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Chapter 51. 선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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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리의 의견대로, 새로 만들 무구의 이름은 ‘태고의 수호’로 정했다.
태고의 지팡이와 수호검. 두 무구의 본래 이름을 담아서.
내가 보기에 어감도 좋고 의미도 좋았다.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서운한 눈치인 세아도 그건 인정했고, 말을 꺼낸 진유리야 척 보기에도 아주 기뻐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나는 해체 작업부터 시작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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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수동발동형 특성 ‘파헤치는 손’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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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세밀하게 마력을 끌어올리고, 손의 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으면서 애들에게 일렀다.
“위험한 건 아니니까 이리 가까이 와서 봐도 돼.”
내 말에 세아와 진유리가 주춤주춤 다가온다. 대략 삼 미터쯤 떨어진 거리. 나는 다시금 말했다.
“더 가까이 바싹 붙어서 봐도 괜찮아. 너희 몸이 나보다 앞서 있지만 않으면 되니까.”
만약 애들이 나보다 앞서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먼저 작업하려고 놓아둔 수호검. 현재 이 검과 나 사이에는 문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극히 자그마한 물질도, 공기조차도 흐르지 않는 진공 상태. 그걸 유지하면서 내 마력으로만 구성을 해체해야 한다. 어떠한 의도도 개입되지 않은 순정의 재료들로.
제일 처음 무로 돌려야 할 건 수호검 전체를 보호하는 마력 파장. 이걸 사그라뜨려야 비로소 검을 물리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
“야······.”
“가도 된다잖아.”
말리는 진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아가 내게 다가온다. 그래도 긴장은 되는지 숨소리가 옅게 흐트러져 있고, 이어서 진유리도 한 걸음씩 걸어왔다. 얘는 아예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는데. 집중하는 둘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드디어 마력을 뻗어냈다.
스아아아아- 파지직! 파스스······.
빛무리에 감싸인 수호검이 강한 스파크를 발산하다가 이내 진정한다. 아마 궁금해할 것 같아 나는 애들에게 설명해줬다.
“파장을 따라서 맞춘 거야. 내 마력을, 검이 스스로 내뿜는 마력과 같은 종류로 판단하도록.”
“와······ 와아······.”
무척 놀랐는지 고양이상인 눈매가 휘둥그레진 진유리가 연신 감탄하며 말을 흘린다.
기실 이 지점부터 이미 현실적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역대 최강의 각성자가 만들어낸 역대 최강의 무구니까. 전 세계 마법사를 모두 그러모아도 시도나 해볼 수 있는 사람이 채 열 명을 넘지 못할 거다. 엿보는 눈과 파헤치는 손을 보유한 내가 그중에서도 으뜸이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 위업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별로 안 어려워 보였는데. 대단한 거야?”
“아, 진짜,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 엄청, 엄청, 엄청 어려운 거고, 교수님처럼 이렇게 반발 작용 거의 안 일으키고 하실 수 있는 분 없다고.”
“······너 왜 똑똑한 척해.”
“내가 똑똑한 게 아니라 네가 무식한 거- 아니, 공부를 하도 안 해서 모르는 거잖아.”
“근데 넌 왜 무식한 나랑 필기 점수 비슷해.”
“그거야 너는 얌체처럼 시험 나올 것 같은 것만 공부하니까-”
“그거도 감이고 실력이라면서. 너도 인정했잖아.”
“후······ 너 다음 시험부터는 노트 절대 안 보여줘. 진짜로.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반성할게.”
국어책 읽듯이 서둘러 사과하는 세아와 뻗치는 화를 가라앉히려 하는 진유리. 다투는 건데도 어쩐지 보기가 좋아 나는 웃으며 일렀다.
“한 번에 사그라뜨리진 못하고, 내일 새벽까지 이대로 둬야 할 거야. 이제 지팡이 봐야겠다.”
태고의 지팡이는 수호검보다 좀 더 난도가 높았다. 파싯- 파시시싯! 반발 작용으로 일어난 스파크가 이리저리 튄다. 다만 내가 펼친 배리어에 가로막혀 진유리와 세아에게까지 닿지는 못했고, 마력을 제어해 나가며 나는 정면을 바라봤다.
모두 마음이 아프다.
수호검과 태고의 지팡이가 파손된 것도.
그래야 했던 이유도.
내가 이시혁과 정세빈의, 내 부모님의 무구를 해체하는 것도.
그런 다음에 해야 할 일도.
전부 다, 싫다.
파스스스······.
태고의 지팡이에서 발산되던 마력도 기어이 잦아들었다. 나는 우울하던 표정을 바꿔 웃는 얼굴로 애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기다려야 하니까 밥 먹으러 가자.”
“아, 네!”
“메뉴 뭐 있어?”
“놀러 온 거도 아니고, 이런 데 와서까지 편식하지 말고 있는 대로 먹어······.”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너도 궁금하면서.”
학교에서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는 애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떠 있는 검과 지팡이가 흐릿하게 빛난다. 오늘이 지나면 저 빛마저도 사라지고 말겠지. 내 마력이 무구의 보호 마법과 융화해서, 더 이상의 반발 없이 기능을 소멸시켜버릴 거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지를 떠올리는 건 너무 괴로워서, 그런다고 돌이킬 것도 아니니까, 그저 그 한마디만을 되뇌며 나는 연구실을 나섰다.
한국 시각으로 오후 여덟 시를 지났을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겸해 우리는 미래섬 해안을 한적하게 걸어 나갔다. 밤이 되니 기온이 확 떨어졌고, 바람도 세게 불어서 머리칼이 휘날린다. 이 정도면 밥 먹은 것도 얼추 소화됐을 듯해 나는 애들에게 말했다.
“슬슬 가야겠다. 유리는 내일 학교에서 보고, 세아 너는 기다리지 말고 자. 빨라도 새벽 두세 시는 돼야 집에 가니까.”
“네, 교수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작업 일찍 시작했잖아. 원래는 몇 시에 오려고 했는데?”
‘새벽 두세 시면 기다려볼 만한데?’라고 생각하는 게 훤히 읽혀 나는 재차 강조했다.
“안 늦게 일찍 자. 내일 수업 때 졸면 혼낼 거야.”
진유리가 킥킥 웃고, 불만스러운 눈치로 뚱한 표정인 세아를 데리고 나는 연구소로 향했다. 워프 설비 가동해서 애들 돌려보내고, 휴식 없이 작업 진행한다고 치면-
바로 그때.
위유우우웅-
허공에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자주 보고, 오늘 아침에도 봤던 사람. 서연희가 무미건조하게 땅을 밟으며 나와 애들을 본다. 살짝은 의외라는 표정. 내가 미래섬에 있는 건 알지만 연구소 밖에서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은 몰랐겠지. 나도 몰랐다. 온다는 말을 안 했으니까. 세아와 진유리는 우리보다 훨씬 놀란 것 같고.
“앗,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진유리가 목소리를 높여 인사한다. 세아는 가라앉은 어조로 인사하곤 미묘한 눈길로 서연희를 응시한다.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옷도 사줬다고 들었고, 딱히 경계할 일이 없을 텐데. 어쨌든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아넘긴 서연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잘하고 있나 해서 와봤어. 어디까지 진행됐니?”
“아까 해체 시작했어요. 새벽까지 경과 살펴보고, 간단하게 기반 작업 해두고 서울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서연희가 살짝 입꼬리를 올린다. 워낙 인상이 차가워 비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팬텀 일 하면서 보스로 대할 때도 아닌데 내가 공손하게 존칭 쓰는 게 즐거운 거겠지. 여전히 세아와 진유리에게는 별다른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같이 봐줄까 싶은데.”
“저야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얘들은?”
그제야 서연희의 눈길이 애들에게 향한다. 빨리 보내라는 건데. 물론 표면적으로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무심하게, 흥미가 없이 묻는다는 것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데려다줘야 하는데 잠시 기다려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짧게 답한 서연희가 혼자서 외곽으로 걸어간다.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
“굳이 인사 안 해도 되니까 우리는 가자.”
“그래도······ 그으, 안녕히 계세요!”
진유리가 서연희를 향해 크게 외치고는 허리를 숙인다. 우리 쪽을 향하는 시선에 세아도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이모.”
“······.”
애들은 못 봤겠지만 나는 봤다. ‘이모’ 소리를 들은 서연희의 눈가가 슬쩍 좁아졌다. 의도치 않게 자기가 타격을 준 걸 모르는 세아와 진유리를 워프 시설에서 배웅해주고, 연구소를 나온 나는 그때까지도 바다를 보고 있던 서연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밥은요?”
“먹고 왔어. 그나저나 아까는 예의 바르더니 지금은 왜 그래?”
“하면 화낼 거면서.”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은데. 비밀스러운 관계 느낌도 나고.”
생글생글 웃으며 되받은 서연희가 내게 담배 한 대를 건네고 자기도 한 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치이익- 깜깜한 밤이라 연기는 잘 보이지 않고, 그런 만큼 불빛은 잘 보였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다가, 서연희가 내게 말했다.
“토끼랑 연락됐어.”
“뭐래요?”
“수요일 괜찮대. 장소는 우리가 정하면 되고.”
“누구 오는지도 말했어요?”
“응. 나랑 너랑 세라.”
“반응이 어땠어요?”
“음······ 반응?”
혼잣말로 되물은 서연희가, 짧고 명료하게 답했다.
“기분 엄청 상한 것 같던데.”
***
11월 3일, 수요일 밤.
토끼 가면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인적 없는 폐공장을 걸어갔다.
“······.”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그녀는 꾹 참았다. 가기 싫고,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은 마음도.
‘되게······ 낯서네.’
그를 만나러 가는 건데도 이런 마음이었던 적은 대단히 드물다. 아예 없었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표현이 아닐 거다.
만나는 건 좋은데, 그건 무척 마음이 들뜨고, 기다려지고, 두근두근하고, 좋은 의미로 긴장되는데.
하지만 오늘은 단순히 그런 마음일 수가 없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어떤 질문을 할지 짐작하고 있으니까. 함께 오는 멤버가 누구인지도 미리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복잡한 마음으로, 그러나 발걸음이 멈추진 않아 토끼 가면은 결국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
만나기로 한 사람이 일찍 와 기다리고 있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이도진.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써 얼굴을 가린 팬텀의 보스와, 당연하다는 듯이 이도진 곁에 자리한 여우 가면까지.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맞닥뜨린 장면이 너무 화가 나서 토끼 가면은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무슨 자격으로?’
팬텀의 보스도.
여우 가면도.
무슨 자격으로 저렇게 당당하게 이도진 옆에 있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이해한다. 저들은 모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기에, 그래서 용납이 안 된다.
‘난 이러고 있는데······.’
인정한다.
자신도 잘못했다. 많이 잘못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저들도 잘못했는데. 그녀가 잘못한 만큼, 어쩌면 그것 이상으로-
‘둘 때문이잖아.’
그를 어두운 곳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끌고 간 장본인들인데.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뭐가 저리도 당당한 걸까.
토끼 가면은 따지지 못했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자신도 생각지 못한 쌀쌀맞은 어조로 이도진에게 묻고 말았다.
“부른 이유가 뭐죠?”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를 탓하려는 게 아닌데.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고, 이도진이 묻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고의 지팡이랑 수호검. 너도 알고 있지?”
“알아요.”
“발견된 것도?”
“들었어요.”
오늘 세간에 알려진 소식. 그 일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으니까.
그리고 이제.
이도진이 쓰라리게 부탁한다.
“아니면 아니라고, 사실이면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그럴게요.”
“그 두 개를 미래섬 근처에 가져다 둔 게······ 혹시 너야?”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네, 제가 한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