내가 희생한 덕분에 목숨을 구한 도진쿤은 펑펑 울면서 나를 그리워하고, 근데 알고 보니까 기적적으로 내가 살아 있어서, 나중에 다시 등장해서 또 도진쿤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이제 감동적인 재회에 이은 격정적인 키스. ······뭐 그런 거.
이 정도면 여우 선배가 장장 이 년이나 기 모아서 터뜨린 고백보다도 임팩트가 크지. 솔직히 그 사람 마음에 안 들고 부담스럽긴 해도 내가 보고 배운 게 있다. 전략적으로 아주 훌륭했고, 타이밍도 좋았다.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진쿤의 생명도 구해줄 거고.
물론 다칠 일 없는 게 최고긴 하다. 혹시 위험에 처한다면, 하는 이야기지.
아무튼 자주 상상해봤다. 절대 음습한 망상이 아니라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고, 이것저것 상상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마음이 두둥실 뜨고, 몸에 열이 뜨겁게 올라서 막 꼼지락대고, 괜히 창피해서 이불 발로 차고, 잘 때 꿈도 꾸고, 날이 갈수록 상상이 구체화하고,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아, 이건 살짝 빠른가? 아니야, 기회 왔을 때 치고 나가야 해, 그러면서 다가올 미래를 기다려왔는데······.
근데 망했다.
진짜 쫄딱 망해버렸다.
여우 선배랑 보스 있는데, 그 둘 보는 데서, 정신 나가서 울분을 토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고 도진쿤한테 고백했다.
맞다, 대놓고 욕도 했지? 착한 쓰레기가 어쩌고 똑똑한 빡대가리가 어쩌고······.
아니, 근데······ 여우 선배랑 보스가 너무했잖아. 다 아는 사람들이 나 그렇게 몰아세우면서 자기 편에 줄 서라고 말하는 게, 난 상대도 안 된다고 무시하고, 우습게 보고,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나 관중 아닌데. 나도 운동화 신고 경기장 입장한 출전 선수인데······.
그것도 화가 나고, 근데 또 멍청한 이도진은 그거 모르고 나만 말리려고 하길래, 그래서 너무 열받아서 말이 나와버렸다. ······한순간에 망해버린 거다.
난 왜 맨날 이렇지······?
본명 알려주는 것도 여우 선배가 정체 공개했을 때처럼 중요한 순간에 말할 수 있었는데, 그래야지 생각했는데, 어정쩡하게 임팩트 하나도 없이 충동적으로 말해버리고.
고백은 그거보다 더 심하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안 오게······ 생각하기 싫다······.
소리가 들릴까 봐 한숨도 못 쉬고 입만 우물거리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봤다. 엄청 넓은 방이고 푹신한 침대에 나 혼자 누워있다. 아까 기절한 척하니까 도진쿤이 나를 안아 들고 이 방으로 데려왔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그만 정말로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다들 거실에 있는지 조용하다.
여기 보스 침실인가? 방 하나가 내가 사는 집보다 훨씬 넓고 좋지만 그런 건 눈에도 안 들어온다.
계속 기절한 척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가야 하는데······ 진짜 나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벽 쪽으로 다가가 귀를 대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도진쿤이랑 보스랑 여우 선배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내 얘기는 아닌 것 같고 토끼 가면 얘기인가?
<······인간, 다른->
<당신이랑- ······들어본->
<너까지 알면······.>
대화가 잘 안 들린다. 마력까지 쓰면 들릴 테지만 그러면 들킬 거고.
그래도 대충 들어보니 그거 같다. 저번에 도진쿤이랑 토끼 가면 둘이 남아서 한 얘기. 보스한테 알려줘야 하는데 여우 선배가 자리 피해줄 생각 안 하고 같이 듣는 건가?
하여튼 얄미운 사람이다. 어른스러운 척, 여유로운 척, 세련되고 우아한 척하면서 은근히 빈틈 노리고, 손에 들어온 기회 절대로 안 놓치는 이 불여우. ······진짜 부럽다.
나도 한세라처럼 살고 싶다······.
행동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엄청 뻔뻔한데, 태도가 워낙 당당해서 막상 옆에서 볼 땐 전혀 그런 생각 안 들게, 나도 저렇게-
“앗······!”
별안간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뻔뻔함과 당당함. 맞아, 그러면 돼.
“후우······.”
숨을 크게 쉬며 호흡을 정돈한 나는, 그러나 여전히 세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방 밖으로 나섰다.
“응?”
보스가 낸 소리. 다른 두 사람도 시선을 돌려 나를 본다. 셋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는 호박색 액체가 들어있는 술병이 놓여 있고, 안주 겸 저녁 식사인지 음식도 보인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뻔뻔하게, 당당하게,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어······ 뭐예요?”
셋 다 침묵.
아주 옅게, 보스와 여우 선배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인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나는 재차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눈 뜨니까 방에 있던데······ 저 잠 들었어요? 뭐지?”
이러면 되지. 수습이 안 되면 모른 척하면 되잖아. 충격이 너무 커서 아예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그때 여우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쉰다.
도진쿤은 당황한 표정. 괜찮아, 당신은 가만히만 있으면 돼요. 그러면······.
“아, 너 피곤했는지 소파에서 잠들었길래. 푹 쉬라고 방에 옮겨준 거야. 우리 하던 이야기 어디까지 기억나?”
역시 보스가 나설 줄 알았다. 자기한테 맡기라는 듯이 눈을 찡긋하기까지.
그야 기억 안 난다는 거 도진쿤이랑 여우 선배가 믿진 않겠지만, 내가 딱 잡아떼면 자기들이 뭐 어쩔 건데.
그런다고 ‘너 나 좋다고 고백했는데, 너 도진이한테 고백했는데, 얼레리꼴레리~’ 이럴 건 아니잖아.
잠이 덜 깬 것처럼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은 나는 보스에게 답했다.
“교수님 주말에 혼자 가실 건데, 혹시 몰라서 토끼 선배 대기시켜놓는다고 하신 거까지는 기억나는데요······.”
“그래? 그다음에 특별한 얘기는 안 했어. 그치?”
“······그랬죠.”
“······.”
짤막하게 답하는 여우 선배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도진쿤. 둘 다 ‘이게 맞나? 이렇게 넘어가도 되는 건가?’ 고민하는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의구심이 든다. 한세라처럼 당당하게 뻔뻔하게 행동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렇게 한 거 맞나?
애초에 저 사람은 이런 상황도 안 만들었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깨달았다.
또 망했다.
이거 아니야.
이런 건 한세라 방식 아니라고······.
때늦은 후회가 마음에 밀려왔으나 벌써 보스가 상황을 거의 다 수습했다.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과 식기가 놓였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저녁만 먹었다. ······맛있긴 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오늘 수고했고.”
오후 열 시를 넘긴 시각.
도진쿤이 나한테 건네는 말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다. 다른 뜻 아니고 회의하느라 수고했다는 말일 텐데, 뭔가 피해의식? 자격지심? 그래서인지 좀 미묘하게 들린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내가 제대로 파악한 건지도 몰라. 물론 고백 안 들은 것처럼 평소랑 똑같이 대해주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앞으로 얘 어떻게 하지? 어떻게 선 긋지?’ 이런 생각 할 수도 있잖아.
담배 피우지도 않을 거면서 도진쿤 집 가기 전에 마지막 한 대 피우는데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얄미운 불여우도 내게 웃으며 말한다.
“해빈이 다음에 또 봐.”
“네······.”
위유웅, 위유우웅.
여우 선배와 도진쿤이 각각 공간이동으로 돌아간 다음, 나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느끼며 보스에게 인사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한데 그때.
“나 세라도 싫어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데······.”
내가 공간을 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스가 상냥하게 전한 말이 귀에 들려왔다.
“그래도 굳이 따지면 우리 해빈이가 더 귀엽고 나랑 성격 더 잘 맞긴 하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도 힘내줘?”
응? 여우 선배보다 내가 귀엽고 성격이 잘 맞아?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의미가 뭐예요?
하지만 내가 보스에게 되묻기 전에 공간 마법이 나를 집으로 복귀시켰다.
“뭐야······?”
자기가 1등이고, 굳이 2등을 고르면 내가 낫다는 건가? 아니면······.
떠올리는 것조차 불길하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다.
만에 하나라도, 혹시 보스 자신이 없어져서 교수님을 지켜줄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여우 선배뿐만이 아니라 나도 교수님에게 힘이 되어주라고. 잘 부탁한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희미하게 들려온 보스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슬펐던 것 같아서.
***
오후 열한 시경.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니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물소리도 들리고, 세아가 설거지 중인 듯했다.
어째 그릇 놓는 소리가 평온하지 못하고 좀 요란한데······. 살짝 긴장하며 부엌으로 걸어간 나는 세아에게 물었다.
“언제 왔어?”
“삼십 분 전에.”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다. 내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는지 그릇을 조금 난폭하게 내려놓는다.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뭔가 화가 난 듯한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금 말했다.
“훈련 열심히 했어?”
“응.”
“식기세척기 쓰지 왜 직접 하고 그래.”
“그릇 몇 개 없잖아. 이게 훨씬 빨라.”
이제 그런 것도 잘 아네. 상당히 감격스러우면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대놓고 물었다.
“오빠 늦게 와서 그래?”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니까 맞는데.
그즈음 설거지를 마친 세아가 손을 닦고 몸을 홱 돌리면서 나를 봤다.
“열 시까지 온댔잖아.”
“아······ 오는 거 기다렸어?”
오늘 밖에 나갈 일이 있다고 말은 해뒀다. 알리바이도 만들고 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더 늦어진 거고.
유해빈이랑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 걔 일어나서 밥 먹고,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세아한테 말한 귀가 시간을 훌쩍 넘겼다.
“안 기다렸어.”
짧게 답하고 나를 지나쳐간 세아가 종종 걸어간다. 그대로 방으로 가려는 줄 알았는데······.
풀썩.
소파에 엎드려 눕더니 고개를 슬며시 돌려 나를 보면서 말한다.
“벌칙.”
“······너 방금 웃었냐?”
“안 웃었는데.”
내 추궁에 황급히 표정을 싸늘하게 되돌렸으나 이미 다 들켰다. 저게 어디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이야.
실은 별로 화도 안 난 거다. 하긴 지금이 새벽도 아닌데 한 시간 늦었다고 구박하는 게, 아무리 얘가 나 늦게 들어오는 거 싫어해도 그건 좀 아니지. 그냥 이참에 건수 잡아서 공짜로 안마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애가 속상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거실로 걸어갔다.
“지금 바로? 나 빨리 샤워하고 오면 안 되나?”
“해주는 사람도 땀 나고, 받는 사람도 땀 나니까, 하고 씻는 게 효율적이야.”
그리곤 하는 말이 자기도 훈련장에서 간단하게만 샤워하고 집에 와서는 다시 안 씻었단다.
“너 오늘 처음부터 작정한 거지?”
“뭔지 몰라도 아닌데.”
“아니다, 됐다. 그럼 손만 먼저 씻고 온다?”
“응.”
욕실에서 손을 씻고 오니 세아가 엎드린 채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응, ······응. 아니, 응. 일요일? 안 될 것 같은데······.”
톡톡, 뒤에서 어깨만 살짝 건드리자 세아가 돌아본다. 나는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유리?>
뭔가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또 아쉬운 게 있다는 듯한 목소리. 둘이 요새 가깝게 지내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진유리인 걸 알겠다.
<응.>
고개를 끄덕여 답한 세아가 마주 입 모양으로만 말한다.
<해줘.>
통화하면서 안마를 받으려는 모양인데 이게 아주 자기가 상전이지. 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세아가 또 한 번 입 모양으로 말한다. 이번에는 좀 길게.
<해주세요.>
존댓말 썼으니까 봐준다.
세아의 양쪽 어깨 위로 마력을 담은 손을 얹었다. 애가 일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몸을 편하게 늘어뜨리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응, 아니······ 너랑 놀기 싫은 게 아니라······ 나도 할 거 있고 그러니까······ 으음······.”
<네가 주말에 할 게 뭐가 있다고. 너 밖에 놀러도 잘 안 나가잖아.>
“······아무튼 안 돼.”
일요일은 나랑 외출하기로 약속했지. 진유리한테 경쟁의식을 느끼는 게,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친구가 놀자는 것도 거절하고 나랑 선약한 걸 우선시하는 게 기꺼워서 나는 좀 더 열심히, 세밀하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흐으······.”
<이세아 너 지금 목욕해?>
“아니······ 거실인데······ 왜?”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목소리를 떨어? 뜨거운 물에 몸 담근 것처럼.>
“······그냥.”
<어쨌든, 토요일까지 진짜 열심히 훈련하고 일요일에는 나랑 좀 놀아.>
“너 친구 많잖아. 하으······ 걔들이랑 놀면 되지.”
<아잇, 진짜, 거기는 너랑 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꼭 이렇게 말로 해야 알아?>
“아······ 진짜······? ······왜?”
<왜는 무슨 왜야.>
진유리가 뾰로통하게 반문하고 있지만 세아가 마지막으로 물은 ‘왜?’는 그 애한테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어깨를 두드려서 내 쪽을 보며 한 질문. 나는 입 모양으로만 답했다.
<그냥 유리랑 놀고 와.>
“······.”
세아가 고민한다. 어디 가려는지는 몰라도 진유리가 놀러 가자고 한 곳에 자기도 흥미가 있긴 한데, 나랑 약속해놓고선 안 지키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그때 진유리가 말했다.
<아니면 세아야. 그으······ 이건 어때?>
“뭐?”
대답하는 세아 목소리가 돌연 싸늘해졌다. 그리고 진유리가 의도적으로 부드럽게 냈다는 게 훤히 읽히는 어조로, 몹시 은근하게 물었다.
<거기 차 타고 가야 하니까······ 만약에, 혹시 만약에 있잖아······.>
“만약에 뭐?”
<교수님 혹시, 일요일 시간 괜찮으시면······ 너랑 나랑 같이, 그, 너 어차피 시간 안 된다고 한 거 교수님이랑 밖에 나가는 거면, 나도 같이 가도 되면->
“······지금 옆에 오빠 있는데.”
<으갸악!>
수화기 너머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