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8화 (8/296)

<-- 버림받은 자들의 나라 -->

그녀는 통곡을 하며 묻지도 않은 켈타인에서 쫓겨난 이야기에서부터, 새 터전인 어비스에서 열심히 일해 교단을 차린 이야기며, 마녀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느니 흑마술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느니 손가락질 받은 이야기까지 쉴새 없이 늘어놓았다.

"마녀는 고아를 보살펴 주면 안 된다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마녀가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흑마법이 보기 흉한 힘이라는 건 이 늙은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녀는 그저 저 피붙이들이 말라 죽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집으로 데려온 것뿐입니다요! 으흑! 으흑흑!"

"……"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로드가 당황해 하고 있는데 이브가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사실이에요. 저 분이 키운 고아들 중에서는 상회나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다들 아직도 고아원에 종종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고 간다고 해요."

"어? 음, 정말이었어?"

"후후. 윗세계 사람들은 다들 그런 오해들을 하곤 하죠."

그때 고아원에 들어간 줄 알았던 미셸과 라우가 도로 달려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는 노파를 끌어 안았다. '우리 할머니 괴롭히지마!'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로드는 기분이 머쓱해졌다.

'편견, 이었을까?'

로드가 노파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

노파와 헤어지고 나서 로드 일행은 다시 상업지구 거리를 걸었다.

"이브."

"네, 폐하."

"나중에 왕실 자금으로 저 고아원 지원해줘."

이브가 후훗 웃었다.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은 드셨나 보죠?"

"…시, 시끄러워."

"사실 폐하가 잘못한 건 아녜요. 폐하뿐만 아니라 윗세계의 누구나 이 나라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오해하거든요. 여긴 대륙의 모든 낙오자들이 모여든 마지막 종착지. 낙오자들만이 알 수 있는 공감대라는 게 있답니다."

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 왔네요."

"여긴 어디야?"

"연구실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의 연구실이죠."

"……뭔가 상당히 수상쩍은데."

로드는 의문스럽게 중얼거린 것과는 달리 순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브가 일부러 데려왔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흐음. 폐하가 방문할 거라고 연락해 뒀는데 마중 나온 사람이 없군요."

이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세 사람은 우선 계단을 내려가 보기로 했다. 꽤나 깊은 곳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지하라 주위가 어두컴컴해서 그런지, 아니면 미친 과학자들의 소굴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매캐한 약품 냄새가 짙어졌다.

"어서 오시지요!"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 갑자기 벽 옆에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모두를 잔뜩 민감해있던 터라 화들짝 놀랐다.

"높으신 분들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시니 송구합니다! 저는 이 연구실의 책임자, 하버트 웨스트라고 하지요!"

그는 남자의 목에서 나온 게 아닌 것 같은 꾀꼬리 같은 소프라노 음색을 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광기가 느껴지는 번뜩이는 눈빛, 입고 있는 흰 가운에는 피로 추정되는 붉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로드는 그대로 등을 돌려 계단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자, 자, 이쪽으로."

하버트가 앞장서고 나머지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하버트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던 도중 물었다.

"왕실로부터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지요! 폐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방문할 생각을 하시다니… 이런 쪽엔 그다지 관심이 없으셨지 않나요?"

로드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아, 뭐. 어쩌다 보니 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크크크크!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군요."

하버트는 연구소의 이곳 저곳을 견학시켜주었다. 거대한 지하 기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연구소의 규모는 거대했다. 평범한 화학 연구에서부터, 동물이나 몬스터를 사용한 대형 실험까지. 마치 영화에서 보던 세계 전복을 노리는 비밀 연구 집단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끄아아아악!"

"으어어억!"

네 번째 실험실을 나서는 도중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게 무슨 소리지?"

로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아, 인체 연구실에서 나는 소리로군요. 아마 시술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순히 불어버리자 질문한 로드 쪽에서 멍해졌다.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쓰는 건가?"

"하하! 당연하지요. 인체 연구니까요."

"……불법적인 요소는?"

"불법이라! 어비스에서는 간만에 들어보는 단어군요. 까놓고 말씀 드리자면, 시술은 대륙법상 불법이 맞지요. 하지만 실험자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실험에 응하는 겁니다. 아, 물론 실험을 시작하면 조금 후회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크크크!"

하버트가 심취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아아, 저에게 있어서 어비스는 천국이지요! 실험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있고 시체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대륙을 통틀어도 이곳만큼 인체 실험을 하기 좋은 곳이 없을 겁니다!"

"……넌 어비스 출신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전 알란드에서 왔지요! 불법 실험을 하다가 추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난간에 이마를 쿵! 하고 박았다. 모두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신성한 과학에 불법이라는 경계는 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누가 정해준 겁니까! 아무리 이 대륙에 종교의 힘이 막강하다 한들!"

하버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과학은 평등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와 나라에서 인체 실험과 해부를 금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위험을 넘어서! 작은 희생을 딛고 나아가 장막을 들춘다면! 인류는 두 세 명의 목숨으로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교단놈들 보다 과학자들이 인류를 위해 더 헌신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왜 몰라주는 겁니까! 왜!"

"이, 이봐. 진정해."

하버트는 숨을 헐떡이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높으신 분들 앞에서 경거망동하는 모습을 보여버렸군요."

정말로 매드 사이언티스트구나. 로드는 몰래 그의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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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버트 웨스트

소속 : 어비스 과학 연구소

직위 : 연구소장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F)

통솔등급 : (E)

지략등급 : (F)

정치등급 : (C+)*

C+급 정치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광기의 과학자

하버트의 사고방식은 특별합니다. 그는 다섯 살부터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참신하고 독특한 발명품들을 개발해내 왔으며,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점점 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버트의 연구 및 개발의 실패 확률이 늘어나지만 성공 시에는 의외의 추가 효과를 창출해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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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박이다! 이런 허름한 곳에 무려 C+급 영웅이라니……'

로드가 눈을 반짝 빛내며 하버트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양 볼이 패여 있는 볼품없는 외모였지만 갑자기 급 잘생겨 보였다. 역시 남자는 능력이다.

물론 곁에 두기엔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로드는 어떻게든 자신의 세력을 불려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드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이 초야의 과학자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버트."

"예, 폐하."

"우리 어비스에 자네 같은 인재가 와준 건 기쁜 일인데 말이야. 과학의나라 알란드에 있다가 여기에서 연구를 진행하려니 뭔가 불편한 점은 없나?"

"네?"

하버트가 로드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는 국어책을 읽듯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입 발린 말을 기대한 게 아닌데요!'

과학자 주제에 사회생활을 할 줄 알다니! 하지만 로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하버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게! 응?"

"……"

"하다못해 장단점이라던가 하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하버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물론 여기가 실험체를 구하기 쉽고 쓸데없는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점은 좋지만…… 역시 알란드 쪽의 시설이 더 낫기는 하지요. 기술도 더 발전해있고, 최신 기구라던가 특수한 연구 재료도 금방금방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힘으로 일일이 해결해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다고나 할까요."

"흐음, 그래?"

쿡 찌르니까 아주 술술 나온다. 로드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척 하다가 말했다.

"그럼 과인이 알란드에 다리를 놓아줄까?"

"……예?"

하버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혼자라면 무리겠지만, 과인의 힘으로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알란드와 접촉시켜 줄 수 있네. 자네는 대충 어비스를 대표하는 기술 고문 정도로 이야기 해. 그리고 알란드와 공식 제휴를 하고 장비라던가 약품 등을 합법적으로 들여오는 거지."

"……!"

하버트가 솔깃한 듯 상체를 기울였다. 로드는 기세를 타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알란드에서도 자네의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정부에서 허용하지 않는 불법 실험의 데이터가 필요하다거나, 특별한 표본이 요구되는 경우가 분명 있을걸세. 자네가 만든 괴이한 작품들을 그쪽에 팔수도 있겠고. 서로의 장점을 활용하는 거지. 윈?윈이라고나 할까?"

"그, 그럼 제가 왕실 소속이 되는 건지요?"

"뭐, 서류상으론 그렇지. 그냥 기술 고문 배지만 달고, 사무실 하나만 왕궁에 들여놔. 평상시에는 네 연구소에서 계속 일하면 돼."

자, 이제 그가 좋아할 것 같은 달콤한 말로 쐐기를 박는다.

"사실 과학에 나라간의 장벽이 어디 있겠나? 모든 과학자들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아까 자네가 말했던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과학이 아닐까? 과인은 그렇게 생각한다네."

"……크흡!"

하버트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니 애는 왜 또 울어? 오늘 몇 명째 울리는 거야? 나.'

"크흐흐흐흐흡! 폐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백 번 천 번 맞지요!"

그의 입이 모터가 달린 듯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아, 저는 잠시 절 쫓아낸 알란드에 앙심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 완벽한 재능을 저 혼자서만 독차지하며 자기만족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편협한 사고가 만들어낸 크나 큰 잘못!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과학자의 재능은 인류를 위해서 쓰여야 하지요! 자, 모두 함께 외칩시다! 과학은 평등하다아아아!"

"평등하다아."

로드가 영혼 없이 중얼거렸지만 하버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그가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틈을 타 로드는 뒤에 있는 이브를 보며 물었다.

"괜찮지? 이브."

"저, 정말로 저 이상한 남자를 쓰실 건가요?"

그녀도 로드의 돌발 행동에 적잖게 놀란 듯 했다.

"능력은 있어 보이는 것 같으니까. 좀 위험한 녀석이긴 하지만 잘만 컨트롤 하면 쓸 만 할거야. 그냥 우리는 기술 고문이라는 감투만 주고, 그 대가로 이거 만들어 달라, 저거 만들어달라 하면서 뽑아먹으면 돼."

"……좀 불안하긴 하지만, 하아. 알겠습니다. 왕궁에 돌아가는 대로 처리해 두도록 하죠."

"좋아."

-하버트(C+)가 소속 가신이 되었습니다.

〈가신 현황〉

주요 가신 : 이브(B), 베아트리체(B), 하버트(C+).

C급 : 1명.

D급 : 4명.

*

"의외네요."

연구소를 나오며 이브가 말했다.

"뭐가?"

"저는 왕실과의 연구 제휴 정도를 생각하고 소개시켜드린 건데, 오히려 알란드와의 제휴를 미끼로 저 사람을 왕실로 끌어들일 줄은……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로드는 멋쩍게 웃었다.

"음, 사실 좀 돌발적으로 저질러 버리긴 했지."

"아마 그 사람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거예요. 하아, 시찰 전에 그 부분부터 설명해드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 누군데?"

"…얼마 안 가 만나게 될 거예요. 자, 서두르죠. 둘러볼 때가 많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이브가 앞서 걸어갔다. 로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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