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203화 (203/207)

#203화. Chapter 50. 태고의 수호 (1)

***

건물을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둑했다. 내가 와보고 싶었던 <영웅의 기억>에도 들렀고, 애들 저녁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려면 슬슬 나가야겠는데.

내심 시간을 계산하며 나는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세 사람을 봤다.

“······.”

어째 셋 다 조용하네. 진유리와 세아는 아까부터 그랬고, 일부러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던 유해빈도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슬쩍 나를 올려다본 유해빈이 당황해하며 다시금 말을 꺼낸다.

“와······ 진짜 놀랐어요. 완전 실감 나고 영웅분들 싸우시는 것도 감명 깊었고, 교수님 부모님 두 분도 진짜 멋있으셨고······ 그러니까, 그 지팡이랑 검 있잖아요, 이름이 태고랑 수호 맞죠? 학교에서 배웠는데, 그거 막 빛나면서 엄청······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

“······그냥요.”

표정만 봐도 얘 마음을 알겠다. 혹시 내가 우울해하지 않을까 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은 했는데, 괜히 얘기해서 더 우울하게 만든 거 아닐까 하는 자책감.

게다가 악마의 집에서 본 붉은빛이 뭔지 얘도 눈치챘으니까, 안 그래도 내가 머리 아플 텐데 가만히 있기나 하지 부담만 안겨준 거 아닐까 하는 미안함.

그런 감정들이었다. 며칠 전 홧김에 고백하고 자기가 받았을 상처는, 그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고.

정말 착한 애다. 성격 밝고, 솔직하고, 열심히 하고, 서투르나마 자기 호의와 애정을 표현하려 하고.

다른 사람 대할 땐 애가 벽을 세우지만, 나와 서연희에게, 적어도 우리 둘에겐 유해빈은 그런 애다. 고맙고, 미안하고, 잘해주고 싶은 애.

<고마워.>

“네?”

마력으로 전한 말에 유해빈이 놀라 되묻는다. 옅게 웃어주기만 한 나는 이제 세아와 진유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직 관람차 안 탔으니까 그거만 타고 나갈까? 서울 가서 다 같이 밥 먹고, 유리랑 해빈이는 데려다줄게.”

“······응.”

“네.”

세아와 진유리가 고개를 끄덕여 우리는 대관람차를 타러 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이 작게 보인다. 유해빈이 내 옆에 앉았고, 반대편에 나란히 앉은 둘은 여전히 말없이 창밖만 보는 중. 그 모습에 부드럽게 일렀다.

“잘 만들어놨더라.”

세아와 진유리가 내 쪽을 본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쉽사리 입을 못 떼겠다는 것처럼. 나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간 곳 있잖아. 내가 아는 거랑 거의 비슷하던데.”

정말 비슷했다. 내가 글로 적어낸, 그들이 이렇게 싸웠으리라 생각한 장면들과.

그걸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기쁘고, 슬프고, 미안하고.

영웅들을 존경하는 진유리도, 기억도 잘 안 나는 부모님의 예전 모습을 본 세아도, 나와 어느 정도는 닮은 생각이겠지.

“오늘 실컷 놀았으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공부 열심히 하고, 그렇게 하자. 다음에 또 시간 내서 놀러 가고.”

차마 그런 말은 못 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너희가 본 영웅들처럼 훌륭하게 커나갔으면 좋겠다고, 그 말까지 할 자격은 없어서.

그저 오빠로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만 했고, 진유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교수님은 실제로 보신 적 있으시죠?”

“뭘?”

“그으, 태고랑 수호요.”

“응. 눈 감고 그려도 그릴 수 있을걸? 집에 있었으니까.”

이시혁이 지녔던 수호검.

정세빈이 지녔던 태고의 지팡이.

고유한 무구가 있는 영웅은 그들만이 아니었으나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는 그중에서 압도적이었다.

절대로 파손되지 않고, 담아낼 수 있는 마력의 순도와 총량에 한계가 없었던 수호검. 그 외의 부가 효과도 뛰어났으나 저 두 가지 특징이 수호검을 최강의 무구로 만들었다.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능히 발현할 수 있다는 것.

태고의 지팡이도 수호검에 못지않았다. 나는 내 어머니 정세빈이 태고의 지팡이로 마법을 시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쥐어보기도 했다. 마치 의지를 그대로 실현하는 듯한 감각. 실로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역사상 최강의 각성자와 최고의 천재. 두 사람이 서로를 지키고자 만든 무구. 그 둘과 비견할 수 있는 무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찾고 싶긴 하네.”

십 년 전의 대균열. 이시혁과 정세빈이 사망하며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대균열이 발생한 미래섬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게 둘 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파손되는 게 아닌데.

셋 중 하나겠지. 균열 너머 세상으로 흘러갔거나, 아니면 정말 부서졌거나,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못 찾고 있거나.

홀로그램의 정보로도 답을 들을 수 없었고, 나는 그저 근거도 없이 예감하고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실마리가 나타나리라고.

설마 오늘일 거라고······ 그것까진 생각 못 했고.

+

<킬 더 이블> 4권의 세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2월 19일 오후 9시까지 ‘태고’와 ‘수호’를 단일한 무구로 승화해 소유권을 이양할 것

-특이사항: <킬 더 이블> 4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클리어 조건의 대상은 ‘최종보스’ 이도진이 선택

-대상 목록: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 이세아 총 2인

-클리어 보상: <킬 더 이블> 4권의 네 번째 서브 퀘스트 세부조정 권한

+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태고의 지팡이와 수호검을 단일 무구로 승화하는 게 클리어 조건이다.

기한은 12월 19일까지. 50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발견될 거야. 미래섬이든 다른 곳이든 태고와 수호를 곧 찾고, 그 소식이 나한테도 들릴 거다.

그만한 무구 둘을 합쳐서 더욱 발전시키는 게 단시간에 가능할 리 없으니까. 사실 50일도 지나치게 짧다.

그리고 특이사항.

소유권을 이양하되 누구에게 줄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진유리, 아니면 세아.

이것으로 결정되는 걸까. <킬 더 이블>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세아, 혹은 진유리. 내가 누구에게 무구를 넘겨주느냐에 따라 그게 결정될지도 모른다.

클리어 보상은 네 번째 서브 퀘스트의 세부조정 권한.

그 말인즉슨 12월 19일 오후 9시까지는 네 번째 서브 퀘스트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구를 이양하고 나서, 그다음에야 4권의 최대 사건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확실해. 다만 알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악마의 집>에서 나와 애들이 목격했던 빛무리.

아주 은밀하게 감추고 있었으나 그건 분명히 대균열의 전조였다.

서울에 강림한 파르투스와 맞서 싸웠고, 놈이 건너온 균열을 분석하고, 엿보는 눈과 파헤치는 손을 지녔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오직 마왕만이 발현할 수 있는 초고순도의 마기. 그것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 거였다.

별일 아니라고 둘러대긴 했으나 세아와 진유리도 아예 알아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대균열을 건너온 유해빈에 이르러선 방금 그거 균열 아니었냐고 나한테 물어보기까지 했고.

하지만 왜일까.

왜 하필 전조 현상이 악마의 집 마지막 방에 나타난 걸까. 대균열을 마나랜드에서 열지는 않을 텐데.

윤의성에게 들은 바로, 세 마왕과 얘기한 바로는, 이번 대균열도 과거와 같이 미래섬에서 열 계획이라고 했는데.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세계 각지에서 전조 현상이 나타날 거고, 악마의 집 내에서 발생한 빛무리도 그중 하나일까.

아니야.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머저리 같은 생각이다. 의심해야 해. 세아와 진유리를 겨냥한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누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홀로그램이지만 이것도 논리에 허점이 있다.

놈이 이 세상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최소한 이런 식은 아니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놓고 뭔가를 보여주려 들지는 않는다.

십 년 동안 놈을 겪으면서 내가 추측하기로, 놈에게는 결코 그럴 권한이 없다. 그렇기에 나를 조종해 목적을 달성하려 드는 거고.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상념을 이어나갔다. 뭔가, 무언가 있을 거다. 내가 놓친 게.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빠뜨린 조각이.

대균열의 전조 현상.

하필 이 시점에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가 발견되는 이유.

균열 너머의 마왕, 윤의성, 배신자, 에블린 그레이스.

그리고······.

“아.”

나는 창밖에서 무언가를 봤다. 어둡게 내려앉은 시야에 보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떤 아이의 뒷모습.

오른손으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고, 왼손으로 꼭 쥐고 있다.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는 풍선.

토끼 가면.

그 애를 만나야 해.

내가 추측한 것과 그 애가 관련이 있는지, 연관이 있다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알기 위해서.

그즈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교수님!”

고개를 돌려보니 유해빈이 서 있다. 뭔가 걱정스러워하는 듯한 표정. 세아와 진유리도 의아해하며 나를 보는 중이고, 유해빈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 저희 내려야 하는데요.”

“아, 미안.”

집중하고 있다 보니 관람차 운행이 끝난 것도 몰랐다.

흘끗흘끗 나를 보며 자꾸 걱정된다는 눈길을 보내는 애들과 관람차를 나선 나는 주차장 입구에 도착해 일렀다.

“미안한데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와도 될까?”

“아, 네. 다녀오세요!”

“천천히 느긋하게 오세요.”

“몸에 해로워.”

새된 어조로 답한 진유리와 선선히 답한 유해빈, 잔소리한 세아에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왔다. 일단,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놀러 온 거니까, 애들이 신경 쓰지 않게, 해야 할 고민은 해야 할 때 하는 게 맞아.

“후우······.”

마지막 연기를 내뱉은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애들이 보이고, 가까이 갈수록 표정이 보인다. 놀라고, 화가 나고,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나는 다가가서 애들에게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세아가 대표로 답했다. 무슨 일이지? 그 잠깐 사이에 싸운 것도 아닐 텐데. 의문을 해소하진 못하고 나는 차를 몰아나갔고, 저녁까지 먹고 유해빈을 자기 집 앞에 데려다줄 때 비로소 영문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상한 놈이 붙였는지 모르겠는데, 교수님 차 유리 앞에 누가 쪽지 적었더라고요.>

<뭐라고?>

이어진 대답에 나는 수긍했다. 그야 진유리와 세아가 걱정하고 화날 만도 했겠네.

누가 썼는지 범인을 알 수 없는 쪽지.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연구자가 아닌 선동가가 되려는 겁니까?’라고.

***

10월 31일, 오후 열 시 삼십 분경.

이세아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오빠를 바라봤다.

“15점 만점에 13점. 좀 어렵게 냈는데 공부 되게 열심히 했나 보네?”

“별로 안 어려웠어.”

실은 거짓말이다.

주에 한 번씩 오빠가 내서 풀기로 한 쪽지 시험. OX 퀴즈와 단답형 문제가 대부분이었는데도 굉장히 어려웠다. 요점을 알고 있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 해야 할까.

“오······ 그럼 다음에는 이것보다 훨씬 어렵게 내도 되나?”

“마음대로.”

기분이 좋은 듯한 오빠의 표정에 이세아는 결심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있잖아.”

“응?”

“그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어? 악마의 집.”

심상치 않았는데.

그저 시설 내 마법에 오류가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이도진이 답한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태연하게, 본래 동생을 대할 때처럼 상냥하게.

“응, 아무것도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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