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Chapter 49. 마나랜드 (1)
***
“오······.”
10월 31일 일요일, 오전 아홉 시가 다 됐을 즈음. 거실로 나온 세아를 보고 나도 모르게 흘린 감탄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매만지던 세아가 슬쩍 눈가를 좁히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묻는다.
“왜? 이상해?”
“아니, 잘 어울리고 예쁜데, 너 그런 스타일로 안 입지 않나? 유리가 골라준 거야?”
‘꾸몄다’라는 느낌은 별로 안 드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체계가 잡혀 있다고 해야 하나. 내 동생 패션은 대체로 편하게 입거나 ‘오늘 신경 좀 썼다’라는 게 티가 나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래서 나름대로 보기 좋다고 한 말이었건만, 여기서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은 세아가 되묻는다.
“나 평소에 옷 잘 못 입어?”
‘너, 너 그거 피해의식이야. 반성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만 답했다.
“에이, 아니지. 그냥 스타일 다른 것도 잘 어울린다고.”
“······그럼 됐어.”
조용히 나를 응시하던 세아가 그제야 수긍했는지 다시 거울을 본다.
얼추 무난하게만 입어도 예쁘니까 상관없지 싶은데, 어쨌든 옷을 잘 입는 편이 아닌 건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네······.
“방금 무슨 생각 했어?”
“아무 생각 안 했는데? 빨리 준비해. 유리 기다리겠다.”
적당히 둘러대서 넘기고 세아가 준비를 마치니까 오전 아홉 시를 넘긴 시각. 함께 집에서 나온 우리는 걸어가기에는 살짝 먼 곳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시야 멀리 보인 광경. 진유리가 상기된 얼굴로 제자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삑-
내가 작게 클랙슨을 울리니 차를 발견하곤 나는 듯이 달려온다. 얘는 세아랑 대조적으로 오늘 작정하고 꾸민 차림새인데 예쁘고 잘 어울리네. 내 옆의 조수석에 앉은 세아가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안 춥나?”
“유리도 어제 산 옷이야?”
“응.”
그러면 어제 봤을 텐데 왜 지금 와서······ 아니다, 입 닫고 가만히 있어야지.
내가 느리게 차를 몰아가고, 진유리는 뛰어오고, 중간 지점에서 마주칠 즈음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유리 일찍 나왔네?”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마중까지 나와주시는데 당연히 일찍 나와야죠. 히히, 세아 안녕! 어제 말한 대로 입었네?”
“빨리 타. 나 뒤에 타도 돼?”
“어, 유리랑 같이 타.”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세아가 조수석에서 일어나 뒷좌석으로 향한다. 진유리도 차에 올랐고, 목적지로 향하며 둘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 먼저 타지?”
“일단 악마의 집이랑 워프 익스프레스는 꼭 타야 하고, 맞다, 갔던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그거도 재밌다던데.”
“어떤 거?”
“음, 그게 뭐였더라······. 잠시만, 검색 좀 해보고. 맞다, 교수님은 여기 무슨 놀이기구 있는지 들어보셨어요?”
“몇 개는? 놀이기구 이름이 거의 다 마력 관련인 건 알아.”
유령의 집이 아니라 악마의 집.
워프 익스프레스는 롤러코스터 종류인데, 이것도 공간이동 마법을 모티브로 한 것.
세아도 조곤조곤하게 말을 받는다.
“놀이공원 이름 자체가 마나랜드잖아.”
마나랜드. 오늘 우리 셋이 가려는 각성자 테마파크의 이름이다.
평범한 놀이공원과 달리 각성자도 스릴을 만끽할 수 있게, 비각성자도 각성자들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게, 그런 컨셉이라는데······ 대충 학교에서 2학년 애들이 얘기하는 것만 들었고 나는 사실 잘 몰랐다.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막론하고 인기가 진짜 어마어마하고, 개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국내 최고의 놀이공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만 알았다. 진유리가 같이 가자고 세아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꽤 자세히 알고 있다. <킬 더 이블> 4권에 서술되는 사건일 듯해 어떤 곳인지 조사를 철저히 했으니까.
실제로 오늘 아침부터 진행률이 실시간으로 상승 중이기도 하고.
아직 4권 중반부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딱히 위험하지 않은 일상적인 사건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대비는 해둬야 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대응하면, 그러면 늦을지도 모르니까.
“이것저것 많이 있어요. 악마의 집도 있고, 워프 마법 비슷하게 롤러코스터도 있고, 범퍼카는 시속 100킬로 넘게 올라가는데 충격 흡수해서 안전사고 안 난다고 하고, 바이킹 같은 건 디스펠 걸려 있어서 비각성자처럼 탈 수 있다고 하고, 가상현실로 각성자처럼 날아다니면서 마법 쓰고 몬스터랑 싸울 수 있는 거도 있고······.”
휴대전화를 보면서 진유리가 놀이기구들 하나하나의 특징을 일러줬고, 듣고 있던 세아가 끼어들어 물었다.
“오빠는 뭐 먼저 타고 싶어?”
“나? 글쎄······ 관람차?”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진유리는 당황한 눈치, 세아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놀이공원 오자마자 관람차 타는 사람이 어딨어.”
“그것도 그러네.”
“나랑 유리가 재밌는 거 찾을 테니까 오빠는 같이 타기만 해도 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 아니다, 가만히 있어야지. 나는 선선히 알겠다고 답하곤 차를 몰아나갔다.
정말로 본심을 말하라면, 하나 타고 싶은 게 있긴 한데.
하지만 내가 말을 안 해도 그것도 탈 것 같았고, 오전 열한 시쯤이 되어 우리는 인천에 자리한 놀이공원, 마나랜드에 도착했다.
***
<출발합니다, 편안한 여행 되세요!>
직원의 경쾌한 인사에 이어 칙칙폭폭- 뭔가 인공적인 기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차 제일 뒷자리에 탑승한 소녀는 시야에 펼쳐지는 장면을 애달픈 눈길로 바라봤다.
마력으로 구현한, 워프 마법으로 이동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광경. 다양한 색의 빛무리가 일렁이면서 어딘가로 급격히 날아가는 감각이 든다. 푸른 하늘, 광활한 대지, 이내 기차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저 위에 흡사 태풍처럼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나타난 변화.
스아아아아-!
하늘에 공간이 열린다. ‘균열’이라고 이름 붙여진 현상이었다.
“아아아아악!”
“와······.”
무척이나 빠른 속도와 놀라운 효과에 탑승객들은 정신이 없거나 감탄하거나 둘 중 하나. 그러나 제일 뒷자리에 탑승한 소녀, 그녀 한 사람만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대균열을 건너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균열을 넘은 기차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낯선 곳. 하지만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한 세상이다. 균열 너머. 어릴 적에 살았고, 이곳에서 만난 한 사람과 함께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세상.
그녀는 조금 더 구슬픈 목소리로 계속 노래했다.
“제일고~ 운동장에~ 별빛이 쏟아지네······.”
한껏 감정을 끌어 올렸더니 진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이게 아닌데. 이왕 놀러 온 김에 분위기 좀 잡아보려고 한 건데.
균열 너머 세상을 여행하는 기차 위에서 소녀는, 이제 정말로 슬퍼진 감정으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엄마 잃은······ 소녀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흐윽.”
쿠오오오오-!
기차의 여행이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저 아래 펼쳐진 세상. 악마도 없고 영혼을 지배당한 몬스터 군단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윤리적인 문제로 전쟁 같은 건 구현을 생략했다는데 소녀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것까지 목격했으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는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힘차게 달려라! 균열철도 용용이. 힘차게 달려라! 균열철도 용용이. 균열철도 용 용 이······♬”
스르르륵······.
기차가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실감 나게 보이던 환상도 어느새 잦아들어 있다. 즐거운 여행 되셨는지를 묻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기차의 안전바가 올라갔다.
“애들 말 진짜였네.”
“엄마! 우리 이거 나중에 또 타자!”
“너 아까 무서워서 소리 질렀지?”
“아니거든?”
저마다 함께 온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며 웃고 떠든다. 눈꼴시게 꼭 붙어서 다니는 커플, 친구끼리 온 애들, 가족과 와서 들뜬 아이들, 모두 그늘 한점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가장 늦게 내린, 제일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녀, 유해빈은 처량하게 걸어 나가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만 혼자네······.’
혼자서 놀이공원.
혼자 놀기의 단계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가까운 위업을 그녀는 지금 이루어내고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딱히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 연락을 할 수 없어서, 그게 문제지.
‘도진쿤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지난주에 전혀 생각지 못하게, 사고에 가깝게 고백한 이후로 그와 사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연락을 못 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보는 것도, 제일 뒷자리에 있는데도 창피해서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쉬려나?’
어제 팬텀으로서 일을 처리하고 온 건 알고 있다. 딱 그것까지만 알았다. 평소 행실로 미루어보건대, 집에서 쉬거나 이세아와 어디 나들이를 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
‘연락이라도 해볼까?’
문득 든 충동.
하지만 유해빈은 곧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 연락하면 받긴 하겠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보스가 나중에 시간 되면 당신이랑 같이 놀고 오라고 마나랜드 자유이용권에 프리패스까지 줬는데, 당신이 안 놀아줘서, 아니, 시간은 내겠지만 곤란해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할 용기가 없어서 혼자 쓸쓸하게 왔다고?
‘그건 좀 아니지······.’
이미 용족의 대를 이을 계획에 차질이 생긴 상황이다. 수습하려면 앞으로의 행보가 중요하겠지. 그런데 매력 있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불쌍하게 호소하는 건······ 그야말로 진유리나 할 법한 실책이다.
‘일단 왔으니까 몇 개는 타고 가야지. 재밌는 건 많고.’
혼자 온 게 아쉬울 뿐 마나랜드의 시설은 대단히 훌륭했다. 나중에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악마를 쓰러뜨리고 평화를 되찾고 나면, 저쪽에도 이런 테마파크를 지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지금이 열두 시니까······.’
간단하게 점심 챙겨 먹고, 혼자 탈 수 있는 놀이기구 위주로 몇 개 타고, 기분 전환을 마치고 귀가해야겠다.
결론을 내린 유해빈은, 그러나 여전히 조금 시무룩해서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그리고 얼마쯤 가다가······.
퍼억.
“아야.”
“아, 미안해요.”
그만 앞을 못 보고 서 있던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이쪽에서 안 보고 있다 부딪친 건데도 바로 사과하는 말이 들렸고, 유해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리며 자신도 사과하려 했다.
“죄송합- 어······?”
유해빈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멈췄다. 방금 그녀와 부딪혀서 뒤를 돌아본 사람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평소에도 이 정도 눈높이 차이가 났다. 그야 키가 20cm 가까이 차이 나니까.
그러니까······ 유해빈이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가 여기 함께 오고 싶은 사람. 이도진이 아주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언제 왔냐?”
“그게, 한 삼십 분 됐나······? 얼마 안 됐어요.”
이어진 침묵.
그렇다고 표정을 찡그리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도진은 조금 곤란해하는 것 같다. 유해빈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혼란 그 자체였고.
‘뭐야, 이거 뭔데? 도진쿤 여기 왜 있어?’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보스가······.’
설마 의도한 걸까.
이도진이 오늘 여기 오는 걸 서연희는 미리 알고 있었겠지. 유해빈 자신에게 마나랜드 이용권을 준 건 그 때문일까.
‘내가 도진쿤한테 말 못 꺼낼 거 알고.’
하지만 말을 못 꺼내고 쓸쓸하게 혼자 가도, 가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것까지 계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서연희라면 틀림없겠지.
그리고 이어진 생각.
‘나 진짜 몰랐는데.’
남이섬 때와 다르다. 이도진이 오늘 오는 걸 알고 따라서 온 게 아니다. 집착, 스토커. 그녀로선 심히 억울한 단어들이 떠오르고, 유해빈은 흠칫하며 이도진의 표정을 다시금 살폈다.
“만나려니까 여기서도 만나네. 넌 누구랑 왔어?”
“아······ 저요?”
답은 정해져 있다.
‘혼자 왔는데요······.’
그러나 말할 수 없다.
놀이공원 혼자 오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믿어줄 리가 없으니까.
억울하게도 영락없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생긴 상황.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많이 기다리셨- 어?”
“······.”
유해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추로스와 이것저것 먹을 걸 손에 들고, 머리엔 동물 머리띠를 쓰고, 척 보기에도 ‘나 놀러 왔다, 재밌게 놀고 있다’라는 얼굴인 진유리가 천천히, 확실히 표정을 굳힌다. 이세아는 이게 뭔가 싶은 건지 멀뚱멀뚱 바라보는 눈빛.
저벅저벅 이쪽으로 걸어온 진유리가, 차가운 어조로 유해빈에게 물었다.
“뭐야?”
“그냥, 혼자 놀러 왔는데.”
나중엔 정말 말할 기회가 없을 거고, 지금이 마지막으로 말할 타이밍. 그러나 진유리는 물론이거니와 이세아와 이도진도 무어라고 답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유해빈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닌데.’
그야 지금껏 음습하긴 했지만, 다른 때는 몰라도 오늘은 정말 억울하다.
‘나 스토커 아니라고······.’
차마 그녀 자신이 꺼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