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3화 (3/296)

<-- 신들의 기묘한 연회 -->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진성은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입어본 적 없는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연회장에 와 있었다. 항상 부스스했던 머리 또한 이시스의 손짓 한번에 말끔하게 이마를 드러내고 앞머리가 올라간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자리는 영 불편한 가봐?"

이시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다리선이 드러나는 와인색 드레스 차림에,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부드럽게 묶어서 가슴 위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3일간 보고 지냈던 것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진성은 제정신을 유지하러 부쩍 애를 써야 했다.

"자, 가자고. 파트너!"

그녀가 그의 오른팔을 확 끌어당겨 팔짱을 꼈다. 말캉한 감촉이 느껴지자 진성의 얼굴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아주 잠깐 '죽어도 좋다.' 고 생각했지만 주신전은 하고 죽어야 했기에 참았다.

"어머, 이시스? 천이백년 만이다! 애!"

이시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가슴 계곡이 드러나는 다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뛰어왔다.

"아르테미스? 몰라 보겠다!"

천년 만의 안부를 물으며 만난 두 여신은 손바닥을 맞잡으며 열심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신들의 재회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인 건 왜일까?

진성은 걸즈 토크의 화력에 못 이겨 슬쩍 뒤로 한 발짝 빠졌다.

"아, 그 아이가 네 계약자니?"

아르테미스가 진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인사해. 하진성이야."

"바, 반갑습니다."

"안녕! 안녕!"

아르테미스가 위 아래로 진성을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제법 똑똑해 보이는 녀석을 뽑았네? 지구에선 뭐하다가 왔대?"

"응. 게임 폐인이야."

'그런 말을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지 말라고요!'

진성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보통의 여자애들처럼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혐오스러워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는 대단한 말이라도 들은 마냥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오오! 정말 대단하다!"

"그치? 그치?"

"……."

대체 신들에게 대단함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아, 얘는 내가 뽑은 계약자야."

아르테미스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에 키가 컸고 호감이 가는 선한 얼굴에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인상이 워낙 좋아서 판매원 같은 일을 하면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천한 존재가 위대한 여신님을 뵙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이시스의 손등에 입을 쪽 맞췄다.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진성은 살짝 감탄했다.

'부, 분명 생긴 건 한국인인데, 어디서 연습이라도 했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는 강율이라고 합니다."

'어?'

그 순간 진성은 온 몸의 털이 삐쭉 곤두서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강율'이라면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스타 프로게이머였다. 발군의 실력으로 5년간 가상현실게임 RPG 장르 내 삼관왕을 수상했으며, 실력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까지 갖춰 아이돌 그룹을 뛰어넘는 두터운 팬 층을 가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 때문에 카오스월드의 베타 테스트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진성으로서는 방송으로만보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 참… 여기 수준이 상당히 높은 모양인데…….'

이시스는 처음 들어본 이름인 듯 눈을 깜박거렸다.

"오오, 생긴 게 무슨 연예인 같네! 뭐 하다 온 아이인데?"

아르테미스가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별 거 아냐. 그냥 어릴 때 게임 좀 했나 봐."

'좀 한 게 아니라 아예 게임으로 먹고 사시는 분인데요!'

"그래도 게임 폐인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이 동네는 게임 폐인이 무슨 구국의 영웅인 줄 아시나!'

강율이 진성에게도 다가와 손을 건넸다.

"그 쪽도 잘 부탁해요. 하진성 씨라고 하셨죠? 우리 즐거운 마음으로 페어플레이 합시다."

"네, 뭐."

진성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작지도 강하지도 않은 기분 좋게 들어간 힘이 느껴졌다. 보통이라면 '오예! 나 강율이랑 악수했다!' 야단 법석을 치며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경쟁자고, 이제 곧 동등한 조건에서 맞붙게 될 것이다.

강율이 카오스월드를 한다니……. 끔찍하게 강력한 적이었다.

이어서 진성과 이시스는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다른 신들과 인사를 하고 다녔다. 절반 정도는 연회와 어울리는 드레스나 정장 차림이었지만, 몇몇 신들은 아주 가관이었다. 민소매에 구멍 난 청바지를 입은 자, 낡은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자, 민망할 정도로 상체가 훤히 드러나는 토가를 입은 자, 뭔가를 착각한 듯 할로윈 복장을 한 자, 심지어 전쟁을 벌이다 막 이쪽 세계로 넘어왔는지 무거운 중갑옷에 피칠갑을 한 자도 있었다.

진성이 떠올렸던 근엄하고도 위엄 넘치는 신의 이미지가 다시 한번 와장창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연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몸에 바짝 달라붙은 가죽 자켓 차림에 안대를 쓴 남자가(믿기지 않지만 그는 자신을 DJ오딘이라고 소개했다.) 댄스타임을 선언하며 대뜸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었다. 그 소리에 맞춰 연회장의 조명이 바뀌며 신들이 흥겹게 몸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으하하…! 정신이 하나도 없네.'

뭔가 신들의 연회라고 하면 고고한 구름 위의 신전에 앉아 향기로운 넥타르를 마시며 세상 다스리는 일들에 대해 논하는, 그런 장면을 떠올렸으나 이건 낯설다 못해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성은 슬쩍 무도회 공간에서 빠져 나와 음식들이 놓여 있는 진열대 쪽으로 왔다.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들이 왔다갔다하며 진열대로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진성은 접시를 들고 육류와 과일 위주로 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1층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럭키, 좋은 자리.'

진성은 체질상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소를 싫어했다.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마블링의 고기를 입에 넣었다. 특이한 고기 냄새 같은 게 나긴 했지만 나름대로 먹을 만 했다. 진성은 한 조각 더 입에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들은 신들대로 춤추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 있었다. 국적으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카오스월드의 종주국이기도 했고 세계 최상위 프로게이머들은 거의 다 한국인들이었다. 실제로 국제 게임 대회를 보면 4강전까지 오른 게이머 전원이 한국인인 경우도 수두룩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의 위상을 느끼는구나. ……하하.'

이번 주신전이 '카오스월드'라는 게임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이상, 게임에 능통한 게이머 출신들이 가장 많아 보였다. 그런데 외국 플레이어들의 경우, 게이머가 아닌 좀 더 다채로운 직업들이 많았다. 사실 카오스월드는 딱히 게이머가 아니더라도 본인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었다. 아마 신의 성향에 따라 뽑히는 계약자들도 다른 모양인 듯 했다.

계약자들은 아직 나라도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인맥 관리나 동맹 제의, 외교 물밑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진성은 아련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네.'

카오스월드의 공개 테스트에서도 저런 외교 작업들은 꽤나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테스터들은 강대국 플레이어에게 몰려가 고개를 숙이며 비위를 맞추기 바빴고, 자신을 동맹에 넣어주기를 바랬다. 반면 약소국 테스터는 오프라인 쉬는 시간에도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심지어 약소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은 테스터의 머리에 음료를 끼얹은 사람도 있었다.

진성은 저런 인맥관리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익숙한 얼굴이 있는지 살펴보는 정도는 했다. 누가 강적이고, 누가 호구인지는 미리 식별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각 또각.

그때 2층으로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사람도 없는 이런 곳을 왜? 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찰랑이는 웨이브 진 오렌지 색 머리카락에, 아이보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어라?"

진성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려 아는 얼굴이었다.

"……유, 유라야?"

"어머, 진성오빠?"

그녀도 진성을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무시냐!"

"호호호, 장난이에요."

그녀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으며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곤 진성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설유라. 진성보다 두 살 어렸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물론 소꿉친구라던가 하는 그런 달콤한 관계는 아니고 엄마들의 회식 자리에서 데리고 온 자식들끼리 알게 된, 그러니까 속된말로 '엄친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 신기하네. 여기서 아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저도요."

그녀가 들고 온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진성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어차피 여기선 아무리 먹어도 살도 안 찐다면서요? 그래서 실컷 먹어두려고요."

"아, 하하……."

그녀가 포크로 고기를 찍어 엄청난 속도로 입으로 휙휙 던져 넣기 시작했다. 그녀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진성의 시선이 잠시 드레스 위로 보이는 가슴 계곡에 머물렀다. 키는 여전히 작았지만 나름대로 볼륨감이라는 것을 갖추게 된 듯했다. 성장했구나, 유라야!

"놀랐어요. 진성 오빠 같은 게 이런 자리에 어떻게 뽑혔대요?"

"……뭔가 중간에 심한 말이 낀 것 같은데. 그러는 너야 말로 어떻게 뽑힌 거야? 네가 가상현실게임이랑 관련 있는 일을 했던가?"

"에이, 카오스월드란 게 무슨 게임 잘한다고 흥하는 장르가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이거죠."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눈을 찡긋했다.

"……네 머리가 큰 거랑 무슨 상관?"

"숨지고 싶어요?"

그녀가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진성은 '미안.' 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잠시 말없는 식사가 이어지다가 그녀가 기습적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오빠, 취업은 했어요?"

윽! 난데없이 강공이다. 진성은 창으로 가슴을 관통 당한 듯 인상을 쓰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자친구는요?"

창이 꽂힌 자리 옆으로 하나가 더 날아왔다.

"학자금 대출은 어떻게 됐어요?"

이어서 결정타가 들어왔다. 진성이 고개를 팍 들어 말했다.

"야! 네가 무슨 우리 엄마냐?"

이런 곳까지 와서 현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깃조각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야 걱정되니까 그렇죠. 기껏 반듯한 대학교 나와놓고는 뜬금없이 휴학을 하지 않나, 자취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질 않나."

"나는 지금 삶에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흥, 남이 보기엔 그저 불안할 뿐이네요. 저러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냅두셔."

진성이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까짓 이 주신전, 내가 우승해버려서 돈이라도 좀 타지 뭐."

"그건 무리라고 보네요."

"너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넌 1층에 안 내려가봐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외교다 뭐다 난리인데?"

"이미 인사는 다 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외교는 확고한 아군 한 두 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답니다."

"호오, 이 짧은 시간에 벌써 밑밥을 깐 거야?"

"제가 한 건 아니고, 계약한 신들 차원에서 계획해둔 일이에요."

신들 차원에서? 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히야, 그거 고급 정보네. 내게 알려줘도 괜찮겠냐?"

그 말에 설유라는 싱긋 웃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헤헤, 그럼요. 진성 오빠는 금방 떨어질 거잖아요."

'……흐흐, 열 받네. 이 녀석!'

========== 작품 후기 ==========

gzmf / 오오오ㅠㅠ 전권 소장독자분이라니, 반갑네요! 이번 작품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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