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14화 (14/296)

<-- 탄탄한 내정은 국력! -->

초반 전략은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사용하는 기습과 같다.

그런데 모든 것을 건 깜짝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저 녀석 초반에 처들어 온다!' 하고 떠벌린다고 하자. 타국이 기습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알고 있다. 기습의 효과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기습의 효과가 줄어든다는 것은 실패의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즉, 전략을 시도하는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그 막대한 '핸디캡'을 신경 쓸 수 밖에 없다. 초반 올인 전략은 양날의 검. 성공하면 초반부터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으나 실패했을 때의 핸디캡 또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지금쯤 자무카는 무척 당혹스런 상황일 것이다.

'오지 마라. 우리 좀 초반에는 평화롭게 지내보자. 제발 오지 마라.'

로드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읊조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로게쓰 쪽에서 '너 죽고 나 살자!'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아로게쓰가 당장 쳐들어 온다면 어비스는 십중팔구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로드는 아로게쓰가 쳐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국들에게 알릴 것이고, 주변국들은 당연히 텅 비어있는 아로게쓰의 영토와 수도를 공격할 것이다. 만약 자무카가 언더하임을 점령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수도를 잃었기 때문에 본전 이하인 것이다.

결국 로드는 네가 지금 덤벼봐야 다른 나라들 좋은 꼴만 시키는 거니까 오지 마라. 하고 무언의 압력을 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드는 채팅창을 닫고 잠시 시간을 들였다가 다시 아로게쓰의 현황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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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국가 아로게쓰

- 아로게스 엑스 워리어 '100' 훈련 중.

- '강화된 칼날' 연구 중.

- 농지 개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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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쓰!'

특화 병종의 훈련 수가 줄어들었고, 궁병 훈련은 아예 취소시켜 버렸다. 하지만 병력의 수만 줄었을 뿐, 아직 전쟁은 포기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로게쓰는 다음 타이밍을 잡을 것이다. 공격 병력 외에 자신의 영토 수비 병력까지 갖추고 주위가 잠잠해지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이빨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일단 당장에 급한 불은 껐구나.'

로드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번 샘이었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어떻게든 어비스를 키워나가야 했다. 뜬금없는 폭로전으로 자무카의 화를 샀으니 다음 공격 대상 역시 어비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외부의 문제가 일단락 되고 나서야, 로드는 다시 국가 내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가장 급한 건 역시 식량문제였다.

로드는 우선 막 왕실에 와 짐을 풀고 있는 하버트를 찾아갔다.

"첫 번째 일을 주러 왔어, 하버트."

로드가 문을 벌컥 열어 젖히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버트는 막 자신이 이사한 사무실의 인테리어를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폐하! 아직 짐을 채 풀지도 않았는데… 왕실은 보기보다 상당히 빡세군요. 그건 그렇고 어떤 일인지요?"

"황무지에서도 심을 수 있는 신 작물이 필요해."

로드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대충 걸터앉으며 말했다.

"맛이고 모양이고 뭐고 상관없으니까 먹을 수 있는 거면 뭐든 상관없어."

"아, 이런! 어떤 이유 때문에 명하시는 지는 짐작이 가지만 제 전공은 식물이 아니라 인체인데요."

역시 튕기는 건가. 하지만 로드는 물러날 생각이 파리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니까! 해야 한다는 걸세!"

로드가 냅다 테이블을 쿵!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하버트의 설득 모드에 들어감에 따라 억양 또한 자동으로 바뀌었다.

"자네, 언제까지 비쩍 마른 실험체만 쓸텐가? 응? 표본의 상태가 나쁘니 연구의 진전이 없을 수 밖에!"

"크읏! 그 사실을 폐하께서 어떻게!"

하버트가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로드는 청산유수와 같은 기세로 밀어붙였다.

"식물 연구라고 얕보지 말게! 이 연구는 자네의 위대한 실험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될 걸세! 영양 상태가 좋은 실험체들은 더 오래, 더 높은 강도의 실험도 버틸 수 있겠지. 아니 그런가? 게다가 이 연구는 인류에 봉사하는 과학의 순수한 취지에 부합한다네! 자네는 지금 연구 성과에 급급하여 과학에 대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버트가 충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때다. 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유 능력을 발동시켰다.

'미안하지만 하버트. 내 고유능력의 1호 실험대상이 되어줘야겠다!'

로드의 고유능력인 '감정 증폭', 현재 품고 있는 감정을 순수하게 격앙시켜 표출하도록 유도하는 정신계 이능. 로드의 눈동자에 보랏빛 마력이 떠올랐다.

그리고……

"크흐흐흐흐흐흐흐흡!"

하버트가 감명받은 듯 입을 가리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폐하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아니, 천 번 만 번 옳습니다! 아아아- 저는 왜 또 편협한 시각으로 식물연구를 하찮게 보았을까요? 식물을 만드는 사소한 연구일지라도 이 봉사의 연구가 인체 실험의 발전을 촉진시켜 궁극적으로 인류의 번영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한걸음이었다는 걸 왜 망각했을까요! 아아아! 역시 과학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자, 함께 외칩시다! 과학은 평등하다아아아!"

"평등하다아-! 아무튼 해 줄 거지?"

그렇게 로드는 하버트의 수락을 받아냈다.

어비스에 심을 수 있는 신 작물의 개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아예 개발에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그렇기에 로드는 빠르게 현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하나 더 섞어서 진행할 생각이었다.

로드가 집무실로 돌아오자 새로운 인물이 대기하고 있었다.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2대8 리젠트 머리에 커다란 뿔테안경을 꼈으며 키는 160중반대로 단신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애니록스 밀러'. 새롭게 개편한 정보부에서 가위바위보에 지는 바람에 임시 정보부장을 맡게 된 인물로, D+급 정치형 클래스였다.

"폐하."

그가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정중한 경례를 취했다.

"아, 왔어? 애니?"

"……애니는 뭡니까?"

애니록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내 애칭인데 불만이야?"

"아, 아니 뭐랄까요, 불만은 아닌데 뭔가 좀 여자 이름 같다고나 할까……"

"에이, 사소한 건 건너뛰고 얼른 보고나 해. 애니."

"……예, 폐하."

그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앞으로 왕실의 모두가 그를 애니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폐하께서 지시하신 언더하임의 쥐 생태의 조사 보고서입니다."

서류를 책상에 올린 애니록스가 혼잣말로 '엘리트인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며 중얼거렸다.

"샘플은?"

"물론 구해왔습니다."

"흐흐. 수고했어. 너도 다음 임무에 합류해."

"……예."

애니록스가 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드는 웃으면서 전에 이브에게 받은 검정 로브를 걸쳤다. 미안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기 전 까지는 가신들이 죽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

벽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서있던 그녀가 로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참 말을 안 듣는다.

"외출할 거야. 가자."

*

호위인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로드가 향한 곳은 상업지구의 천둥새 양계장이었다.

로드가 양계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인장이 한걸음에 뛰쳐나왔다.

"안녕 또 보…"

"오, 폐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엄청난 볼륨에 로드는 하마터면 귀를 막을 뻔 했다. 12등급 반가움이 감지되었다. 물론 그 반가움은 로드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수다 대상이 제 발로 걸어와준 것에 대한 반가움이겠지만.

"아, 알겠군요! 역시 〈천둥새 계란의 과학과 그 이용 2편〉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셔서……"

"그,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은 다른 건으로 왔어."

로드가 재빨리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새로운 사업 제안서야."

"……예? 사, 사업 제안서요?"

얼떨떨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 든 주인장이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했다가 굳어졌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다. 마침내 정독을 끝낸 주인장이 입을 쩍 벌리며 로드의 얼굴을 보았다.

"보다시피 '쥐 농장' 건립 계획이다."

로드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왕실 재정에서 부담할 거야. 저번에 와서 보니까 양계장에 천둥새도 몇 마리 없더라? 그 잉여 공간을 쥐 농장으로 개조하는 거지."

"쥐 농장이라니……! 그런 게 정말 상업성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애니록스의 보고서 '언더하임의 쥐 생태'에 따르면, 쥐들 중에서도 언더하임의 지하에 사는 '던전쥐'는 성숙에 40일 정도를 소모하며 임신 기간은 7일, 한 배에 15마리 가량을 연간 총 10회 정도를 낳는다고 한다. 엄청난 번식력을 가졌으며 다른 쥐들보다 덩치가 커 먹을 수 있는 살점도 많다.

"여기에."

로드가 품에서 하버트가 만든 약품병을 흔들어 보였다.

"성장 촉진 약품을 사료에 섞어준다. 부작용은 딱히 없는 안전한 약품이야. 수명이 조금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고기를 취할 용도이니 문제 없겠지. 그래도 혹시나 다른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하버트랑 다른 과학자들이 꾸준히 검증을 하러 올 거야."

"예? 하버트? 그 미치광이 하버트가요?"

주인장이 '에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자 로드가 덩달아 웃어주며 말했다.

"이번에 왕실에 취업했거든.'

"헐."

"아무튼 그래. 나는 자네가 이 사업에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해. 잉여 공간을 쥐 농장으로 개조하는 것뿐이니까 딱히 초기 예산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쥐들은 워낙 생존력도 강해서 여러모로 신경 써줘야 할 게 많은 천둥새보다 관리도 편하지. 어때? 언제까지 천둥새가 낳는 달걀만 기다리고 있을 거야?"

"크, 크흠……"

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고 뭐 강요할 생각은 없고, 사업을 확장시켜볼 계획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볼게."

"하겠습니다."

주인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정말로 초기 비용은 왕실에서 대주는 거죠?"

"물론이지. 대신 계약서에서도 봤듯이 쥐고기의 유통에 대해서는 왕실이 관여한다."

"국가 사업이니까요. 그 부분은 이해합니다."

협상을 끝낸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로드의 계획은 쥐고기를 국민들에게 싼 값에 납품하여 지금 가장 절실하게 부족한 영양분인 단백질을 보충해줄 생각이었다. 돼지나 소 등의 평범한 가축들을 키우기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그리고 나오는 고기들도 값이 비싸 결국 돈 많은 사람들의 입에만 들어갈 것이다.

일단은 맛이고 뭐고, 로드는 당장 국민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값싼 '국민 음식'을 만들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활성화되면 요리사들에게 의뢰를 맡기거나 던전쥐 요리 대회 같은 거라도 열어서 좀 더 맛의 개선 방안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될 것이다.

식량 다음은 식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강물을 활용하는 건 힘들었다. 근처에 실낱 같은 강줄기가 흐르긴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말라버린 뒤였다. 언더하임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 강이 있긴 했지만, 이 물을 끌어 쓰는 건 현재 언더하임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로드는 상인 지구의 '수인 연합회'에게 새로운 의뢰를 맡겼다. 두더지 인간들에게 지하 수맥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다.

'강물이 안 된다면 지하수를 활용해야지, 뭐.'

그렇게 두더지 인간들의 활약으로, 언더하임 밑에 지하수가 흐르는 수맥을 곳곳에 발견했다. 로드는 그 위치에 새로운 우물 건설을 지시했다.

수맥이 흐르는 곳 바로 아래에 깊숙한 구덩이를 파니 구덩이가 생기자마자 땅에서 물이 샘솟아 올랐다. 다행히 언더하임은 지하수가 제법 풍부한 편에 속했는데, 거대한 규모의 수맥이 흐르고 있었다. 로드는 수맥이 흐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으니 우물을 계속 짓도록 지시해 놓았다.

아직 우물 이외에 지하수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결정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남은 건 군무 쪽인가……'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로드와 베아트리체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언더하임의 경비대였다.

========== 작품 후기 ==========

쿠죠죠타로 / 중간에서 정보 파는 재미가 쏠쏠하죠

플라네타륨 / 그러네요 ㅠㅠ 아쉽습니다

gzmf / 헉 ㅠㅠ 15편 이후로 못보시는 건가요;; 아쉽...

Lgb / 그렇습니다! 영웅들 조차 등을 돌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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