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Chapter 50. 태고의 수호 (4)
“후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들리는 한숨 소리. 이내 한태강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여태 그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여러 번 봤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랑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뭐랄까, 평범하게 놀라고 화낸다고 해야 하나.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상해도 실제 내가 볼 때 그랬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보기 드문, 거의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 모습을 봤다. 세라가 당황해서 흠칫하고 있다.
“······.”
치익- 손만 슬그머니 뻗어 담뱃불을 끄면서 시선은 아버지를 본다. 차분하지 않고 떨리는 눈빛. 마지막 남은 연기가 피어오르다 다 사그라들 때쯤 한태강이 우리 앞에 멈췄고, 세라와 나를 번갈아 보며 다짜고짜 묻는다.
“이게 뭐냐.”
딱 그 말뿐이었다. 척 보기에도 전혀 몰랐던 듯한 눈치인데.
하기야 세라가 굳이 말 안 했을 것 같다. 미성년자 때는 원래 안 되는 거고, 성인이면 일일이 보고할 필요까진 없는 거고.
그러니까 걸려도 크게 안 떳떳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이건 순전히 자식 입장이겠지. 충격에 찬 아버지에겐 머리 좀 컸다고 대드는 불효자식의 논리일 뿐이다.
그걸 아니까, 한태강이 딸 담배 피우게 만든 범인이라고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 쏘아보는 나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고.
“날씨가 좋네.”
갑자기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연희가 우리 쪽에서 몇 걸음 떨어지더니 바다를 본다. 진짜 치사하네······. 수습 도와줄 수도 있잖아. 어떻게 자기 혼자 쏙 빠져서는-
“그냥, 도진이랑 싸울 때 얘가 피우라고 줘서 몇 번 피우다가, ······그렇게 됐어요.”
“······.”
나는 귀를 의심하며 세라를 쳐다봤다. 물론 사실이기는 한데, 이걸 진짜 나 팔아넘긴다고? 엄밀히 말해서 먼저 달라고 한 건 너고, 너 그렇게 핑계 대고 변명하고 안 그러잖아. 잘못한 건 인정하고, 깔끔하게 그러고 마는 애잖아.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눈빛으로 보낸 항의와 해명 요구는 세라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얘 아예 나 안 보고 있으니까. 그저 모른 척하며 아버지 대답만 기다리고 있다. 결국 한태강의 서슬 퍼런 눈길이 내게 집중됐고.
“후······.”
무거운 한숨. 한태강이 두어 번 입을 떼려다 다문다. 그대로 묵묵히 나를 응시하다가, 세라까지 보면서 짧게만 일렀다.
“적당히 건강 생각하거라.”
그리곤 몸을 돌려 연구소로 들어가 버렸다. 겨우 여유를 찾은 나는 물끄러미 세라를 봤고, 미안해하는 게 느껴져서 오히려 더 얄미운 투로 배신자가 말한다.
“아빠 너한테는 뭐라고 안 하시잖아. 음······ 이해 좀 해주면 안 될까?”
“조용히 해, 이 배신자야.”
“뭐, 인정.”
저렇게 답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하는 수 없이 나는 세라 못지않게 치사한 응징을 떠올려 일렀다.
“앞으로 너 빌려줄 담배 없으니까 네가 사서 피우시면 됩니다.”
“서울 가서 내가 사줄게. 네가 보관하다가 나 하나씩 주는 건 어때?”
“무슨 고등학생이냐고······.”
“왜? 둘이 무슨 일 있어?”
유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편에서 서연희가 다가왔다. 저 천연덕스러운 말투. 뻔뻔스럽게 태연한 표정. 티격태격하는 와중에도 세라와 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말했다.
“당신은 나설 자격도 없어요.”
“조용히 해요, 이 제일 나쁜 배신자야.”
***
서울 시각으로 오후 여섯 시 무렵. 택시를 탄 진유리는 옆자리의 이세아에게 물었다.
“진짜 나도 가도 돼?”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그건 아닌데······.”
살짝 눈을 흘기며 나온 반문에 진유리는 말을 흐렸다. 보고 싶기는 하다.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가장 존경하는 두 영웅이 남긴 무구를 볼 기회니까. 다만 외부인인 자신이 동행해도 되는지 고민인데, 이세아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 따라오지 말라는 소리도 안 할 거고.”
“왜?”
진유리는 아주 약간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본심으로는 무척 기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드러내놓고 좋아하긴 그래서. 이세아가 괜히 퉁명스럽게 답한다.
“안 데려가면 또 진짜로 친구로 생각하냐면서 이상한-”
“으아아앗! 그거 말하지 말라고!”
얼굴이 벌게진 진유리는 급히 말을 끊었다. 잊을 만하면 당시 일을 언급하는 통에 창피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때 기습 공격처럼 이세아가 재차 말했다.
“진짜로 친구로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같이 가서 보려는 거야.”
“아······.”
어색하지만 뭔가 간질간질한 침묵.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에서 내린 둘은 장거리 워프를 할 수 있는 시설로 들어섰다. 요금이 굉장히 비쌌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진유리는 평소 쓰지 않는, 아버지에게 받은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
“계산 내가 할게.”
“오빠가 미리 다 냈다고 했어. 너 오는 거도 같이.”
“아앗······.”
이건 아닌데. 좀 많이 아닌데. 진유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세아가 먼저 걸어 들어갔고, 곧 워프 마법이 가동됐다.
슈아아아아아-!
멀미가 날 것처럼 어지러운 감각. 호흡하기가 힘들고 오감에 몽롱한 느낌이 들 때쯤.
“아.”
어느새 두 발이 단단한 바닥을 밟고 서 있다. 상쾌하진 않은 감각에 이세아도 인상을 찌푸리는 중. 그다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왔네.”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이도진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학교에서 자주 보고 어제는 사적으로 만나서 놀기까지 한 사람. 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한 진유리는 소리 높여 답했다.
“안녕하세요!”
“응, 오느라 수고했어. 저녁 안 먹었지?”
“보고 나서 먹을게.”
나지막이 답한 이세아가 눈빛으로 재촉한다. 진유리 자신과 다른 의미로 긴장된 표정. 마찬가지로 안색을 가라앉힌 이도진이 앞장서며 일렀다.
“그래. 일단 보고, 저녁 먹고 너무 늦기 전에 서울 가면 되겠다.”
연구소 밥이 맛있더라며 가벼운 말을 건네는 그에게 진유리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으, 다른 영웅분들은요?”
“다들 가셨지. 워낙 바쁜 분들이라 오래는 안 계셨어.”
그러면서 오늘 미래섬에 어떤 영웅들이 찾아왔는지 알려줬다. 총 열 명이 넘었다고. 진심으로 고마워한 그가 마저 설명했다.
“아르노는 프랑스에서 처리할 일만 마치고 바로 온다고 했고, 샬럿도 종종 들를 거라던데. 다른 분들도.”
백화점에서 서연희를 대하는 이세아를 보고도 실감했던 거지만 이럴 때 확실히 체감된다. 두 사람이 영웅의 자식이라는 게.
그리고 셋이 함께 걸어서 도착했다. 검과 지팡이를 보관한 연구실에.
“여기야.”
“아······.”
안타까움, 혹은 감탄. 진유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몹시 손상된, 존경하는 두 영웅의 무구. 이세아가 조용히 걷는다.
“······.”
부모님의 유품을 본 친구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도진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괜찮아. 점심때 전화로 말해줬지?”
“합쳐서 새로 만든다는 거?”
같이 급식을 먹으면서 진유리도 들은 바 있었다. 파손된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 아무래도 본래 상태로 복구하긴 어려울 듯하고, 둘을 합쳐 더 강한, 더욱 뛰어난 무구를 만들 거라고.
“해체작업 하기 전에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놔뒀어. 유리도 봤으면 좋겠고.”
“저요······?”
진유리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이세아는 가족이니까 당연히 보여주는 거고, 가르치는 학생일 뿐인 자신에게는 왜?
기쁘냐 기쁘지 않냐를 묻는다면 그야 엄청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진은 더 말하진 않고 다른 걸 일렀다.
“너희 갈 때까진 이대로 두려고. 아, 오빠 오늘은 집에 좀 늦게 들어갈 거야. 새벽 돼야 갈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고.”
“지금 해도 돼.”
이세아의 단출한 대답. 진유리뿐만 아니라 이도진도 놀라서 되묻는다.
“해체?”
“응. 봤고, 기억했어. 우리 때문에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집에 일찍 들어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못내 아쉽고 망설여지는지 오빠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이거 두 개······ 한 번씩만 만져봐도 돼?”
“되지.”
이도진의 승낙에 이세아가 손을 들어 올린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뻗어낸 손길이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에 닿았다. 세게 붙잡지 않고, 끌어안지도 않고,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고만 있던 그녀가 말한다.
“기억은 잘 안 나.”
그래도 눈으로 보고, 손에 대고, 마음에 새겼으니까 괜찮다고, 진유리에겐 친구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때 이세아가 핀잔처럼 던진 물음.
“너 왜 거기 그러고 있어.”
“나?”
“가까이 와서 봐. 보고 싶어 했잖아.”
“······고마워.”
직접적인 재촉에 진유리는 머뭇머뭇하면서도 다가갔다.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를 눈에 담고, 기억하고, 손을 대어봤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궁금했던 걸 이도진에게 물었다.
“새로 만드시면, 이름은 어떻게 지으실 거예요?”
수호검.
태고의 지팡이.
지금은 각각 이름이 있지만 합치면 둘 다 아니니까. 하나가 된 무구를 부를 이름이 필요하지 않나, 자기 일도 아닌데 진유리는 학교에서부터 그걸 고민하고 있었다.
“글쎄, 아직 이름은 안 정했는데. 세아 너는 생각나는 거 있어?”
“······.”
십 초 넘게 고민하던 이세아가 대답 대신 친구에게 책임을 돌렸다.
“네가 말했으니까 너도 후보 말해줘.”
“내가?”
진유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기 온 것도 그렇고, 이젠 무구 이름까지 말하라고? 난처하기도 하고, 하지만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해 그녀는 남매에게 일렀다.
“태고의 지팡이랑 수호검이잖아. 그러니까 그 둘 합쳐서······.”
“합쳐서 뭐?”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엄격히 심사하는 듯한 눈빛의 이세아와 기대하는 표정인 이도진에게 진유리는 마침내 말했다. ‘좀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겸손하게.
“태고의 수호······ 어때?”
“괜찮네. 응, 괜찮다. 이세아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나쁘진 않은 거 같기도 하고······ 뭐, 괜찮은 거 같아.”
이도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해줬다. 이세아는 어렴풋하게 동의. 진유리는 친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얘 아쉬운 거 같은데.’
무구의 이름을 자신이 짓지 못해서.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의견을 구하긴 했으나, 그래도 실은 본인이 이름을 짓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부모님의 유품이기도 하고, 오빠가 만들 무구이기도 하고, 그리고······.
‘자기가 쓸 거니까.’
진유리는 그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새로 만들 무구는 마검사가 사용할 검이라니까.
그 외의 어떤 가능성도 떠올리지 않고 믿었다. 이도진이 만든 무구를 가질 사람은 동생인 이세아라고.
그래서 이름을 자신이 정한 게 조금 미안하고, 꼭 그 정도만 부러워하며 친구를 봤다.
무구를 얻은 이세아는 전보다 훨씬 강해지겠지. 최선을 다해 쫓아가는 중이고 가끔 추월도 하지만,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차이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냥은 안 져.’
결코 무력하게 뒤처지지는 않겠다고 진유리는 다짐했다. 이 섬에 와서 두 사람과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에, 그들의 호의에 느낀 고마움과 애정을 잊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