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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200화 (200/207)

#200화. Chapter 49. 마나랜드 (2)

몇 초의 침묵. 유해빈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도진을 봤다. ‘내 말 안 믿어요?’라는 호소를 담아서.

진유리야 믿건 안 믿건 상관없다.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그녀의 의견은 하등 중요치 않다.

이세아는 다행히 통과. 있는 그대로 믿진 않아도 자기들 따라온 거로 의심하고 질색하진 않는 것 같다. 애초에 오빠와 둘이 온 게 아닌 시점부터 별생각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문제는 이도진 한 명. 초롱초롱 맑은 눈망울로 재차 억울함을 표한 유해빈은 그에게 말했다.

“혹시 말도 안 되는 의심하실까 봐 그러는데······ 저 진짜로 따라온 거 아니에요. 셋이 여기 오는 줄도 몰랐는데요. 그냥 주말에 할 거 없고, 재밌다고 소문났길래 어떤가 해서 온 거예요. 으흠, 그럼 이만.”

침착하게 할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반대편으로 걸었다. 과감하게 던진 승부수. 한 걸음마다 세 사람과 멀어지고, 그녀는 내심 당황해 되뇌었다.

‘아니, 설마, 이렇게 가는데 둘 다 안 잡는다고?’

그래도 내가 너 친한 친군데? 진유리가 급부상하면서 밀려났지만, 학교에서 넉넉히 한 손에 들 만큼 친한데?

그래도 내가 당신 제자 겸 후배인데? 솔직히 지금까지 많이 도움은 못 줬어도 열심히는 하고, 당신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는데? 여린 마음을 다친 이 가련한 용용이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그냥 보낸다고?

‘말이 안 되잖아······.’

당황, 낙담, 서러움.

복잡하게 슬픈 감정이 유해빈의 마음에 스며오던 그때.

“잠깐만.”

“으흠, 흠, 흐음.”

웃음을 감추려는 헛기침. 그런 다음에야 뒤를 돌아본 유해빈은 물었다. 방금 그녀를 불러세운 이도진에게.

“왜 그러세요?”

살짝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이도진이 이세아를 본다. 통감자를 한 알 우물우물 씹으며 이세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진유리도 말이 없다. 뜻대로 하시라는 것처럼.

그리고 이도진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해빈이 너 혼자 왔으면 넷이 같이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떤가 싶어서.”

“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저는 혼자 놀아도 되는데, 교수님이 정 원하시면-”

“그래? 불편하면 우리끼리 놀고.”

“으아아! 제가 언제요!”

슬쩍 장난스러운 답에 유해빈이 황급히 외친 말.

옆에서 지켜보던 진유리가 못 볼 꼴이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

쿠아아아아앙- 콰앙!

서로를 향해 질주하던 범퍼카 두 대가 세게 부딪쳤다. 시속 70킬로에 가까운 속도니 큰 사고가 나야 정상일 텐데, 신기하게도 양쪽 다 멀쩡히 튕기기만 했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마나랜드의 범퍼카. 아예 안전사고 자체가 날 수 없는 구조라고, 진유리는 그렇게 들었다. 짜릿한 속도감을 즐기되 다치지는 않게.

쿠아앙!

한 번 더 액셀을 밟은 진유리는 급격히 가속했다. 보호 마법이 내장된 범퍼를 앞세워 적을 향해 돌격. 그러나 능숙하게 피한 상대가 넓게 반원을 그려 타격 범위를 벗어나더니 곧장 그녀의 차 옆면으로 돌진했다. 콰앙!

“끄악!”

어지러운 충격에 진유리는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고, 그러자 옆좌석에 탄 이세아가 손을 뻗는다.

“나 줘봐.”

대뜸 말하고 핸들을 쥔 친구가 페달을 확 밟는다.

부아아앙! 뒤로 갈 수 있는 데까지 후진. 저 멀리 보이는 유해빈이 얄밉게 아부한다.

“와! 천재 베스트 드라이버 이도진! 진짜 어떻게 피한 거예요?”

“내가 운전을 몇 년 했는데.”

옆좌석의 이도진은 차분히 답하나 의미심장한 미소. 아주 조금은 약이 올라 진유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얻어맞기만 했잖아.’

범퍼카를 타러 온 건 좋았다.

셋이면 한 대씩 타고 재밌게 놀았을 텐데 네 명이 돼서 둘씩 나눠 타고, 어떻게 하다 보니 자신은 이세아와 타고 유해빈이 이도진과 탄 것도, 화는 나지만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제 곧 내려야 하는데, 아직 유효 타격을 한 번도 못 준 건 또 별개의 문제. 최선을 다해 차를 몰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운전자의 기량이 너무 극심하게 차이 나서.

그녀만 분한 것도 아닌지 핸들을 쥔 이세아가 결연하게 이른다.

“꽉 잡고 있어.”

“뭐 하게?”

“갖다 박을 거야.”

운전 기술로 도전하는 건 무의미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정공법뿐. 피할 엄두도 못 내게 최대 속도로 들이받는 거다.

스아아아!

두 사람이 탄 범퍼카 주위로 빛무리가 일렁였다.

처음 탈 때 차에 있던 마력은 2할쯤 남았고, 이세아는 그걸 전부 쏟아부어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간다.”

나직한 선언. 진유리는 안전바를 꼭 붙들어 맸다. 그리고······.

부아아아앙!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낸 범퍼카가 전속력으로 돌격했다.

어마어마한 속도. 기세등등하게 우쭐대던 유해빈이 이도진의 어깨에 찰싹 들러붙으며 난리를 친다.

“어? 쟤 뭐야, 폭주 뭐야! 도진쿤, 빨리 도망쳐!”

“꽉 잡아!”

부아앙- 이도진이 차를 돌려서 도주한다. 슈아아아아! 이세아가 숨 가쁘게 추격했다. 그즈음 계기판의 숫자를 본 진유리는 화들짝 놀라 친구를 말렸다.

“야! 백 킬로 넘겠어! 그만해!”

“안 돼. 억울해.”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듯한 이세아가 오히려 더 세게 액셀을 밟았고, 슬슬 막다른 벽이 나오자 유해빈이 기겁해 외쳤다.

“아아악! 쟤 좀 말려봐요! 동생이잖아!”

“원래 내 말 안 들어!”

뭔가 이걸 말할 수 있어 속이 시원하단 듯한 이도진의 대답. 진유리는 이세아가 이를 꽉 깨문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젠 정말 충돌 직전이던 그때.

끼이이이익-! 피슈우우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범퍼카가 멈췄다. 마력도 다했고 마침 시간도 끝난 거다.

“어으······ 어어······.”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유해빈이 범퍼카에서 내렸다. 이도진의 팔을 부여잡고 몸을 기댄 채로 둘이 걸어온다. 그제야 열이 식었는지 이세아가 멋쩍어하며 딴 곳을 쳐다봤고, 이도진이 다짐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면허 따도, 차는 절대 안 사줄 거야.”

“······내가 돈 벌어서 살 건데.”

부루퉁한 답에 진유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사서 태워줄 테니까 넌 제발 운전대 잡지 말라고.

그다음 탄 놀이기구는 드롭 타워. 높이가 140m, 최고 낙하 속도는 무려 150km/h. 여기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건만 마나랜드의 드롭 타워는 다른 놀이공원과 차별화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이도진, 진유리, 유해빈, 이세아 순서로 각자 자리에 앉고 안전바가 내려간 다음. 안내 직원이 사무적으로 알렸다.

<올라갑니다.>

바로 그 직후.

스아아아아-!

“으아아악!”

탑승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떨어질 때보단 느리지만 마나랜드의 드롭 타워는 올라갈 때도 빨랐다. 거의 시속 100킬로. 불과 몇 초 만에 정상에 다다른 상황. 각성자라곤 하나 진유리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각성자 탑승객은 디스펠 효과를 고를 수 있고, 모든 옵션을 다 걸면 비각성자와 흡사한 감각이어서. 그녀는 중간 정도 할까 했으나 이세아가 대뜸 최고 단계를 고른 데다 유해빈이 도발해 벌어진 참사였다.

“으으······.”

엉망으로 산발이 된,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 들여 손질한 머리칼을 수습하며 진유리는 옆자리의 이도진에게 물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나?”

이도진이 무척 상쾌한 어조로 되묻는다. 그는 디스펠 옵션 자체를 안 골랐고, 마력을 쓰니까 적당히 스릴 있고 재밌단 표정. 진유리는 뒤늦게 후회했다.

‘아, 나도 그냥 저럴-’ “꺄아아아악- 으갸아아아악!”

슈아아아아아앙!

드롭 타워가 급강하했다. 지상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초 남짓.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진유리는 문득 알아챘다.

“아······.”

저도 모르게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이도진의 손을. 순식간에 얼굴로 피가 쏠리는 걸 느끼며 진유리는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응?”

이도진이 태연하게 묻는다. 잡혔던 손을 자연스럽게 풀면서. 창피하기도 하고, 그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 시무룩해지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풀이 죽은 그녀는 안전바를 올리고 걸어 나왔다.

‘기억 안 나네······.’

아까 손을 잡았던 감촉이 어땠는지 떠올리려 했으나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접촉을 시도한 오른손은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으나 기억력 쪽이 문제. 그때 문득 생각난 계획이 있다.

‘기억이 안 나면······.’

한 번 더 잡으면 된다. 이번엔 명확히 떠올릴 수 있게, 의도적으로.

“다음 어디 갈래?”

“저거.”

유해빈의 물음에 이세아가 저편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이름하여 악마의 집. 이거 다 가짜라고 무시하고 들어갔다간 눈물 콧물 다 쏟고 나온다고 악명이 자자한 흉가 시설로 향하며 진유리는 굳게 다짐했다.

‘저기가 승부처야.’

어두울 때.

이세아와 유해빈이 목격할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을 때.

저기서 다시 한번 이도진과 손을 잡는다. 무서워서 교수님께 의지한다는 좋은 구실을 내세우면서.

“흐흐.”

“너 왜 음습하게 웃냐?”

유해빈이 도끼눈을 뜨고 던진 질문. 진유리는 차갑게 받아쳤다.

“웬 참견?”

“얼씨구, 속 보인다, 속 보여.”

“입 다물어······.”

이도진이 들을까 조마조마해 경고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무서운 거라면 질색이지만 오늘만은 피할 수 없다. 벌써 불안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도착한 곳.

“와······.”

“여기 왜 이렇게 넓어?”

“다 하면 천 평 훨씬 넘는대.”

유해빈은 고개를 올려다보며 감탄하고, 이도진의 물음에 이세아가 답했다. 침을 꿀꺽 삼킨 진유리는 정면을 바라봤다.

오늘 역사적인 스킨십을 위해 마련된, 탈출하는 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음산한 3층 저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거 생각보다 잘 만들었는데. 그것도 좀 과하게.

“안 무섭다, 하나도 안 무섭다······. 이거 다 가짜고 마법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용이다, 울트라 슈퍼 용감한 용용이다······.”

아니······ 아무리 무서워도 그거 말하면 안 되지. ‘용’과 ‘용용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슬쩍 음성을 차단하면서 나는 내 뒤에 따라오는 유해빈을 봤다. 애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안 무섭다, 안 무섭다······. 으아악!”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을 되뇌다가, 어디 자그마한 소리라도 날라치면 혼비백산해서 내 옷깃을 부여잡는다.

공포 영화 보는 데 은근히 자부심이 있는 세아는 기세 좋게 앞장을 서더니, 지금 들어온 지 이십 분은 지났나? 아까부터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는 중이고.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게 확인한다.

“여기 진짜 아니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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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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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랑 특수 분장을 절묘하게 활용해 구현했을 뿐이다.

근데 솔직히, 나도 엿보는 눈 없었으면 흠칫했을 것 같은데. 이거 가짜는 맞는데, 이성적으로는 알겠는데, 그걸 알아도 공포감 연출하는 게 워낙 살벌해서.

이거 진짜 무슨 사고로 악마가 소환된 거 아닌가, 그런 착각이 들게 꾸며놨다.

“······.”

세아는 여전히 멈춰 서 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나갈지 모를 일이라 내가 앞장서겠다고 제안하려는데······.

“오빠가 앞에 가. 절대 무서운 거 아니고, 그냥.”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슬금슬금 뒷걸음쳐 다가온 세아가 요구했다.

일견 침착해 보이는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저건 안 무서운 게 아니라 겁에 질린 거다.

그래도 세아랑 유해빈은 용감한 축이겠지. 나랑 세아 사이, 그러니까 본래 두 번째 자리였던 진유리는······.

“어······ 어······? 아아아아악!”

계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빼꼼 들고, 분명히 자기 앞에 있어야 할 세아가 보이지 않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쟤 저러다 기절하겠네. 서둘러 달려간 나는 일단 진정부터 시키려 했다.

“유리야, 괜찮-”

“으아악!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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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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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진유리의 주먹이 내 명치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기물 파손 등의 우려가 있어 공간 전체에 물리적 충격을 제한하는 디스펠이 걸려 있지만 의도치 않게 면역체까지 활성화한 마력엔 효과가 별로 없었다.

“오빠!”

“교수님!”

“으아······ 어?”

진유리가 어리둥절해한다. 왜 내가 눈앞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피하거나 막진 않고 얼추 충격량만 줄여 받아낸 나는 웃으며 말해줬다.

“괜찮아. 안 다쳤어.”

“죄송합니다······.”

사태를 파악한 진유리는 울상. 내 옆에 선 세아와 유해빈이 엄중히 비난한다.

“너 내 옆에만 붙어서 따라와. 마력 쓰지 말고.”

“어우, 악마의 집 왔다가 엄한 교수님 귀신 만들 뻔했네.”

“진짜 죄송합니다······.”

“어? 왜 존댓말 쓰냐?”

“너한테 한 말 아니거든.”

“둘이 싸우지 말고. 아직 갈 길 먼데 어서 가자.”

티격태격하는 둘을 타이른 나는 고민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1층은 막바지에 이른 것 같지만 갈수록 더 무서워진다던데, 여기까지만 하고 나가는 게 나으려나?

애들이 너무 무서워하고, 재밌게 놀려고 와서 주객이 바뀌는 건 좀 그렇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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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4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1일 오후 4시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 이세아, 유해빈을 이끌고 ‘악마의 집’ 마지막 방에 도달할 것

-클리어 보상: <킬 더 이블> 4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 세부조정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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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오후 3시 30분.

무자비한 강행군을 전제하는 메시지가 내 시야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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