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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6화 (16/296)

<-- 탄탄한 내정은 국력! -->

"주인님!"

베아트리체가 무너지는 로드의 몸을 부축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로드의 등 뒤에 단검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끄윽, 으, 끄으으윽! 너, 너무 걱정마.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린 것뿐이니까."

로드가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을 해보았으나 표정은 이미 고통에 범벅이 되어 있었고 입술은 질끈 깨물어서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보였다. 아마 그녀가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간드러진 비명을 내질렀을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뒤로 돌아가 로드의 몸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가 단검을 한번에 쑥 뽑았다. 핏물과 함께 점성이 있는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로드도 참지 못하고 '으하윽!'하는 신음성을 토해냈다.

'……독.'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로드의 상처가 난 부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헉!'

입술이 닿는 감촉이 느껴지자 로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거, 거긴…!'

로드는 지독한 고통과 약간의(?) 쾌락의 경계에서 몸을 떨었다.

베아트리체는 독을 빨아내면서도 연신 사방을 경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단검 하나가 재차 날아왔다. 그녀가 로드의 머리칼을 붙잡아 거칠게 아래로 내렸다.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애무 이후에는 하드 플레이인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로드의 변태 성향은 여전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도 베아트리체는 계속해서 독을 빨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외간 남자의 등에 입술을 박은 채, 손으로는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붙든 채로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꽤나 진귀한 광경이었다.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복면을 쓴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스물, 아니 서른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것도 아직 어둠 속에 숨어있는 자들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였다.

괴한들 모두 못 박힌 나무 몽둥이라던가, 쓸데없이 큰 할버드 등 각기 다른 험악하게 생긴 무기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이 거리를 서서히 좁히며 다가왔다.

"……주인님."

그녀가 로드의 상처에서 입술을 때며 말했다.

"계속해 주… 가 아니라 왜?"

"……아주 잠시만이라도 좋으니까."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귓속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녀의 신형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 어라라?'

졸지에 남겨져 버린 로드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거! 애무와 하드 플레이 다음에는 방치냐! 좋은 조합이긴 하지만 이 상황에선 좀!'

"킥킥! 부하한테도 버림받은 건가? 꼭두각시 왕의 비참한 말로로군."

로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저 괴한들 중 누구의 대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신경을 긁는 말이었다. 등의 상처가 불이 댄 듯 쑤셨지만 로드는 태연한 척 몸을 일으켰다.

"그래. 어디 꼭두각시 맛 좀 봐라."

로드가 목을 뚝뚝 꺾으며 말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전투에 능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졸개들이 상대라면 시간 정도는 끌어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일단은 무력등급이 'D'이기는 하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런 성적을 부여한 시스템을 믿어볼 생각이었다.

'상처가 좀 많이 쑤시고 정신도 오락가락하긴한데… 어떻게든 되겠지.'

괴한 하나가 천천히 로드 쪽으로 걸어 나왔다. 로드는 양팔을 들어올린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걸어오던 괴한이 냅다 달려들어 못 박힌 살벌한 외형의 방망이를 정면으로 휘둘렀다.

후우웅!

로드는 가볍게 스탭을 밟으며 몸을 뒤로 뺐다. 눈 앞에서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방망이가 보였다. 이 틈을 가만둘 이유가 없다. 로드가 번개처럼 달려 들어 괴한의 턱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퍼억!

괴한의 얼굴이 크게 뒤흔들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로드는 두 팔을 들어올린 파이팅 자세를 유지한 채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

"하하, 보았느냐! 다시는 게임 폐인을 무시하지 마라!"

가상 현실에서 수많은 게임과 캐릭터들을 키워가며 각종 전투 기술들을 머릿속에 박아놓은 로드였다. 복싱 정도야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번엔 등 뒤의 후방에서 검이 휘둘러졌다. 로드는 고개를 돌려 검의 궤적을 체크한 다음 휘둘러지는 방향으로 몸을 살짝 비틀었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왕은 잡아봤냐? 이놈들아!"

라고 하면서 앞발의 축을 옮긴 로드가 몸을 회전시키며 괴한의 안면에 발차기를 먹였다. 괴한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느낌이 좋다.'

역시 D급 무력등급의 몸. 생각 한대로 몸이 척척 움직여주는 쾌감은 짜릿했다. 어깨의 상처만 아니면 더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어쨌거나 몸이 생각 한대로 따라준다면 해볼만했다. 적어도 정신만은 숱한 아수라장을 해쳐온 용사였으니까. 깡도 기술도 충분하다.

"다음! 다음은 누구냐!"

로드가 호기롭게 외쳤다.

"전부 쳐라!"

"……으엉?"

괴한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로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게 아닌데.' 게임이든 영화든 이런 식의 막 전투는 주인공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때 로드는 몸이 붕 떠오르는 부양감을 느꼈다. 칼날과 쇠붙이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로드의 몸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나타난 건 양 손에 단검을 쥔 은발의 소녀였다.

"뭐, 뭐야!"

"바뀌었어?"

베아트리체는 괴한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무기의 밭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그녀의 하얀 살갗을 베고 핏방울을 훔치려는 찰나, 그녀의 몸이 마치 묘기를 부리듯 기이하게 꺾이며 무기들을 흘려 보냈다. 그와 동시에 양 손에 쥔 쌍수가 휘둘러졌다. 은빛 섬광이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일렁이는 듯 하더니 각목이 잘려나가고 쇠붙이들이 나가떨어졌다.

쐐애액!

동공 앞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을 고개를 꺾는 것 만으로 피해낸 그녀가 다시 앞으로 크게 한 발짝 전진했다. 오른손의 단검은 직선을 그리며 움직였고 왼손의 단검은 톱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며 대기를 갈랐다. 그녀의 몸이 지나쳐가자 주위의 괴한들이 일제히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주, 죽어!"

뒤로 돌아온 괴한이 그녀의 뒤통수로 쇠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더니,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버렸다.

"헉! 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괴한들이 잠시 멈칫한 틈을 타 베아트리체의 몸이 한 괴한의 다리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쑥 하고 빠져나갔다. 이어서 단숨에 포위망을 빠져 나온 그녀가 어둠 속을 내달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어서 잡아!"

*

"아아아……"

시선은 지휘관 창에, 손에는 한 서류를 든 이브는 퀭한 얼굴로 뜨거운 꿀물을 재차 들이켰다.

'요즘 야근이 잦네.'

주신전이 시작되고 이브는 좀처럼 쉴 틈이 없었다. 로드가 엄청나게 일들을 벌이고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들도 정신 없이 바빴기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쿵! 쿵! 쿵!

"……무슨 소리지?"

한밤중인데 왕궁 복도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한밤의 티타임을 방해 받은 이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 한마디 해주려고 하는 찰나,

쾅!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두 명의 암살단원이 로드의 양 팔을 붙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집무실 소파에 그를 눕혔다. 이미 응급조치를 마친 듯 로드의 상처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무, 무슨 일이죠?"

"습격입니다. 독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

"네에?"

이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어서 다시 집무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베아트리체와 하버트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폐, 폐하! 독에 당하셨다구요?"

하버트가 물었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빨아들이긴 했지만, 소량이 퍼지고 있어요."

"크, 큰일이군요! 어서 제 수술실로 모셔야 합니다!"

하버트의 말에 이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째서 수술실에?"

"그야 폐하의 몸을 시술하여 개조인간으로 만들어 드리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버트가 양 팔을 떨치며 소리쳤다.

"개조인간이 되어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되면 독 같은 건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

"닥쳐요, 하버트."

하버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암살단이 쓰는 해독제를 품 안에서 와르르 쏟아냈다. 이브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해독제군요!"

"……네. 하지만 어떤 독인지 몰라요. 단원 대기실에서 전부 가져왔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로드의 입을 벌리게 했다.

"다 먹이면 이중에 하나는……"

"그럼 죽어요!"

이브가 다급히 소리쳤다. 베아트리체도 하버트의 옆에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브는 한숨을 쉬며 로드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를 짚어보고 상처 부위를 세심하게 살피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독의 성분이 남아있다면 추출해서 해석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아, 여기."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찢어진 옷자락을 건넸다. 빨아들인 독을 이 천 조각에 뱉어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잘하셨어요! 그럼 하버트? 명색이 과학자라면 독의 성분 정도는 금방 분석할 수 있겠죠?"

"그런 건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개조인간 쪽이 더……"

"닥치고 1분줄테니까 해독해 오세요."

"옛!"

군기가 바짝 든 하버트가 천 조각을 들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메이드들이 들어와 로드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다행히 분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의 종류는 들판에 나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독말풀의 일종이었다. 흔한 독이라서 바로 해독제를 찾아 로드에게 먹였다.

해독제를 먹이니 열은 빠르게 내려갔다. 왕실 의원이 와서 괜찮아졌다고 진단을 내렸다. 로드는 다시 잠에 빠져 들었고 집무실에는 이브와 베아트리체만이 남아 로드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독말풀이라면 전문 암살자들이 쓰는 독은 아니군요."

이브의 물음에 베아트리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평상시답지 않게 아주 화가 나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명백한 시해 시도예요. 순순히 넘어갈 수는 없어요. 단장, 습격자들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베아트리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돈되지 않은 전투 스타일, 각양각색의 무기들, 거친 입담. 마피아는 아니고, 전문 암살자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조폭 클랜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이브는 손가락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조폭 클랜이라면 우리 왕실과 딱히 접점이 없을 텐데 어째서……"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로드가 끙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폐하! 괜찮으세요?"

"…어, 응. 한숨 자니까 좀 낫네. 상처는 치유 마법을 받으니 괜찮아졌고, 독은 다 해소된 것 같아."

로드가 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아직 머리가 띵 하긴 했지만 참을 만 했다.

"……주인…님."

그때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등 뒤로 다가왔다. 로드가 돌아보려는데 그녀가 로드의 어깨를 붙잡아 뒤돌지 못하게 했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등 너머로 들렸다.

"왜, 왜 그래?"

로드가 당황하며 물었다.

"……제 탓이에요."

"…어?"

"주인님이 다친 건 전부 제 탓이에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이 감정을 품어서, 방심해버려서…"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흐느낌이 섞여갔다.

"저 따위가, 저 같은 게, 잠시 행복 같은걸 느껴서…… 주인님이……"

그녀는 말을 다 잊지 못하고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자격이 없어요…… 죽여 주……"

"얍."

뒤돌아선 로드가 그녀의 얼굴 앞으로 번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을 내밀면 닿을 것만 같은 지척의 거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뚝 멈췄다.

이어서 로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베아트리체."

"……!"

그녀의 청자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어보았지만 터져 나오는 듯한 감정의 파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흑.' '끄흑.' 하는 절제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로드는 잠자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베아트리체는 훌쩍이면서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는 로드의 손 위로 자신의 두 손을 포개었다.

로드는 반대쪽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와, 시발. 내가 생각해도 겁나 멋있었다.'

"……에휴."

이브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있었다. 이런, 들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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