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Chapter 49. 마나랜드 (3)
“후우······ 후.”
한 번의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번째엔 결심. 나는 좀처럼 걸음을 뗄 기미를 안 보이는 애들에게 일렀다.
“속도 좀 내서 가자. 내가 앞장설 테니까 뒤따라오기만 하면 돼.”
“지금보다 더 빨리?”
“천천히가 아니고요?”
세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까보단 진정했으나 목소리에 떨림이 가시지 않은 진유리도 동조한다. 그러나 남은 한 명, 유해빈은 의외로 내 편을 들었다.
“전 좋아요. 빨리 돌고 나가고 싶고, 교수님이 책임져주실 거잖아요.”
그리곤 내게만 보이게 한쪽 눈을 찡긋한다. 이어진 물음.
<또 뭐 할 거 있으신 거죠?>
<어떻게 알았어?>
<에이, 제가 교수님 하루 이틀 봐요?>
되게 뿌듯해하는 게 느껴지는 말. 얘가 놀랍게도 눈치챈 거다.
내가 방침을 변경한 이유가, 무언가 알릴 수 없는 목적 때문이라고. 이 애도 옆에서 여러 번 보고 경험했듯이.
<근데 무슨 일 때문이에요?>
<나도 아직은 모르겠네. 끝까지 가 봐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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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4권, ‘영웅의 자격 上’이 진행 중입니다.
-4권 태그: [아카데미] [사건 중심] [헌터]
-진행률: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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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률은 지금도 오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추측하기로 슬슬 때가 됐을 거다. 일상을 벗어난 사건이 발생할 때가.
<킬 더 이블> 한 권마다, 세아와 진유리는 최소한 두 번 이상은 그런 일들을 겪었다.
1권에서는 제일고의 균열과 팬텀의 경매장 테러. 하나 더 꼽는다면 둘이 강의실에서 난투를 벌인 것까지.
2권에서는 수학여행 당시 은마산 유적의 붕괴와 파르투스의 강림.
3권에서는 토끼 가면과 마주친 것. 그땐 영국에 있었으니 1권과 2권만큼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토끼와 싸운 것만 세어도 일단 두 번이다.
4권 진행률은 초반을 넘었고, 그러니 지금쯤으로 보는 게 옳겠지. 이곳의 마지막 방에 도달하면 알게 될까. 어쩌면 그곳에서 벌어질 사건일까. 답을 알지 못한 채로 계속 걸어 나갔다.
“으아앗!”
오후 3시 46분.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진유리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퍼억! 팔짱을 끼고 함께 걷던 세아도 내팽개치더니 계단 난간에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지며 벽으로 간다. 멀쩡하던 난간이 갑자기 뱀으로 변했으니 그야 놀라긴 하겠지만, 계단 오르기 전에 미리 말해줬는데.
“으갸아아악!”
진유리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른다. 방금보다 오히려 큰 목소리로.
슈우우우우- 칙칙한 색의 벽이 푸딩처럼 물렁물렁해져선 애를 끌어당긴다. 이래서 벽에 닿지 말라고 했는데, 워낙 놀란 터라 미처 생각이 안 난 모양이네.
“······.”
진유리에게 밀쳐져 쓰러졌던 세아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계단 난간이 뱀으로 변하자 한달음에 줄행랑친 유해빈은 혼자 3층 입구에 서 있다. 구해줄 사람은 나뿐이고, 진유리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힘줘서 잡고 나오면 돼.”
“어으······ 으아아!”
얼굴이 사색이 된 진유리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둘 다 힘을 줘서 간신히 탈출. 다만 너무 세게 당겼던지 자세가 흐트러진 애가 의도치 않게 내 품으로 안겼다.
“아······.”
“괜찮아?”
“네, 네······.”
황급히 뒷걸음질한 진유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고, 위에서 내려다보던 유해빈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핀잔을 줬다.
“이야, 사람이 극한 상황에서 본성이 나온다더니 자기 혼자 살겠다고 이세아 밀치는 거 봐. 진짜 옹졸하고 치사하다. 그쵸, 교수님?”
“내가 옆으로 도망간 거랑 네가 위로 도망간 거랑 무슨 차이인데? 차라리 내가 낫지.”
이건 진유리 말이 맞지. 나 대신 세아가 단호하게 일렀다.
“둘 다 그게 그거야.”
“미안해······.”
“으흠, 흠······.”
어쨌든 네 사람 다 3층에 무사히 올라갔고, 남은 시간은 13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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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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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집을 보면서 가는 거나 마찬가지라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그러나 오후 네 시까지 도착할지는 미지수.
한데 바로 그때.
덜커덕-
불길한 소리가 나며 마력이 일렁이는 문이 네 개 나타났다. 엿보는 눈으로 구성을 파악해보니······.
“둘씩 나눠야겠어.”
나는 읽어낸 바를 알렸다. 한쪽으로 가는 게 제일 난도가 높고 오래 걸린다. 둘, 셋, 넷으로 나눌수록 쉽고 빨라지고.
하지만 쉬운 길이라도 혼자 가긴 어렵고, 두 명씩 가는 게 효율적이다. 어떻게 나눌지 정하는 건 간단했고.
“내가 유리랑 가야겠네.”
“왜?”
세아가 불만을 내비치며 물은 말. 설명한 건 유해빈이었다.
“유리멘탈 쟤는 그나마 교수님이랑 가야 걸음이라도 떼지. 본인도 인정할걸?”
“맞아, 응, 맞아. 둘씩 가는 거면······ 교수님이랑 아니면 못 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진짜로.”
진유리가 변명처럼 답했고, 하지만 세아가 재차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면 넷이서 가. 다 같이 온 건데 같이-”
“교수님, 저희랑 내기하실래요?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하는지.”
세아 말을 잘라먹고 제안한 유해빈이 내게만 들리게 묻는다.
<시간제한 언제까지예요?>
<네 시 전까진 와줘.>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몰래 의논하고, 육성으로는 내기가 어쩌고 말을 주고받은 나와 유해빈이 문 앞에 섰다. 내가 왼편이고 유해빈이 오른편. 불만을 가라앉힌 건지 세아가 유해빈과 나란히 선다. 그리고선 새침하게 말했다.
“내가 이기면 다음 달 용돈 올려줘.”
“얼마나?”
“음······ 오십 퍼센트.”
그건 좀 많지 않나? 라고 묻기도 전에 유해빈과 세아가 문을 지나쳐 사라졌다. 어디서 뭐가 나타날지 알려줬으니 속도 내면 제시간에 도착하겠지. 머뭇거리면서도 내 옆에 다가온 진유리에게 일렀다.
“우리도 가자.”
“네······.”
문을 넘어 들어선 3층. 멀리서 악마의 웃음과 귀가 찢어지게 울리는 비명이 들린다.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배회하는 빛무리와 중간중간 습격하는 가짜 몬스터에 진유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남은 시간은 십 분 남짓.
나는 뒤편에서 불안해하며 걷고 있는 진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손 내 어깨에 올릴래?”
“저요?”
“응, 너.”
시야에 무서운 게 안 보이고, 내 속도에 맞출 수 있도록. 잠시 망설이던 진유리가 이내 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내 양쪽 어깨에 닿는 감촉이 옅었다. 손으로 잡은 게 아니라 거의 얹기만 한 수준. 걸음을 더 서두르며 일렀다.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도 돼. 나 걷는 대로만 걷고.”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벅, 저벅.
속도를 빨리해서 걷는 와중에, 무서운 게 나타날 때마다 진유리가 내 어깨를 강하게 쥔다. 가끔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리기도 했고. 그러다 3층 끝자락에 이르러서 문득, 무척이나 나직한 어조로 말한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혼자 왔으면 좀 무서웠을 것 같은데.”
“아니요, 이거 말고도요.”
나는 침묵했고, 진유리가 마음을 털어놓듯 말을 이어나갔다.
“봄에 뵀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요. 전부 다 감사해서요. 나중에, 시간 걸려도, 저 꼭 갚을게요.”
의지가 담긴 약속.
나는 괜히 웃으며 흘려 넘겼다.
“세아랑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주면, 그거만 해도 갚고도 남아. 내가 너한테 그렇게 많이 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는 저랑 걔 사이니까 교수님한테 따로 보답해드릴 거예요. 정말로요.”
그즈음 우리는 3층 끝에 이르렀다. 눈앞에 마지막 방이 보인다. 오후 3시 58분. 유해빈이랑 세아는 더 걸리려나······. 다행히 곧 오른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으아아!”
덜컥-!
문을 세차게 열어젖힌 유해빈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함께 온 세아는 비교적 표정이 차분했으나 이마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죽는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떤 유해빈이 묻는다.
“저 방만 남은 거죠?”
“그래.”
오후 3시 59분.
마지막 방 문고리에 손을 댄 내가 대표로 말했다.
“연다.”
“빨리 보고 나갈래. ······여긴 다시는 안 올 거야.”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세아가 선언했고, 나는 내심 대비하며 마지막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
붉은빛이 우리에게 쏟아지는 가운데,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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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4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10월 31일 오후 4시까지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 이세아, 유해빈을 이끌고 ‘악마의 집’ 마지막 방에 도달할 것
-클리어 보상: <킬 더 이블> 4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 세부조정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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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가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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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수동발동형 특성 ‘파헤치는 손’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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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빛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째서 애들을 여기로 이끄는 게 서브 퀘스트씩이나 됐는지도.
머지않은 거다.
십 년 만에 이 세상에 발생할, 두 번째 대균열의 출현이.
***
오후 4시 50분.
마나랜드의 마력 전투 체험관을 빠져나오며 진유리는 의문을 되뇌었다.
‘그거 진짜 뭐였을까?’
한 시간 전 악마의 집에서 목격한 현상. 붉은빛이 들이닥친 순간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시설이랑 관련 없는 거 같았는데.’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낀 거다. 이세아도 비슷한 의견이었고.
‘근데 교수님은 아니라고 하시니까.’
이도진의 분석으로는 시설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란다. 당연히 고등학생 둘보다 그의 말이 훨씬 설득력이 높고.
관리 직원의 말도 같았다. 마법에 이상이 있었고, 불편을 끼쳐 대단히 죄송스럽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수긍이 안 된다.
‘쟤는 그냥 넘기려고 그러나?’
진유리는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는 이세아를 봤다. 매번 함께 훈련하며 친구의 힘을 실감하기에 알 수 있었다.
붉은빛이 나타났을 때 순간적이나마 이세아의 기세가 월등히 강해졌다. 파르투스와 대적했을 때처럼. 런던에서, 토끼 가면이 소멸시킨 괴생명체와 싸웠을 때처럼.
“후우······.”
한숨을 쉰 그녀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도진이 유해빈과 앞장서 어딜 갈지 정하고 있고, 표정에 전혀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신경 안 쓰시는구나.’
다행히 그랬다.
방금 갔던 체험관은 비각성자가 마력을 활용해서 싸워볼 수 있는 곳이었다.
가상현실에 더해 환영과 감각 마법으로 구현했다는데, 실제 전투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실감이 났다. 넷이 몇 번을 싸운 결과 이도진만 유일하게 전승을 거뒀고.
진유리는 그게 아쉽고 안타까웠다.
‘안 다치셨으면······.’
어릴 적처럼 마력을 모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는 얼마나 강한 각성자가 됐을까. 영웅인 부모님만큼이나 훌륭하게 사람들을 지키며 싸워나가지 않았을까.
혹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도진 개인으로선 비극이지만, 세상을 위해선 그 비극이 이로웠다고.
그가 진행하는, 향후 진행할 마학 연구들이, 헌터로 활동하는 것보다 더욱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사실이건 아니건 몹시 화가 치밀어오르는 주장.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는 그녀에게 이도진이 물었다.
“다음은 여기 갈까 하는데, 유리도 괜찮으려나?”
“어디 말씀이세요?”
그가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킨다. 사오십 미터 떨어진 곳.
깔끔하게 세워진 건물이 보인다. 그녀 자신도 마나랜드에 와서 가보려 했던 곳이고, 기대에 차 답했다.
“네! 저도 좋아요.”
가까이 갈수록 건물 간판이 잘 보인다. <영웅의 기억>이라는 이름.
저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수호자’ 이시혁.
‘대마법사’ 정세빈.
그리고 다른 영웅들까지.
<영웅의 기억>.
36 영웅들이 과거, 실제로 치른 전투와 발자취를 구현한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