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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17화 (17/296)

<-- 외교의 정석 기본편 -->

"그건 그렇고, 폐하."

이브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고는 이내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왜?"

"이번 습격이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짐작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지."

로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경비대야. 군무 문제 때문에 찾아갔지. 그렇다면, 내가 거길 접근하는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어비스에 누가 있겠어?"

"……마틴…입니까?"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전문 암살자들이나 본인 소속의 마피아들이 아닌 조폭들을 동원한걸 보니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경고의 의미일까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로드가 갑자기 파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아? 재밌네. 점점 더 흥미진진해져. 허수아비라도 명색이 왕은 왕인데 그렇게 간단히 암살을 명하다니… 역시 상대도 보통은 아니야."

로드가 괜찮아 보이자 이브는 그제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세요. 괜히 밖에 돌아다니시다가 험한 일이나 당하시고…… 단장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네 말이 맞아. 마틴이 여기 있을 때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 졌어. 다음번엔 진지하게 암살 시도가 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겠지."

로드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마틴을 다른 곳으로 내보낸다."

"……네?"

그 말을 들은 이브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게 가능이나 한가요?"

"불가능할 건 또 없지."

로드가 슬쩍 웃으며 본인 몸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았다.

"뭐, 좋아. 한번 거하게 당했으니까 이제부턴 우리가 반격할 차례야!"

*

벌컥.

"힘 세고 강한 아침! 나 출근했어, 이브!"

로드가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5분 지각이시네요."

"아침부터 깐깐하기는, 핫!"

로드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직격으로 날아오는 폭탄을 피하는 마냥 기민하게 앞으로 점프하여 바닥을 한번 구른 다음 소파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웅크리고 누워 옆에 있는 담요로 몸을 덮었다.

'좋군.'

이세계에 와도 역시 사람의 체질이란 건 쉽게 변하지 않는 듯 했다. 로드는 지금 어머니의 태아에 있었을 때와 같은 완벽한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막 씻은 뽀송뽀송한 몸으로 아침 일과 시간에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는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러나 이브가 몹시 못마땅한 눈으로 로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드에게는 익숙하디 익숙한 눈빛이었다.

여자가 낮에 한가하게 누워있는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만국공통. 아니, 만계공통인 모양인 듯 했다.

"아, 뭔가 빠트린 기분인데……."

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아! 하는 탄성을 뱉으며 지휘관 창을 열었다. 그리고 공용 채팅방에 접속했다. 로드처럼 아침부터 수다를 떨고 있는 몇몇 한가한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로드도 가볍게 인사말을 남긴 다음, 다시 팔을 담요 안으로 쏙 넣었다.

'그래, 이거야! 뭔가 허전했더니 볼 거리가 없었구나.'

이제야 진짜 완전한 폐인 모드가 완성되었다. 로드는 채팅창에서 누군가가 시전한 농담을 보고는 낄낄거렸다.

이브의 표정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당장 똑바로 일어나지 않으시면 폐하의 입술과 등짝이 키스하는 인체의 기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쳇."

입술과 등짝이 키스하는 본인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본 로드는 군말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등을 바르게 하고 앉았다.

"폐하.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로드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직 안 먹었어."

"같이 드시죠. 메이드들에게 아침을 여기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하, 너도 안 먹고 나왔구나? 나처럼 아침잠이 많은 타입?"

"밤 샜어요."

"……흠흠."

로드는 쭈글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이브가 까칠한 느낌이 있더라니, 그녀가 밤을 샌 원인은 누가 뭐래도 로드가 일을 벌인 탓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속 편하게 폐인 모드로 들어갔다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더더욱 숙여졌다.

"……그래도."

"응?"

"요즘처럼 바쁜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브가 어딘가 슬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아무 일도 없어서, 출근해도 벽만 보고 있었거든요."

"그, 그러냐……."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메이드 소녀가 서빙 카트를 몰고 들어왔다. 오늘의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그녀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요리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는데 샌드위치의 패티가 던전쥐의 고기라는 듯 했다.

'오오, 던전쥐라면 다름아닌 나의 작품이지 않은가.'

메이드가 설명을 끝내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너무 긴장을 했는지 그만 서빙 카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카트가 미끄러지며 올려두었던 찻잔이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서 로드는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긴장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메이드야."

"……네, 넷?"

로드가 양팔을 휙 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왔구나!"

"꺄아아아악!"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짧은 사이에 얼굴 안면 근육을 스무 번 정도 움직이는 기염을 토했다. 동시에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그만 엉덩이를 카트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번엔 아예 찻주전자가 뒤엎어졌다.

'……어, 어라?'

"거, 걸레 더 가져오겠습니다아!"

메이드가 미사일과 같은 속도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로드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이렇게 까지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짓궂으시네요."

이브가 쪼그려 앉아 젖은 바닥을 마저 닦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요즘 메이드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있어요."

"…뭔데?"

로드가 불길함을 느끼며 물었다.

"일을 하던 도중 누군가가 '왔구나!'를 외치면 모두가 하는 일을 멈추고 도망치는 거죠."

"……미, 미친!"

이런 시공간을 일그러뜨릴 흑역사가 있나! 극한의 부끄러움에 로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호호."

"……자살하고 싶다."

로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아무튼 얼른 식사나 해요."

두 사람은 집무실 중간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로드가 먼저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오오, 생각보다 맛있는데?'

쥐고기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평해보자면 나름대로 구운 치킨 맛이 났다. 살도 두꺼워서 씹는 맛도 있었다. 만약 이게 국민들에게 제대로 공급될 수만 있다면 식량 문제가 해소되는데 크게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시설을 늘릴 수도 있다.

한편 이브는 샌드위치를 열어 내용물을 덜고 있었다.

"뭘 빼고 있는 거야?"

"쑥이요."

"아하, 곁들일 채소로 양상추가 없다 보니 쑥으로 대신하는 거구나. 돼지고기 대신 쥐고기고. 어비스니까 어쩔 수 없…… 어, 잠깐!"

로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너 쑥 싫어해?"

"네."

"마늘은?"

"제일 싫어합니다."

"이럴 수가!"

로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마를 감쌌다.

"정체성을 되찾아라, 이브. 쑥과 마늘을 싫어하다니… 네 머리에 달린 그 귀여운 곰돌이 귀에게 사과해."

"……가끔 폐하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를 때가 있어요."

이브는 쑥이 빠진 쥐고기 패티위에 벌꿀을 듬뿍 발랐다. 로드가 그 모습을 보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곰은 곰인 듯 했다. 이쪽 곰이 아닐 뿐.

그렇게 식사를 모두 마치고도 메이드 소녀가 좀처럼 그릇을 회수하러 오지 앉자 이브가 직접 카트를 끌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로드는 홀로 소파에 누워 잠시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

로드가 누워있는 벽 옆이 출렁거리는 듯 하더니 대뜸 벽을 뚫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로드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헉! 귀, 귀신?"

"……주인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베아였구나."

"……베아?"

"베아트리체는 너무 길잖아."

로드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녀의 고유 능력인 '영체화'기술. 만약 이 광경을 밤에 보았더라면 까무러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뭐야? 그 차림은?"

베아트리체는 평상시와 같은 암살단 복장이 아닌, 한 겨울용 코트 같은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다.

"……주, 주인님께서. 금요일은. 이 차림으로 하라고 하셔서."

라고 말하며 그녀는 양 손으로 코트를 벌렸다.

"……!"

로드는 하마터면 정신이 그대로 하늘로 승천해버릴 뻔 했다. 코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차라리 알몸인 게 덜 야할 것 같은 차림이었다.

하얀 다리를 감싼 매끈한 검정 스타킹. 그리고 가터가 같은 색의 팬티와 연결되어 있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섹시미가 뿜어져 나왔다. 팬티 또한 면적이 워낙 좁아 좌우로 살갗이 드러났고 중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가슴 위로는 바람 불면 날아가버릴 듯한 위태로운 꽃잎 장식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불룩한 봉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여 꽃잎 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이 되는 듯한 조화를 뽐내고 있었다.

"으악! 으악! 으아아아악!"

로드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그녀의 코트를 다시 감쌌다. 너무 놀라서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듯 했다. 얼굴은 마그마처럼 새빨개졌고 이마와 뒤통수에는 식은땀이 홍수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야릇한 느낌이 입안에서 감돌아 좀처럼 떠나주질 않았다.

"……주인님?"

그녀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더 양심이 찔리고 가슴 아팠다.

"대체 뭐야! 그 꼴은!"

로드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야 주인님이……"

"내, 내가 시킨 거야?"

"매 주에 한 번 이상, 주인님의 컬렉션 차림으로 남들 몰래 오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그만! 그마안!"

로드가 허공에 힘껏 손사래를 치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아직 자신은 현대의 지성인이었고, 그녀는 미성년자였다. 물론 이 세계에는 통용되지 않는 법이었지만, 그래도 한참 어린 여동생이 아닌가! 그에게 남아있는 수컷의 본능이 불쑥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앞으로는 이 차림 할 필요 없어. 알겠어?"

"……어째서…"

"알겠어?"

"……네. 주인님."

로드는 그제서야 한 숨 돌렸다. 그의 수컷 본능이 '이런 멍청한 녀석! 당장 다시 벗겨!' 라며 아우성쳤지만 이성이 간신히 정신줄을 붙들었다.

그런 건 아니 될 말이었다. 이러다가 이브나 다른 메이드들한테 들키면 큰일, 이 아니고 바로 어제 베아트리체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에 맹세를 어긴다면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폐하? 무슨 소란이에요?"

이브가 로드에게 줄 간식거리가 담긴 쟁반을 든 채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딱 목격하고 말았다.

"……"

그녀는 쟁반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서로 밀착해있는 남녀. 로드는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그녀의 코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살색, 또 살색이었다.

"……폐. 하?"

그녀가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집무실의 온도가 뚝 내려가며 서리가 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이, 이건 그러니까. 그게……"

이브의 눈에 붉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당장 나가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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