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95화 (195/207)

#195화. Chapter 47. 오월동주 (5)

그리곤 두어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쉰 다음에야 진유리가 답했다. 그나마도 당황이 역력히 깃들어 더듬거리는 말투로.

<어, 언제부터?>

“아까부터.”

<아까라는 게 구체적으로 언젠데······?>

“나 맨 처음에 일요일 안 된다고 말했을 때부터.”

<거의 처음부터잖아!>

진유리가 새된 어조로 따졌다. 세아는 아주 태연하게 ‘맞아’라고 답했고, 이내 작게 질문이 들린다.

<너 거실에 있다면서. 교수님은 뭐 하고 계신데? 같이 TV 보고 있었어?>

아마 저쪽으로도 TV 소리가 흘러 들어가서 물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 진유리 얘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됐다.

나 집에 왔을 때부터 세아가 거실 TV를 틀어놓고 있긴 했지만 우리 둘 다 보고 있는 건 아니다. 안마해주면서 배경음악처럼 켜둔 거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얘는 내가 옆에서 통화 듣고 있는 걸 모르는 거다. 그리고 세아가 왠지 살짝 망설이는 어조로 답한다.

“그냥······ 응.”

<휴우······. 아무튼 이거 절대 교수님 차 있으시니까 부려 먹겠다는 게 아니라, 세아야, 내 맘 알지? 너랑 놀고 싶고, 교수님 같이 가셔도 나 진짜 하나도 안 부담스럽고,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니까->

“직접 말해.”

<어?>

당혹스러워 나온 반문. 이어서 세아가 조금 심술궂은 표정으로 일러줬다.

“오빠 아까부터 옆에 꼭 붙어서 엿듣고 있었어.”

<으아앗!>

“에이, 이게 어떻게 엿들은 거야.”

들리니까 들은 거지. 이렇든 저렇든 수화기 너머에서 진유리는 허둥지둥하고, 몸을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누운 세아가 내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어, 그래. 유리 안녕?”

<앗······ 아······.>

아무래도 이대로 놔뒀다가는 제대로 대화하기 어려울 듯하고, 나는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어조로(내 옆에 꼭 붙어서 엿듣고 있던 세아가 못 들을 거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 진유리에게 재차 말했다.

“미안, 미안.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들려서 들었는데-” “거짓말이야. 일부러 들었어.” “일요일에 세아랑 어디 놀러 가려고?”

<네······.>

“시간 되면 나도 가도 된다는 것 같던데. 맞아?”

<네, 근데 그게, 교수님 차 타고 편하게 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요-> “맞잖아.” <아니라고! 아앗, 교수님한테 소리 지른 거 아니에요······.>

옆에서 세아가 하도 훼방을 놓는 탓에 대화가 썩 원활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들어보니 이런 말이다.

“각성자 테마파크?”

<얼마 전에 새로 생겼는데 재밌는 거 많다고 해서요······.>

그러고 보니 나도 학교에서 지나가다 들은 게 기억난다.

“인천 맞나?”

<네! 그거요!>

확실히 대중교통으로 다녀오려면 꽤 거리가 있긴 하고,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세아도 재밌어 할 것 같은데.

애들에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가 진유리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고.

+

<킬 더 이블> 4권, ‘영웅의 자격 上’이 진행 중입니다.

-4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헌터]

-진행률: 24.1%

+

4권의 진행률이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다. 정황상 개입해야 하는 일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나는 세아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같이 갈까?>

“······맘대로 해.”

애가 살짝 뾰로통한 듯하면서도 그런대로 선선히 동의해준다.

“세아는 좋다는데-” “내가 언제.” <진짜요?> “유리도 괜찮으면 나도 같이 가서 맛있는 거도 사주고, 하루 놀다가 올까?”

<좋아요! 좋아요! 앗싸!>

하늘을 날 것처럼 들떠서 나온 외침. 내가 든 휴대전화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세아가 나직이 묻는다.

“너 뭐 해?”

<아니, 그냥, 놀러 간다니까 좋아서······.>

“그래, 괜찮다니까 다행이네. 나도 그렇게 알고 일요일에 일정 비워둘게.”

<네, 교수님. 그으, 밤늦게 실례했습니다. 이세아 톡 할게!>

“나 잘 거야.”

휴대전화를 받아든 세아의 말엔 대답 없이 띠릭- 소리가 들렸다. 통화가 끝나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세아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도 가고 싶었지?”

“······조금.”

그리곤 다시 몸을 돌려서 엎드린 자세를 만들며 말한다.

“하던 거 계속.”

“싫은데?”

“해주세요.”

“싫다니까 그러네?”

“······해주세요, 오빠.”

“글쎄? 해주고 싶기도 하고, 안 해주고 싶기도 한데- 아야.”

툭- 세아가 뒤를 보지 않고 휘두른 팔이 내 가슴 아래편을 타격했다.

“와, 이제 마음에 안 든다고 아예 오빠 때리기까지 하네?”

“그러게 왜 심술- 하아······.”

귀엽게 투정을 부리던 세아가 곧 가녀린 숨을 내뱉는다. 마력이 일렁이는 손으로 애 등과 팔다리를 부드럽게 안마해주길 얼마나 지났을까. 세아 옷에 서서히 밴 땀이 내 손에도 묻어날 즈음해서 물었다.

“맞다, 오빠 요새 새로 개발한 안마법 있는데, 고객님 어떻게 한번 받아볼 생각 있으세요?”

“뭔데?”

기대감이 은은하게 어린 반문. 나는 주먹을 쥐며 마력을 집중했다.

“주무르는 거 말고 두드리는 거?”

“응? 아······!”

세아가 놀라서 헛숨을 내쉰다. ‘퍽’까지는 아니고 ‘툭’보다는 센 정도. 양손 주먹을 쥔 나는 세아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리듯이 가볍게 두드렸다.

간섭 계열의 구성체에다 물리적인 충격을 가미한 방법. 더 직접적으로, 더 강하게, 마법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흐으, 으······.”

세아가 옅게 신음을 흘린다. 얼굴은 소파에다 묻고서, 손발에는 힘이 꾹 들어가면서 몸이 들썩인다.

혹시 얘가 알아채려나? 손은 쉬지 않으면서 학교에서 수업할 때처럼 세아에게 물었다.

“이거 뭔지 알겠어?”

“뭘······?”

“이러면 순수한 마법은 아니잖아. 뭘 거 같아?”

“몰라, 나중에 물어봐······.”

“마법이랑 물리 공격. 마검사가 전투하면서 쓰는 방식이랑 비슷하지?”

“알겠으니까 좀 있다가 해······. 여기 학교 아니고 집이라고······.”

뭐, 이론적인 설명은 미뤄도 되려나. 내 동생이라서 하는 평가가 아니라 세아 얘가 마력적인 감각이 엄청 좋으니까. 안마받으면서 몸으로 익히고,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자기 걸로 체화할 수 있을 터였다.

세아가 이걸 꼭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세간에 공개하지 않은 비장의 무기, 이 간섭 계통의 구성체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전투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그걸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더 지나서라도.

이삼 분쯤 지나서 나는 손을 멈췄다.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길게 호흡하던 세아가 겨우 안정을 찾았는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끝났어?”

“응.”

“후우······.”

마지막으로 숨소리를 정돈한 세아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평소보다도 훨씬 땀을 많이 흘려서 옷이 피부에 착 붙었고, 이마 부근에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면서 말한다.

“마검사 맞는 거 같아.”

“이야, 그거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네?”

“자꾸 물어봤잖아.”

“따라 할 수도 있겠어?”

“아니, 못 해.”

세아가 고개를 젓는다. 대충 흐름은 알겠는데 체내에서 작용하는 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단다. 나는 격려처럼 웃으며 답했다.

“계속 받다 보면 감이 잡힐 거고, 어때? 앞으로도 이거 해줄까? 원래 받던 것보다 몸도 개운할 건데.”

“······이제부터 마무리할 때는 이거로 고정.”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다. 찝찝해서 빨리 씻어야겠다며 세아가 자기 방으로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몇 시간 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세아야. 이거 별 뜻은 없이 묻는 건데.”

“뭔데?”

막상 말하려니까 망설여지는데.

하지만 이미 꺼낸 말이고,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목소리를 꾸미며 물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학교에서 애들한테 인기가 좀 있나?”

욕먹어도 할 말은 없지만 정말 몰랐다. 유해빈이 나한테 그런 감정일 줄은. 물론 이걸 세아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워낙 당황스럽고 미안해서 상담 비슷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한데 내가 물어본 직후.

“그게 왜 궁금해?”

세아가 대번에 도끼눈을 뜨면서 반문한다. 애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흡사 되먹지 못한 인간을 비난하는 듯한 시선. 그리 낯설진 않다. 작년까지 자주 봤던 눈빛이라서.

“일곱 살이나 어리고 고등학생인데, 인기 많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면 뭐?”

내 예상보다도 반응이 격한데. 하는 수 없지. 말을 돌려야겠네.

“유리만 그런 게 아니라 2학년 애들한테 가끔 연락이 오거든.”

“뭐라고?”

“밥 사주세요, 교수님 집에 계실 때 온라인 게임도 하세요? 하시면 저희랑 같이해요, 이런 거. 여학생이랑 남학생 상관없이.”

사실이긴 하다. 내가 그거 얘기한 건 아니었지만.

“······.”

세아가 빤히 나를 쳐다본다. 나는 뻔뻔하게 결백하다는 눈빛으로 마주 봤고, 그제야 애가 작게 답한다.

“인기 많긴 해.”

“넌 그거 별로야?”

“별로는 아닌데······.”

‘별명 이상한 거 지어서 부르는 건 좀 싫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이른 세아가 자기 방에 들어갔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들은 말과 나눴던 대화. 마음이 심란하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모두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긴 마찬가지라서.

그리고 기대와 고민 속에서 며칠이 흘러, 마침내 10월 30일 토요일 밤이 다가왔다. 윤의성과 대면하기로 한 날.

인적이 없는 깊은 산어귀에 이른 나는 토끼 가면에게 일렀다.

“여기서 대기하면 돼. 내가 신호하기 전엔 행동하지 말고.”

“조심해요.”

“응, 너무 걱정하지 말고.”

토끼 가면의 당부에 부드럽게 답한 나는 산길을 올라갔다. 시야 한쪽에 홀로그램이 일렁이고 있다.

+

<킬 더 이블> 4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0일 자정까지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곡예사’ 윤의성과 대면하고, 어떠한 신체적·정신적 위해도 가하지 않으며 협력할 것

-클리어 보상:

1) 주관식 질문 1회

2) 소질 포인트 0.3p

+

지난번에 변경된 이후로 클리어 보상이 다시 바뀌지는 않았다. 놈이 협상을 위해 제시한 카드는, 현재까지는 주관식 질문과 소질 포인트뿐인 거다.

저걸로는 안 되겠는데. 네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패가 저 정도는 아니잖아.

굳이 육성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들으라고 내가 떠올린 생각에는 홀로그램이 반응한다.

듣고 있을 테니까 대답해봐. 뭔가 더 괜찮은 보상 없나? 너도 상황을 알 텐데. 나만 온 게 아니라 토끼 가면도 데려왔으니까.

윤의성 혼자만 왔든 여럿이 왔든, 작정하면 두어 명쯤은 못 죽일 것도 없어. 네 계획을 다 망쳐버릴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꺼내 봐. 네 의도에 따라주는 대신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숨기지 말고, 감추지 말고, 모조리 꺼내는 게 좋을 거야.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곧 윤의성과 대면할 거고, 그 전에 말해야 할 거야.

그리고 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띠링-

홀로그램이 두 개의 문장을 더 적어냈다.

+

-서브 퀘스트의 보상을 추가합니다.

-원하는 보상을 제시해주세요.

+

내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다.

“바꿔.”

3권의 마지막 문장.

이세아는 혼자가 됐다.

그걸 없던 걸로 해. 플롯을 고치고 문장을 다시 적어서,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로 만들어.

+

-원하는 보상을 제시해주세요.

+

듣지 않겠단다.

그것만큼은 불가능하다고. 그러니 다른 거, 내가 원하는 보상을 말하라고.

나는 조소처럼 답했다.

“그딴 건 없는데.”

어쭙잖은 건 필요 없어. 적어도 4권을 진행하는 데 있어선, 나는 이미 충분한 정보와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망칠 수도 있고, 내가 통제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이 수작 부리지 마. 거래하고 싶다면 최소한 구미가 당길 만한 걸 제시해.

그즈음 저 멀리, 산 정상이 가까운 곳에 몇 개의 인영이 보였다. 도합 네 사람. 제각기 마력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다.

마침 잘됐네. 모두 온 거나 다름없다. 내가 아는 배신자의 수는 여덟. 그들이 전부라고 가정한다면.

염의준, 아르노 뒤레, 안드레이 일린. 셋은 결코 아니다. 설마하니 에블린 그레이스가 직접 행차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윤의성을 포함한 남은 넷. 그들 전원이 모인 거다.

저쪽에서도 나를 발견했고, 나는 통신 마법을 구현해 토끼 가면에게 전달했다.

<부르면 바로 와줘. 총 넷이야.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리에서 다 죽인다.>

<······알겠어요.>

그리고 토끼 가면이 내게 답한 그 순간.

띠링- 띠링-!

신경질적인 소리가 울리며, 결국 홀로그램이 백기를 들었다.

+

<킬 더 이블> 4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변경합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0일 자정까지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으로서 ‘곡예사’ 윤의성과 대면하고, 어떠한 신체적·정신적 위해도 가하지 않으며 협력할 것

-클리어 보상:

1) 생사를 막론한 배신자 전원의 이름

2) 현재 함께 자리한 배신자 4인의 동기와 목적

3) 소질 포인트 0.3p

-권고 사항을 전달합니다.

: 선을 넘지 마. 더 이상의 협상은 없어.

+

가면으로 웃음을 감추며 저편의 넷에게 다가간 나는 마음속으로 일렀다. 홀로그램이 들을 수 있게.

좋아, 이번까지는 협력하자고.

네가 날 동등한 위치라고 여기지 않고, 나도 너를 믿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그리고 나를 경계하며 응시하는 네 놈에게 기뻐하는 어조로 말했다.

“고맙게도, 생각보다 많이 와줬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