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림받은 자들의 나라 -->
소녀 상단주에게서 벗어난 로드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상업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주거지구였다.
막 그곳의 입구로 들어선 로드는 상업지구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게 다 뭐야? 집인 거야?"
"네."
움집, 아니 막집이라고 불려야 맞을 것 같았다. 주택 터에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흙이나 나뭇가지, 천 등을 두른 형태의 집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명색이 주거지가 임시 야전 천막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로 상태가 나빴단 말인가?
로드 일행은 주거지 중앙에 나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 오니 로드는 어비스가 황무지 지역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느꼈다. 비가 오지 않아 쩍쩍 갈라진 땅들이 군데군데 드러났다. 근처에 밭의 흔적도 있었는데 이미 농사를 망친 듯 구멍만 숭숭 뚫려있었다.
주거지 곳곳에 물이 흐르는 구덩이들도 보였다. 물론 모두 바짝 말라버린 뒤였지만 말이다. 기본적인 식수조차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언더하임의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잡하고 덧댄 천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얼굴에 때가 꼬질꼬질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어느 나라든 어떤 상황에서든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드의 시선은 아이들의 웃는 얼굴에 있지 않았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것을 보니 대체로 영양 상태가 나빠 보였다.
"끄응, 생각보다 심각하군."
언더하임의 상업지구는 그나마 잘 사는 동네였다.
나라의 대다수인 평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이렇게나 나쁜 환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생활하다가 돌림병이라도 돌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주거 환경과 식량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이브."
로드가 이브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폐하."
"왜 집에 아이들과 여자들 밖에 없어? 남자들은?"
"아, 눈치채셨군요. 남자들은 모두 일터에 가있습니다."
"……일터라고?"
로드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다른 나라라면 남자들은 이 시간에 농사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세 시대의 가장 주요한 산업은 농업이니까. 그러나 이런 황무지에서 제대로 된 농경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서 일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부터 그 장소로 가보겠습니다."
이브가 말했다.
*
이브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주거지구의 구석 끄트머리에 있는 동굴이었다.
"……갑자기 웬 동굴? 이런 곳이 일터라고?"
"후후, 일단 따라와주세요."
동굴 통로는 특이하게도 내리막길이었다. 가파른 부분은 중간 중간에 오르내리기 쉽게 계단 형식으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렇게 발가락 통증을 참아가며 얼마나 내려갔을까, 마침내 동굴 통로의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로드의 눈 앞에 웅장한 지하세계가 펼쳐졌다.
"와, 와아……"
로드는 그 거대한 모습에 순간적으로 압도됐다.
"언더하임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이야?"
로드가 서있는 곳은 최상층. 그리고 그 밑으로 수많은 지하층들이 보였는데 아찔함이 느껴질 정도로 깊었다.
"여기가 바로 언더하임의 '테라 광산'입니다."
이브가 설명했다.
"어, 엄청난 규모네."
로드 일행은 천천히 광산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하 중간 중간마다 램프가 달려 있어서 주위를 분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농사도 짓기 힘든 황무지 한복판에 모여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이 바로 이 광산입니다. 철이나 구리 등 흔히 볼 수 있는 광물들은 물론, '테라'라는 특별한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대륙에 얼마 없는 장소죠."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신의 광물이라고 일컬어지며 각종 무구, 마법 장비, 건축물, 심지어 음식에까지 들어가기도 하는 상당히 고가의 광물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죠. 강대국들이 버려둔 쓸모 없는 황무지가 사실은 대륙에서 가장 귀한 광물인 테라가 채굴되는 곳이었으니까요. 어비스의 선조들은 테라를 타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다 광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게 되면서 지금의 어비스라는 국가가 탄생한 거죠."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이 안개가 걷혀가듯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아까 지상에 없었던 남자들은 전부 이 광산에서 일하는 거구나?"
"네, 언더하임의 남자들은 과반수가 광부들입니다. 낮에는 광산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상으로 올라가 집에서 쉬거나 상업 지구에 가서 술을 마시며 노곤한 하루를 위로하죠."
"흐음, 그래서 밤문화가 발달된 거군. 야시장 같은 것들도 있고… 그런데 밤에는 광산일 못해?"
"밤에는 광산에 몬스터들이 돌아다녀서 위험하다는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듣던 로드가 멈칫했다.
"어어? 몬스터도 있어?"
"테라광산 지하에 던전이 있다는 것 같아요. 저는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험가 파티들이 가끔 찾아오거든요."
"히야, 광산이 워낙 크다 보니 던전도 있구나."
길을 가다 보니 중간에 거대한 대장간도 하나 보였다. 대장장이들이 철을 두들기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 옆에는 수건을 머리에 싸맨 여자들이 발판을 밟아 풀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발판이 삐걱거리며 내려갈 때마다 맞은편의 불이 강하게 타올랐다.
"아이고, 고생들 많으십니다."
로드가 선뜻 앞으로 나와 발판을 밟고 있는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으잉? 젊은 청년 같은데 안 내려가고 왜 여��는감?"
"뭔가 쪼매 고급 진 억양 보면 모르겠나? 윗세계 사람이네."
로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맞습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들렸습니다. 아이고, 고생 많이 하셔서 피부 상한 것 좀 봐. 자, 잠깐 나와서 조금이라도 쉬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키야- 젊은이가 아주 인성이 됐구만 됐어!"
"마, 애들도 내 이쁜 건 알아가지고 안글나?"
"헛소리 작작 해삿코 비키라! 남자가 해준댄다아이가."
그녀들이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풀무에서 비켜주었다. 그 자리를 로드가 대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들이 했던 것처럼 천장과 연결된 줄을 붙잡고는 한 발은 지면에, 나머지 한 발로 발판을 슬며시 밟았다.
'아아, 왕임에도 솔선수범하는 모습! 나 자신의 상냥함에 내 가슴이 다 들뜨는구나!'
왠지 자가용만 타고 다니던 국회의원이 갑자기 지나가던 노인의 짐을 뺏어 지하철 앞까지 들어주고는 같이 인증샷을 찍고, 본인 SNS에 '오늘은 나이든 노인 분께서 짐을 힘겹게 들고 가시길래 제가 집 앞까지 들어 드렸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노년 복지 정책 통과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라는 글을 올리며 뿌듯해하는 그런 가식적인 느낌이었지만, 뭐 어떤가.
가식이라도 선의는 선의인 법이다!
'자, 간다!'
로드는 힘껏 발판을 밟았다.
삐걱.
그리고 밟자마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보다 무거워서 발판이 찔끔 내려간 게 고작이었다. 로드는 다시 시도했다. 뭔가 노하우가 필요한 듯 한데 처음 해보려니 어려웠다.
"아따, 젊은이! 고건 고렇게 하는 게 아이다카이."
보다 못한 여자 한 명이 다가와 발판을 꾹꾹 누르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로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저 여자보다 자신의 다리가 훨씬 더 굵은데 어째서 그녀가 하면 쑥쑥 내려가고 자신이 하면 찔끔거리는가? 아아, 이것은 함정이다. 함정에 걸린 것이야.
대장간 쪽에서 '화력이 갑자기 왜 이렇게 약해?' '밖에 뭐 하고 있는 거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실패를 거듭하던 로드가 이 낮 부끄러워진 분위기를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옆으로 베아트리체가 걸어왔다.
"그, 그럼 뒤는 너에게 맡기마! 하하하……"
본의 아니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준 베아트리체에게 감사하며 로드는 재빨리 빠져 나왔다. 여자들과 함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브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신 거예요? 폐하."
로드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체험이랄까. 혹은 아픔의 공유랄까."
"네, 폐하의 쪽팔림은 잘 공유했습니다."
결국 오늘의 히어로는 로드가 아니라 베아트리체였다. 그녀가 발판을 밟자 쑤욱 쑤욱 잘도 내려갔다. 아까 여자들 세 명이 매달릴 때 보다 움직임이 훨씬 컸다. 대장간에서도 '아따! 불 좋다!' '누가 이렇게 힘 잘 쓰노?' 하면서 칭찬 일색이었다. 결국 1시간 작업량을 몇 분만에 해치워 버린 그녀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신명 나는 칭찬과 함께 쓰담쓰담을 당했다.
로드 일행은 다시 대장간을 지나 광산을 돌아다녔다. 이곳도 역시나 다양한 종족들이 공생하고 있었다. 지하 광산이라는 배경과 몹시 어울리는 노움과 드워프들이 보였으며, 이곳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악어 인간들도 보였다. 그들은 갱도에 들어가지 않고 광물을 수레에 실어 나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종족의 특징에 따른 역할 분담도 잘 되어있어 보였다.
로드는 광부들이 직접 일하는 갱도까지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너무 위험하다며 관계자들이 말렸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광산의 겉 부분만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로드는 길을 가던 도중 광부들을 먹일 배식을 준비 중인 모습을 보았다. 로드가 직접 한 국자 떠서 먹어보니 거의 맹탕이었다. 큰 솥에 고기가 겨우 두 세 점 들어가 있는데 저 고기조각이 배식판에 출현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인 셈이었다.
'식량난이 심각하긴 심각하구나.'
대책이 필요했다.
*
일행은 다시 왕궁으로 되돌아왔다. 로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짧았지만 많은 것을 봤고 또 많은 것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로드는 이브가 타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무법자의 나라라는 이름답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거칠고 투박하며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범죄자 출신도 많았지만 그들 모두 로드의 상상 이상으로 질서를 잘 지켜주고 있었다. 이른바 '버려진 자들의 규칙.' 일종의 토착 관습이 법률이 할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과거가 어떻든 간에 국민들 모두가 최후의 터전인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으며, 오갈 곳 없는 자신들을 품어준 이곳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버려진 땅에 정착한 버려진 사람들. 모든 종족과 국적을 초월한 평등의 나라.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나름대로 사람 살아가는 정과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문제점도 많았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막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식량이나 식수가 부족했으며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맹탕 수프를 먹어가며 광부 일을 하는 이 나라의 남자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 비해 생활 환경은 개선의 여지가 없이 너무나 열악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데 왜?' 하는 의문이 생겼다. 로드가 알기로도 테라는 엄청난 값어치를 하는 광물이었다. 테라를 채굴할 수 있으면 이렇게 식량에 쪼들릴게 아니라 어느 정도 사람답게 살만한 환경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로드는 이 이유에 대해서 이브에게 물었다.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테라광산이긴 하지만, 대륙을 통틀어 테라가 잘 나온다는 거지 기본적으로 소량으로 채굴되는 광물입니다. 채굴량에 한계가 있는 만큼 생각보다 엄청난 돈을 끌어 모으지는 못 하나 봐요. 그리고 으음……"
"그리고?"
"……아, 아무것도 아녜요."
'흠.'
로드는 이브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막 에덴에 온 첫날이니 급하게 추궁하지는 않았다.
로드는 '지휘관 창'을 열었다.
지휘관 창은 플레이어들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고 있는 전용 화면으로서 일종의 '컨트롤러' 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 지휘관 창 하나만으로 앉은자리에서 병력을 증강할 수 있고, 건축을 지시할 수 있으며, 가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내정 관리나 외교 활동은 말할 것도 없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현재 어비스의 자원 보유량, 인구, 지지율 등 다양한 수치가 알기 쉽게 표시되어 있었고 우측이나 각종 기능들이 버튼화 되어 있었다. 로드는 그 중에서 '연구'탭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정할 수 있겠지.'
연구 탭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로운 팝업 창 하나가 더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