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Chapter 50. 태고의 수호 (2)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말을 이세아는 온전히 믿진 않았다. 파르투스와 싸웠을 때처럼, 런던에서 정체 모를 괴물들과 싸웠을 때처럼, 본래 해낼 수 있는 것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각성. 그걸 악마의 집에서 또 체감했으니까.
다만 왜 거짓말하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숨기는 이유가 있을 거니까. 혹은 오빠도 눈치를 못 챘다면,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니까.
전자라면 원망스럽긴 하다. 런던에서 겪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혼냈으면서, 왜 본인은 털어놓지 않을까.
어린 동생이 미덥지 않아서? 말하는 것 자체가 걱정스러워서? 무슨 마음인지 이해는 되지만, 결국 그녀를 대등한 의논 상대로 안 본다는 거다. 일전에 화해할 때, 위험한 일 있으면 꼭 얘기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그리고 후자. 그가 정체를 깨닫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위험한 현상이었다면? 치미는 불안감에 이세아는 다짐했다.
‘더 열심히 할 거야.’
전자였어도 그녀를 충분히 강하고 성숙하게 여겼다면 오빠가 말해줬겠지.
후자였어도 그를 지켜줄 힘을 갖췄다면 무력하게 걱정만 하지 않을 텐데.
결국 자신이 부족한 게 문제다.
싸움도 그렇게 잘은 못 하고, 철없고, 돈도 없고, 오빠보다 머리도 안 좋고, 고작 고등학생 신분이고, 이것저것 전부 다.
“왜 갑자기 뚱해?”
자제한 건데도 표정에서 티가 났을까. 오빠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옅게 미소 띤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애정. 이세아는 고민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주머니에 구겨둔 쪽지를 보여주면서.
“오빠 담배 피우러 갔을 때, 차에 이거 있었어.”
그리고 다 말했다.
쪽지를 보고 너무 화가 나 찢어버리려다가, 그래도 증거가 될지 몰라서 가져온 것.
근래 정신 나간 인간들이 하는 비난. 당사자 귀에도 들렸을 텐데 신경을 쓰고 있진 않은지.
“그런 일 있으면 절대 안 되는데······ 테러 같은 거도.”
“‘마력만이 기적이다! 못된 사기꾼을 응징하자!’ 이런 거?”
“왜 자기가 말해.”
누구는 조마조마한데 본인은 태연한 게 얄미워서 되물은 말. 오빠가 여전히 웃으며 답한다.
“오빠 바보 아닌데. 그런 의견 있겠지 했고, 대비도 하고 있어. 괜히 나쁜 놈들 엮이면 나만 손해지.”
“나도 손해야.”
“그래?”
걱정하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 짐짓 기뻐하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걱정 안 해도 되고, 세아 너도 겁낼 거 없어. 아르노랑 샬럿이랑 다 상의해서 발표했거든.”
“나?”
“응. 너한테 해코지 못 하게. 조금이라도 위험하거나 다칠 일 없게.”
“······.”
이건 몰랐다. 그녀 자신의 안전도 염려했을 줄은.
뭔가 민망하고 부끄럽다. 이렇게 뭣도 모르는 애니까 의논할 생각을 안 하지, 그런 자책감이 든다.
왠지 얼굴이 빨개진 느낌. 고개를 살짝 숙인 그녀에게 오빠가 부드럽게 묻는다.
“그럼 주차장에서는 이것 때문에 기분 안 좋았던 거고, 악마의 집은 왜? 그것도 뭐 이상한 거 있어?”
“그거······ 시설 문제 아닌 거 같아서.”
나직이 이른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오빠가 답했다.
“너도 그렇고 유리도 그런 말 했으면 나중에 조사해볼게. 근데······ 내가 볼 땐 시설 문제 맞았는데.”
“직접 알아보게?”
못내 망설이다 절반만 꺼낸 말.
본심으론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울 수 없는 오빠는 그런 위험한 일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이기적이라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한데 어떻게 안 건지 그가 조금 나무라듯 이른다.
“오빠한테 위험한 일이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이 위험해. 너도 알지?”
“······말하지 말걸.”
털어놓고 나니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볼멘소리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그녀를 오빠가 다독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오빠 아는 사람도 많고, 최대한 조심해서 알아볼게.”
“아는 사람 누구?”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이세아가 아는 이름도 있고, 모르는 이름도 있었다. 어쨌든 다들 강하거나 똑똑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한데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살아 계셨으면······.’
오늘 <영웅의 기억>에서 뵌 부모님.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였던 두 사람이 여태 살아 계셨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걱정을 덜지 않았을까. 두 분이 해결해주지 않았을까. 이세아 자신과 오빠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몇 년씩 돌아오지 않고, 어릴 때부터 줄곧 사이가 좋았고, 지금보다 훨씬 친하지 않았을까. 불쑥 든 생각에 이세아는 물었다.
“엄마랑 아빠는······ 어떤 분들이셨어?”
앨범 사진으로는 많이 봤다. 오빠에게 많이 듣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떠올릴 추억이 흐릿하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
그래서 이 질문은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 진정한 의미로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시혁, 정세빈, 이도진, 그녀 자신까지 포함한 네 사람. 가족이 함께 지냈던 때를 알고 싶다고.
“어떤 분들이셨냐고?”
작게 되물은 이도진이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그리워하며, 기뻐하며, 굳건한 목소리로 말해줬다.
“오빠랑 너 정말 많이 사랑해주신 분들. 오빠랑 네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분들.”
“······나는 기억 잘 안 나.”
사랑을 받은 것도, 사랑한 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빠가 답한다.
“괜찮아. 기억 안 나도.”
“······.”
“응, 괜찮아.”
마치 스스로, 자신에게 일러주는 듯한 말의 의미를 이세아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안 나더라도 분명 그랬으니까 괜찮다는 걸까? 이제부터 마음에 새기면 차츰 기억이 날 테니까 괜찮다는 걸까?
오빠가 어떤 마음으로 괜찮다고 한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직이, 몇 번이고 괜찮단 말을 되뇌는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그러면서도 그녀가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를 꼭,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는 결의에 차 있는 것 같아서.
딱히 부담스러운 건 아니지만 어쩐지 오빠와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이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씻고 바로 잘게. 오늘은 안마 안 해줘도 돼.”
“진짜?”
“피곤하잖아. 운전도 많이 하고, 계속 돌아다니고.”
“별로 피곤하진 않은데. 그리고 너 보통 이럴 때 무조건 해 달라고 하지 않나? 오늘은 웬일이래?”
‘너 원래 그렇게 오빠 생각해서 참을 줄 아는, 그런 기특한 애 아니잖아’라는 논조(이도진의 의도야 어쨌건 그녀가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의 말. 그걸 듣고 이세아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기껏 배려해주려 했는데 자기가 걷어찬 거니까, 이러면 거리낄 것 없이 당당히 요구해도 되겠지. 그녀는 은근슬쩍 머리를 굴리며 답했다.
“난 진짜 안 받아도 되는데······ 굳이 해주고 싶은 거면······ 그러면 해줘도 돼.”
“응?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내가 언제 해주고 싶다고-”
“대신 오빠가 자원한 거니까 안마권 안 쓸 거야.”
“아니, 저기요. 우리 처음부터 다시 좀 얘기를-”
“나 금방 씻고 올 거니까 오빠도 빨리 씻고 와.”
사뿐히 통보한 그녀는 방으로 총총 걸어갔다. 오늘은 워낙 밖에 오래 있던 터라 이대로 받긴 싫어서.
등 뒤에서 오빠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는 건 모른 척. 실은 진심으로 기분이 상했나 귀를 쫑긋 세우긴 했으나 다행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녀 자신은 기분이 아주 좋고.
‘잘 될 거야.’
이세아는 확신처럼 자신에게 일렀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할 거고, 더 강해질 거니까.
그러니 올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집에서 오빠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다른 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오직 그것 하나만을 원한다. 그러니까······.
‘뺏어가지 마.’
수신자가 확실치 않은, 아니, 정확하게는 세상 전체에다 부탁하고 싶은 말. 안마를 다 받은 이세아는 평소처럼 풀린 심신으로 나른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난 아침. 거실로 나와보니 집 안이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오빠? 오빠!”
목소리를 크게 해서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오빠 방에도 가봤으나 바쁘게 집을 나선 흔적만 보인다.
무슨 일일까. 말도 없이 어딜 나간 걸까. 점점 더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고서야 그가 외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빠에게서 온 메시지. 요약하면 이런 말이었다.
십 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던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오빠와 그녀에겐 부모님이 남긴 유품. 그 두 무구가 미래섬 해안가에서 발견됐다고.
***
11월 1일, 한국 시각으로 오전 여섯 시경. 미래섬에 세워진 대균열 연구소 입구에 빛무리가 일었다. 이내 나타난 사람. 서울에서 이천 킬로 이상 떨어진 이곳까지 초장거리 공간이동으로 날아온 서연희가 나를 보며 말한다.
“도진이 오랜만이네.”
“네.”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도합 삼십여 명. 그중 영웅만 해도 여덟 명이다.
한태강, 윤의성, 원가륜, 카타세 쇼코, 매기 도슨, 아르노 뒤레, 샬럿 테이트, 마지막으로 도착한 서연희까지. 당장 올 수 있는 영웅은 전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한 파급력이 있는 거다.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이시혁과 정세빈의 무구에는.
내 옆에 서 있는 세라를 슬쩍 바라보던 서연희가 물었다.
“어디 있니?”
“연구소 안에요.”
“같이 가자. 안내해줘.”
“이야, 우리한테는 인사도 안 해? 이거 선배 대접을 어떻게 하는 건지, 원.”
윤의성의 불평을 받아줄 사람은 없었고, 나는 걸으면서 서연희에게 설명했다.
“두 시간 전쯤에 갑자기 발견됐다고 해요. 섬 해안가에서.”
“해류에 떠밀려 왔다고?”
“그건 모르겠어요. 누가 놓아둔 건지, 아니면 우연히 발견된 건지.”
“상태는 어때?”
내가 답하기 전에 윤의성이 끼어들었다. 무척 아쉬워하는 말투로.
“글쎄, 겉보기도 그렇고······ 내부도 우리가 알던 거랑은 다르던데.”
꼴에 나를 의식해 순화한 말.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를 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윤의성의 말을 무시한 서연희에게 나는 간단하게 일렀다.
“좀 많이 안 좋아요.”
스윽- 건물 문이 열리고 우리는 중앙의 연구실로 향했다.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둘 다 우선 그곳에 보관해뒀다.
그리고 중앙 연구실에 들어가 두 개의 무구를 본 서연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면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있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지극히 아름다웠던 검과 지팡이.
그것들이 산산이 부서지기 일보 직전으로, 단지 숨만 붙어 있는 환자처럼, 연구소의 마력을 통해 공중에서 일렁인다.
“잠깐 확인해볼게.”
서연희가 손을 뻗는다.
스으으으-
붉은 마력이 일었고,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앞에서 멈췄다.
파시시싯-!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다. 연구실에 자리한 사람들이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고, 윤의성이 기겁해 외친다.
“야! 너 뭐 하냐! 아예 박살을 내려고?”
스으으으······.
빛무리가 잦아들며 스파크도 사라졌다. 이내 뒤돌아 우리를 바라본 서연희가 단정적으로 일렀다.
“이대론 보관하나 마나겠네요. 도진이 집 장식용으로 쓰던가, 아니면 도진이가 허락한다고 치면 박물관에 놔두던가. 둘 다 무구로서 이미 수명이 다했어요.”
“허······ 나 참, 우리가 그걸 몰라서 말 안 하는 줄 아나. 넌 애가 왜 그렇게 삭막하냐. 도진이 기분 생각 안 해?”
“누군가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본인도 알고 있을 거고요.”
딱 여기까지만 대응하겠다는 듯 윤의성에게서 차갑게 고개를 돌린 서연희가 이제 나를 보고 묻는다.
“너도 알고 있지?”
“네, 복구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방법이 없다.
엿보는 눈으로 봐도, 내가 아는 마법 지식을 동원해봐도,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를 원상태로 돌릴 수단은 없다. 버티지 못할 거야. 어쭙잖게 손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서연희가 다시금 묻는다.
“그러면, 도진이 넌 어떻게 하고 싶니? 네가 결정해야 할 문젠데.”
둘 다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무구지만 엄밀히 소유권을 따지자면 내게 있다.
어떻게 활용하건, 집에 가져다 놓든 박물관에 기증하든, 내가 뭘 하든 조언 수준을 넘어서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미리 상의한 대로, 나는 서연희에게 물었다.
“복구가 안 된다면······ 합치는 건 가능할까요?”
“어떤 식으로?”
서연희가 되물은 말. 윤의성을 비롯해 좌중이 술렁였고, 모두 내 말에 집중하는 가운데 나는 진정한 목적을 꺼냈다.
“수호검이랑 태고의 지팡이 둘을 하나로 합쳐서, 본래보다 강한, 단일한 무구로 만들어내려고 해요.”
역사상 최강의 무구.
누구도 그 말에 이견을 달 수 없을 만큼 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