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Chapter 49. 마나랜드 (4)
“와······.”
건물에 들어선 진유리는 감탄하며 내부를 둘러봤다. 넓고 잘 꾸며진 로비에서 세 곳의 방으로 연결된 구조. 마나랜드의 최고 인기 시설답게 구경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저마다 입장할 방으로 걸어가고 있다.
왼편의 방은 <영웅의 일상>. 영웅들의 유년 시절, 또 악마와 싸우면서도 때로 웃으며 지낸 나날을 기록한 장소였다.
중앙은 <영웅의 각성>. 36 영웅은 위기를 맞이한 순간, 자신의 한계를 깨고 한층 더 성장해 갔다. 이 방에서 그걸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겪고 무엇을 이겨냈는지.
끝으로 오른편 방의 이름은 <영웅의 구세>. 이곳은 앞선 두 방과 다르다. 오직 하나의 기억이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모든 영웅이 등장한다.
그들의 마지막 싸움. 마왕을 쓰러뜨리고 악신마저 소멸시킨,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전투를 기리는 장소니까.
진유리를 비롯한 네 사람이 들어가려는 방도 그곳이고.
“너무 오래 걸리니까 다는 못 보겠고 저기가 나으려나?”
“응.”
“음······ 그렇게 해요.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요.”
“저도 괜찮아요.”
이세아와 유해빈에 이어 진유리도 이도진의 제안에 동의했고, 긴장된 걸음으로 문을 넘은 직후.
스아아아아아-!
시야에 비치는 세상이 바뀌었다. 다른 감각도 달라졌다. 쩌렁쩌렁한 함성. 흙과 풀 내음이 선명하게 난다.
“아······.”
드넓은 대지와 아름다운 자연. 여기가 어딘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사 시간에 배웠고, 실제로 와본 적도 있어서.
‘미래 섬.’
한국과 비교적 가까운 북서 태평양의 섬. 세상의 운명이 두 번이나 결정된 곳.
이곳에서 인간과 악마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시혁과 정세빈이 대균열을 막아냈다.
그걸 떠올리며 진유리는 위를 살폈다.
쿠아아아아아-
어둡게 물든 하늘, 악마와 몬스터 군단이 흉험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 칠흑 같은 마기를 전신에 휘감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자들도 있다. 악마의 군주인 마왕.
도합 열이었다.
가이어, 누엔, 데유브, 모시즈.
블라셰, 엘레나, 조네티아.
챠브, 카르딘, 티엘사.
당연한 말이지만 죄다 엄청나게 강해 보였다. 진유리가 여태 직접 본 존재 중 최강은 ‘영원한’ 파르투스. 그와 대등한 자들이 열이나 모여 끔찍한 마기를 발산하고 있다. 마법적인 환영인 걸 알지만 순간적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때 빛무리가 나타났다.
위유우웅- 스아아아아!
대지 곳곳에 일어난 빛이 사람의 형상으로 바뀐다. 마왕의 대적자인 영웅. 그들과 함께 싸운 헌터들까지.
드디어 <영웅의 구세> 등장인물이 다 모였고, 장난기 어린 인상의 청년이 나선다. ‘곡예사’ 윤의성. 이십여 년 전의 그가 촐싹거린다 싶을 만큼 들뜬 어조로 물었다.
“진짜 내가 한다?”
모두 웃으며 그러라고 답하자 그가 재차 묻는다.
“대사도 내 마음대로 칠 거다? 이거 기록 다 남고 나중에 영화화도 될 건데, 그때 가서 딴소리 말고-”
“어서 하든가 빠지든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한 청년이 핀잔을 줬다. 체격이 장대하고, 나이가 많지 않은데 뭔가 근엄한 분위기. 젊은 시절의 한태강이었다.
“아니, 왜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합니까······.”
짐짓 서운해하며 투덜댄 윤의성이 걸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표정이 바뀌어 간다. 웃음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그 나이대 청년에서, 악마 군단을 목전에 두고도 당당한 영웅의 얼굴로.
오른손을 힘껏 치켜들며 그가 외친다. 두려움 따윈 단 한 점도 비치지 않는 목소리로.
“자, 드가자아아아아-!!!”
마침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인간과 악마의 최종 결전, <영웅의 구세>가. 그 광경에 진유리가 느낀 감상은 단출했다.
‘진짜 세다······.’
파르투스와 샬럿 테이트의 싸움만 해도 어떻게 저만큼 강하고 저렇게 싸울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건만 이건 그조차 넘어섰다. 당시와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수준에, 규모 면에선 오히려 훨씬 거대한 격전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으니까.
콰아아아아앙-!
염의준이 뻗은 주먹이 국지적인 태풍을 일으키며 악마와 몬스터를 휩쓸어갔다. 고층 건물 한둘쯤 가볍게 부술 수 있는 규모. 거기에 갇힌 적들이 모조리 분쇄됐고, 그가 적들을 응시하며 묵묵히 뇌까렸다.
“여기서부터 한 놈도 못 가.”
이어서 흰머리를 찾아볼 수 없는 남자가 손을 휘젓는다. 노인이 아니었던 심정웅. 그의 초록빛 마력이 반경 수십 미터 범위까지 퍼지며 적을 무력화했다.
“백 마리든 천 마리든 얼마든지 와라, 여기에 이 심정웅이 있다!”
스승의 활약상도 보인다.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샬럿 테이트가 하늘을 쏘다니며 수십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그녀 곁에 아르노 뒤레와 안드레이 일린이 함께했다.
“로티, 조심해!”
아르노 뒤레가 손가락을 튕겼다. 쿠아아아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갈라지며 적들이 길을 잃었다. 틈을 노린 안드레이 일린이 돌격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가 다다른 곳마다 몬스터와 악마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제 샬럿 테이트가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저 멀리 여전히 하늘에 떠서 관망만 하는 마왕 몇 놈에게.
“거기 너희! 고고한 척하지 말고 자신 있으면 아무나 내려와 봐.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혼자서는 어렵다.”
“같이하자고, 같이.”
안드레이 일린과 아르노 뒤레가 옆에 선다. 염의준과 심정웅이 합류했고, 다섯 영웅이 한 곳을 노려본다. 의뭉스러운 표정의 마왕 데유브. 그녀가 하강하며 일렀다.
-너희 다섯과 홀로 맞서야 한다면······ 그렇구나. 이 자리가 나의 무덤이 되겠어.
‘현명한’ 데유브. 영웅들조차 대면할 때마다 께름칙했다고 증언한 마왕. 그녀가 불길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리될 일은 없을 것이야.
크아아아악! 와아아아!
몬스터 군단이 그녀를 호위하려 들이닥친다. 각성자들이 막는다. 영웅의 싸움을 방해할 수 없도록,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며. 벅차오르는 마음에 숨을 길게 내쉰 진유리는 다른 곳을 봤다. 한태강이 싸우고 있다.
힘과 기술은 현재가 더 강할 테지만 실전 감각은 이때가 월등했던 최전성기의 무신. 물경 백여 마리의 몬스터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서.
꾸욱, 한태강이 오른손 주먹을 쥔다. 단지 그뿐이었다. 퍼억! 퍼어엉! 겨우 그 동작 하나만으로, 그를 포위하던 몬스터가 절반이나 폭사했다.
그르륵······ 캬아아악!
겁에 질린 적들이 뒷걸음질한다. 그가 말없이 걸으며 이번엔 왼손을 쥐었고, 이제는 살아있는 몬스터가 없었다.
그러나 놀라운 신기를 보이면서도 무신은 시시한 자를 눈에 담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정면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다.
한태강보다도 체구가 크며 그에 못지않게 과묵한 인상인 마왕.
‘강고한’ 카르딘. 순수하게 주먹으로 겨루는 싸움이라면 마왕 중에서도 최강.
그가 기꺼워하며 말한다.
-덤벼봐라, 내 제자야.
진유리는 살짝 놀랐다.
‘저거 진짜로 한 말이구나······.’
36 영웅을 다룬 영화나 소설 등에서는 저 대사가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었다. 누군가는 거짓이라 했고, 누군가는 실재했던 일이라 했다. 마왕이 영웅을 제자라 칭하는 자체가 모욕이라고 격분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게 세 번째였지?’
카르딘과 한태강은 그 생애에 걸쳐 총 세 차례나 사투를 벌였다. 기실 첫 번째는 대결이라 부를 수도 없이, 한태강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싸움. 그러나 두 번째 대결에서 그는 반년의 답보 상태를 깨뜨리고 크게 발전했고, 지금이 세 번째. 카르딘이 주먹을 쥐며 일렀다.
-아쉽구나, 아쉬워. 네가 악마로 태어났다면, ‘우리’가 되어 내 일생토록 이어갈 지기를 얻었을 텐데.
하지만 악마가 아닌 인간이기에, 마왕이 될 수는 없기에, 여기서 쓰러뜨릴 뿐이다. 그렇게 말하듯 카르딘이 주먹을 내질렀다.
쿠아아아아앙-!
공기가 찢긴다.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며 뻗어나간 마왕의 힘이 영웅의 앞까지 들이닥쳤다. 바로 그때.
터어어엉!
무엇도 없던 공간에 생겨난 마력의 방패. 그것이 카르딘의 공격을 막아내고도 건재하게 일렁이며 한태강을 감싼다. 이윽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넘봐?”
진유리는 맑게 외치며 한태강에게 다가온 여성을 봤다.
너무나 예쁜 사람이다. 한세라와 많이 닮았다. 금빛 머리칼에 푸른 눈. 하지만 세련되고 차분한 한세라와 다르게 쾌활하고 활기찬 표정이다.
‘방벽’ 올리비아 윈. 한태강의 연인이자 서른여섯 영웅의 방패. 그녀가 카르딘에게 다시금 경고한다.
“이 사람 손끝 하나도 댈 생각 하지 마. 내 거야.”
그 말에 한태강이 피식 웃었고,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승산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두 사람이 용감하게 걸어간다. 그들이 어떠한 기적을 일궈낼지, 진유리는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도 사력을 다한 싸움이 펼쳐진다.
‘주술사’ 카타세 쇼코.
흰옷을 입은 그녀가 낭랑한 춤사위를 보인다. 허공에 마력으로 빛나는 글자가 새겨진다. 그것이 한 획씩 지워질 때마다 악마 하나의 목숨이 끊어진다.
윤의성이 허공을 뛰어다닌다. 그의 손에서 뻗은 마력이 악마들을 모아 둥글게 뭉친다. 이어진 폭발.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한다.
“너희같이 누구 괴롭히는 놈들은요, 마력을 가질 자격이 없어요.”
‘천궁’ 데보라 디아스.
타앙! 그녀가 높이 화살을 쏜다. 허공으로 솟구친 화살이 지상에 쏟아져 내리며 마왕 블라셰를 요격한다.
‘금빛 수리’ 매기 도슨.
하늘을 자유로이 날다가 때로 급강하하며 내리친 그녀의 손톱이 마왕 누엔의 행사를 방해한다.
‘마탄’ 조셉 레너드와 ‘협상가’ 릭 가델. 마왕 티엘사를 막길 버거워하면서도 그들은 일말의 절망감 없이 싸워나간다.
화아아악! ‘불꽃 사막’ 페드로 카밀이 거대한 화염을 일으킨다. 마왕 가이어가 하찮게 불꽃을 꺼뜨리며 외친다.
-너희 따윈 역부족이다! 레넌을 죽인 놈, 내 앞에 그자를 데려와라!
‘용맹한’ 가이어.
악마의 선봉장이자 가장 강한 마왕. 그가 당장이라도 전장을 이탈할 것처럼 땅을 박찼고, 다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저벅, 저벅.
그의 앞으로 한 여성이 걸어온다. 천천히, 오만하게.
사뿐히 올린 왼손 위엔 마력 구성체가 일렁인다.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있다.
위유우웅-
마력 구성체가 빛난다. 그와 동시에 구현된 1급 마법만 열 가지. 그것들이 전방위로 뻗으며 몬스터 군단을 초토화한다.
그녀가 무심하게 검을 휘두른다.
스아아아악-!
뻗어나간 검격이 채 닿기도 전에 고위 악마 두세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간다.
그걸 보고서, 그제야 가이어가 기뻐하며 명했다.
-네 이름을 읊어봐라.
“묻기 전에 예의를 갖추어라.”
차갑게 되받은 그녀를 보던 마왕이 크게 웃는다.
-좋다, 나는 가이어. 가장 용맹한 군주다. 네 이름은?
“에블린 그레이스.”
명실상부 이 세상에서 세 번째로 강한 헌터. 세계 최강의 마검사, ‘천재’ 에블린 그레이스.
그녀를 필두로 네 명의 영웅이 합세해 가이어와 맞선다.
그리고 그 시점, 진유리는 문득 마음에 조바심이 스며오는 걸 느꼈다.
영웅들이 너무 강해서.
너무 멋지고, 너무 대단해 보여서.
영화나 드라마, 인터넷에서 찾은 영상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절반도 보여주지 못한 거였다. 지닌 힘도, 세상을 구하겠다는 각오도.
‘나도 할 수 있을까?’
저 사람들처럼 싸울 수 있을까. 저렇게 강해지고, 세상을 지킬 수 있을까.
모르겠다. 불안하다. 자신이 훗날 저들처럼 해낼 수 있을지.
이십여 년의 평화가 깨지고 있다. 파르투스의 강림, 테러조직 팬텀의 활동과 영웅들의 잇따른 죽음.
세상이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과거 서른여섯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저 사람들처럼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이도진이 믿어주고 있지만, 샬럿 테이트가 넌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그즈음 변화가 일어났다.
-아아······ 아아아-!
지금까지 참전하고 있지 않던 마왕 엘레나가 구슬픈 목소리를 낸다. 육신이 흐려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겁내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다만 경건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서 간곡히 기원한다.
-내 하찮은 목숨을 바쳐, 이 땅에 그분을 불러오리라······!
쿠오오오오-
본래도 어둡던 하늘이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어간다. 새까만 마기가 일렁이며 하늘의 틈새가 열린다.
그리고 강림했다.
마왕을 탄생시키고, 모든 악마를 지배하고, 균열 너머 세상을 다스리는 악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 정말로 환영 마법이야?’
진유리는 경악과 의문으로 그런 말을 되뇌었다.
저게 환영이라고? 기록된 싸움과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짙은 존재감이었다.
저게 환영이라면.
어설프게 구현한 것뿐이라면.
‘그러면······.’
진짜 악신은, 놈은 대체 어떤 존재였다는 말일까.
‘저런 걸······ 어떻게 이긴 거야?’
아무리 영웅들이 대단하고 강해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런 걸 소멸시키는 게 인간에게 허락된 일일까?
진유리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다음 순간.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나서기 전까지만.
남자는 검을 들고 있다.
여자는 지팡이를 쥐고 있다.
둘 다 외모가 아주 뛰어났다. 자주 보는 사람처럼 친숙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유리가 아는 사람과 닮았다. 지금 그녀 옆에 서 있는 이도진에게 그들의 모습이 절반씩 깃든 것처럼, 꼭 그렇게 닮았다.
“후우······.”
남자가 손에 든 검을 하늘 높이 올린다. 검의 이름은 ‘수호’. 진유리는 저 검을 알고, 주인이 누구인지도 안다.
‘수호자’ 이시혁.
서른여섯 영웅의 수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틀림없이 최강의 각성자.
조금 차가운 인상인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곁에 있는 여성에게 말한다.
“우리 이거 끝나고 결혼할래?”
“갑자기?”
시원스러운 얼굴 생김새에 황당하다는 기색을 담으며 여성이 되묻는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끝나고 진지하게 말해.”
“나 엄청 진지한데.”
“더 진지하게. 만약에 제대로 안 하면······.”
“제대로 안 하면?”
불안해하지 않는 이시혁의 물음. 뜸을 들이던 여성이 입을 뗀다.
‘대마법사’ 정세빈.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마학자이자 최강의 마법사.
손에 쥔 지팡이 ‘태고’를 이시혁의 검에 겹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그러면 프러포즈 내가 할 거니까.”
곤란해하며 웃은 이시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수호검을 내리긋는다.
스아아아아!
빛이 땅을 타고 뻗는다. 드넓은 대지가 갈라진다. 이내 솟구친 빛이 악신에게 닿는다. 온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면서.
휘오오오-!
정세빈이 태고를 떨친다. 이 섬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마력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휘몰아친다. 이시혁의 검격이 그러했듯 세상을 눈부시게 빛내면서.
“아······.”
진유리는 명확히 볼 수 없었다. 그저 정말로 밝고 따스한 빛이라고 생각했고, 확신이 든다. 저런 사람들이라면 이겼을 거라고. 악신을 쓰러뜨리지 못할 리가 없다고.
그리고 빛이 잦아들기 직전.
“어······?”
진유리는 놀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일까? 하늘로 날아올라 악신과 싸우기 전에, 이시혁과 정세빈이 그녀를 본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겠지. 아니면 마나랜드에서 마련한 연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부탁한다.>
<앞으로는 너한테 맡길게.>
왠지 미안해하면서도 부탁하듯 그런 말들이 들려온 것 같다고, 그렇게 느끼면서 그녀는 답했다.
‘알겠어요.’
해내겠다고.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강해져서 세상을 지키겠다고.
그들의 아들에게, 이도진에게 보답하겠다고.
언젠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반드시 그럴 거라고, 진유리는 마음을 다해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