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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5화 (15/296)

<-- 탄탄한 내정은 국력! -->

당황스럽게도, 현재 어비스의 왕은 전쟁이 일어나는 비상 상황을 제외하고는 경비 병력의 통제 권한이 없었다. 로드가 지휘관 창으로 자금을 들여 병력을 몇 명 훈련시켜 보았는데 로드의 휘하인 왕궁 친위대에 소속되는 게 아닌, 언더하임 경비부대로 병력들의 소속이 자동으로 넘어가 버렸다. 아마도 왕의 세력이 늘어날 것을 염려했던 마틴이 지휘체계마저 손을 쓴 듯 했다.

'군사 지휘권이 없는 왕이라니…… 허수아비도 이런 허수아비가 어디 있어.'

"누구십니까? 소속을 밝히시오!"

경비대 건물에 도착하자 경비병 둘이 창을 들어 올리며 로드와 베아트리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야. 나."

로드가 두건을 걷으며 말했다. 경비병이 두려운 표정으로 창을 세워 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가 누구냐?"

이게 말이야 똥이야.

"…너네 왕이다."

"……허, 허어억! 폐하?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곳까지!"

경비병이 반사적으로 경례를 하며 소리쳤다.

"지금 바로 언더하임 경비대장이랑 이야기 하고 싶은데."

"자,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 없어. 들어간다."

로드가 대뜸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경비병들은 감히 로드의 앞을 막지는 못하고(베아트리체가 뒤에서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경비대장이 있는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무슨 소란인가?"

몇 번의 모퉁이를 돌자, 열려있는 방 안에서 노년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 대장님! 그, 그게!"

"반갑습니다. 경비대장."

방으로 들어온 로드가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로드의 얼굴과 뒤따라온 베아트리체를 본 경비대장이 벌떡 일어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취했다. 로드가 경례를 받아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긋해 보이는 나이였다. 백발이 내려앉은 머리에 깊게 패인 주름살, 얼굴 곳곳에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보였다. 하지는 그의 눈빛은 20대 젊은이들의 그것처럼 살아있었다. 한참 손주의 재롱이나 볼 나이에 군무의 핵심 직위의 앉아있다는 것은 남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봐도 좋았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이 쪽에 앉으시지요."

"고마워요."

로드와 경비대장이 마주 앉았다. 경비대장이 차를 내오라고 지시하자 방에 있던 병사 몇 명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밤중에 갑자기 사단장이 들이닥친 것과 같으리라.

로드는 경비대장과 대화를 나누기 전에 스테이터스를 먼저 확인했다. 아직 그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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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스

소속 : 어비스 경비대

직위 : 경비대장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D)

통솔등급 : (D+)*

지략등급 : (D)

정치등급 : (D)

D+급 통솔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기민한 통솔자

한스는 어린 나이부터 경비대에 몸담아 생활해 왔으며 다양한 병사들을 만나고 숱한 사건 사고들을 거쳐왔습니다. 그 연륜과 경험으로 병사들을 의도대로 다루며 병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한 사기를 올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꿰차고 있습니다.

그가 관리하는 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으며 범죄 및 탈영 행위가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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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전형적인 행보관 스타일의 지휘관이구나.'

"폐하께서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셨는지요?"

한스가 물었다. 로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랄까요?"

"이 어리석은 늙은이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밖으로 뛰쳐나갔던 병사가 차를 내왔다. 로드는 찻잔을 받아 들며 '고맙네.'하고 중얼거렸다.

"왕실의 자금으로 병사를 훈련했는데 그 병사들이 모두 경비대의 소속이 되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왕실에서 군 체계를 그렇게 정해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왕실이 아니라 마틴이겠지. 로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결국 허수아비 왕인 과거의 로드 폴렌티아 또한 마틴의 말에 저항할 수 없었을 테고, 이 안을 수락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한스의 말이 맞다.

"경비대는 왕실의 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경비대장께 하나 여쭤볼게요. 경비대는 왕의 군대입니까?"

"경비대는 언더하임을 지키는 병사들이옵니다. 폐하."

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 이것 봐라.

"그럼 질문을 달리하죠. 외침이 일어나는 전시에는 경비대 또한 최종 통치권자인 왕의 명령을 받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로드가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외침이 아닌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 왕에게 저항하는 세력이 있다고 칩시다. 그 세력이 언더하임 내에서 왕을 공격하려 든다면 경비대는 어떻게 움직일 겁니까?"

언더하임 경비대의 병력은 300명이다.

그럼에도 경비대가 3대 세력이 아닌 이유는 철저한 중립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베스트다. 이정도 수의 군대를 품으면 제 아무리 마틴이라 해도 섯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또한 경비대가 이쪽 편을 들어준다면 자원을 투자해 자유롭게 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경비대에 소속이 넘어가도 자신의 군사가 되는 것이기에.

로드는 차분히 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경비대는 언더하임을 지킵니다."

그러나 한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결국 그 말은 철저하게 중립을 고집하겠다는 소리였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건가.'

로드는 맥이 빠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로드가 군 체계를 수정하려고 들면 당장 마틴과 마피아들이 왕실에 들이닥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성과는 절반이구나. 그래도 경비대마저 마틴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게 어디야.'

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스에게 물었다.

"방금 그 말씀,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이 늙은이의 목숨을 걸고 말씀 드렸습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 같군요."

로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베아트리체가 쫄래쫄래 다가와 그의 옆에 붙었다. 젠장, 귀여워.

"다만."

밖으로 나가려던 로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스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비대는 언더하임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겁니다."

*

경비대를 빠져 나와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날이 저물어갔고 은은한 어둠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경비대는 상업지구도 주거지구도 아닌,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왕궁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로드가 돌연 입을 열었다.

"베아트리체."

마치 그림자처럼 로드의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따라오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둘이서 있을 땐 옆에서 같이 걷는 게 어때?"

"……아닙니다."

쑥스러워 하면서도 꽤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로드는 옅게 웃음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저 돌아보는 것 만으로도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

"……하, 하문하시지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로드는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더욱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네."

"정말 유니벨의 말처럼, 나를 증오하는 거야?"

그녀의 토끼 같은 눈망울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 그,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당황함 반 수줍음 반으로 머뭇머뭇거렸다. 놀라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버릇은 이제는 로드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말해봐."

로드가 한발 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입에서 '힉!'하는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진지하게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도로 한 행동인데 베아트리체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듯 했다. 전보다 떨림이 더 심해졌다. 이제는 눈망울에 작게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확실하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가깝게 대면하는 게 더 부담이려나?'

로드가 다시 그녀에게서 몇 발짝 떨어졌다. 그녀의 떨림이 조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아하, 이런 거로군. 로드는 아예 등을 돌려 걸어가 적당히 평평한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고개를 드니 밤하늘 사이로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에 로드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

그렇게 시원한 밤바람을 만끽하고 있는데, 멀리서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암살자에게는 감정이 없습니다."

바로 전과는 달리, 흔들림 없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로드는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감탄했다.

"암살자는 그저 주인의 검. 감정을 가진 검은 도구로서 그 의미를 잃습니다. 주인이 검을 어떻게 다루든, 또 어떻게 관리하든, 검은 주인의 의지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수용하고, 주인의 의지대로 휘둘러질 뿐입니다."

아이컨택을 하지 않으니 비로소 술술 말해주는 구나. 로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암살자의 성향 때문인지 상대방의 등 뒤에 서야 비로소 침착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주인인 내가 감정을 드러내라고 말하면 그렇게 해야겠네?"

"……검은 주인의 명에 반할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검의 성능을 떨어뜨리는 행위임으로 권장하지 않습니다."

"으하하! 철벽이냐."

"철……벽?"

"말이 그렇다는 거야."

로드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했다."

"……"

"예전의 내가 네게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도 못하겠어. 기억이 나지 않으니 속죄를 할 수도 없고, 그러니 네게 감히 용서를 구할 자격도 없지만…… 그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 대답을 바라는 건 아냐."

"……아, 아닙니다. 주인이 검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미안했어."

로드가 말했다.

"앞으로 난 절대로 네게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

"주인님, 그건……"

로드가 등을 돌려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찔 놀라며 다시 수줍음 많은 소녀로 돌아왔다. 로드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뒷걸음질 쳤으나 로드가 더 빨랐다. 그가 팔을 뻗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거대한 공포를 앞둔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게 견딜 수 없단 말이야.'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대화할 때, 그녀는 로드의 눈을 마주 바라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항상, 언제나, 오로지 로드의 오른손에 가 있었다. 언제 그녀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할지 모르는 로드의 오른손은 그 자체가 그녀의 지독한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천천히 노력해나가야겠지.'

로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

베아트리체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주, 주인님?"

"가만히 있어."

로드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벨벳 같은 부드러운 은빛 머릿결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아, 인정해야겠다. 사실 재활은 둘째치고 머리를 쓰담쓰담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베아트리체는 머릿속에서 로켓이 터져버린 듯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로드가 팔을 들어올릴 때 평범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줄 경우의 수 같은 건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로드는 한참을 서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처럼 질리지가 않았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에도 서서히 두려움이 가시며 조금씩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 이런."

로드의 손길이 갑자기 멈추자 베아트리체가 눈을 떠 그를 올려다 보았다. 로드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해버렸네."

베아트리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로드의 입가에 실낱 같은 한줄기 피가 주륵 흐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으와아... 어째어째 15화 까지 달렸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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