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의 정석 기본편 -->
로드는 본인의 집무실에서 쫓겨나 문 밖에서 대기했다. 이브가 시켰는지 메이드들이 황급히 옷가지를 들고 방안을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잠시 후 이브로부터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뭔가 방 주인이 뒤바뀐 기분이 들긴 하지만…'
로드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올 때였다.
"헉!"
로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베아트리체가 다름아닌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번개처럼 다가온 로드가 그녀의 모습을 위 아래로 살폈다. 그리곤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훌륭한 퀄리티군."
"……전이나 지금이나 변태인 건 매한가지 인 것 같군요."
이브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로드는 들은 척도 않고 베아트리체에게 말했다.
"잘 어울려, 베아."
"……아."
그녀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 고마 워요."
"후후후후!"
"그 변태 같은 웃음 소리 그만 내고 어서 일이나 해요! 일!"
이브가 눈을 흘기며 틱틱댔다.
"분명 어젯밤은 '이제부턴 우리가 반격할 차례야!' 하면서 멋진 폼은 다 잡으셨으면서 왜 평소와 같은 바보 변태로 돌아온 거죠? 벌써 잊으신 건가요?"
"이브."
"네?"
"너 그걸 지금 성대모사라고 하는 거니?"
이브가 다시 눈에서 악마와 같은 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로드가 삐질 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잊었을 리가 있나."
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베아트리체에게 심부름을 하나 맡겼다. 연구소에 있는 하버트에게 연구의 진척에 대해 물어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가 밖에 나간 후 로드는 다시 채팅창을 열었다. 이제 마침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접속해 있었다.
"자 그럼, 외교란 걸 한 번 해볼까?"
로드의 손가락이 지휘관 창 위로 움직였다.
- '로드 폴렌티아'님이 '콜린 롤링'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받아라, 콜린. 받아라.'
- '콜린 롤링'님께서 1:1대화를 승낙하셨습니다.
우우우우웅!
로드의 눈 앞으로 새로운 스크린 창이 떠올랐다.
그 화면에서는 달과 별이 그려진 잠옷 비쥬얼의 파란색 로브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 색도 복장과 같은 신비스러운 느낌의 파란색이었으며 지팡이로 보이는 장대 같은 것이 옆에 기대어져 있었다.
"어라라? 이건 처음 사용해보는 기능이군요."
스크린의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로드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도 직접 사용하는 건 처음이네요. 하여튼 반갑습니다. 어비스의 왕 로드입니다."
콜린도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오펙투스의 왕, 콜린입니다."
마법의 나라 오펙투스. 어비스의 서쪽에 위치한, 어비스를 둘러싸고 있는 6개국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가벼운 잡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있었느냐? 이세계 적응 문제는 어떠냐? 그쪽 나라는 할만하냐?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자, 그러면."
콜린이 기지개를 쭉 피며 말했다.
"어비스에서 어떤 용무로 1:1 대화를 신청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로 본론인가? 깔끔담백하고 사무적인 회사원 스타일이군.'
그가 원하는대로, 로드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으으음? 사실 이런 부탁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말이죠. 아로게쓰가 다시 저희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거든요."
콜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로드 님이 아로게쓰의 초반 올인 전략을 폭로해서 그대로 포기했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만, 사실 그 와중에도 아로게쓰는 계속 군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전과 달리 병력을 전진 배치 하지 않았을 뿐이죠. 콜린님도 아시다시피 어비스는……"
"상대의 현황을 훔쳐볼 수 있죠?"
"그렇습니다. 잘 알고계시는 듯 하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로드가 손에 깍지를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 부탁은 하나, 저를 도와서 아로게쓰의 공격을 격퇴해주십시오."
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 '흐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채팅창에 폭로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면 괜히 중부 전체가 어수선해질 수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처럼 평화를 원합니다."
콜린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럼 만약 우리가 어비스를 도와 아로게쓰를 격퇴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뭐죠?"
"그건 바로…"
로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비스는 귀국의 속국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콜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소, 속국이요?"
속국은 다른 나라의 밑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는 외교관계를 뜻한다. 특히 카오스월드에서는 속국이 되면 게임이 무척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정해진 기일마다 본국에서 정한 일정량의 조공을 가져다 바쳐야 하며, 본국은 속국에게 병력 동원 요구까지 할 수 있고, 심지어 내정까지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속국을 '굴욕의 외교'라고 칭하며 속국으로 들어갈 바에 차라리 멸망 당하는 게 낫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속국으로 전락한 나라들 중에서도 독립을 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다시 대륙을 호령하는 강대국이 되는 드라마틱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단은 소수의 케이스였다.
그만큼 로드가 제시한 '속국'이라는 카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로드는 태연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야 당연하죠.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도록 구해주셨으니 저희가 그 정도는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도 좀 의외군요."
콜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는 기껏해야 금전적인 보상이나 희귀한 자원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속국이라니.
"어떤가요?"
로드가 빠르게 밀어붙이듯 물었다. 하지만 콜린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로드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로드 님.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어째서 우리죠? 우리와 아로게쓰말고 어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네 개나 더 있는데요."
"아, 그건……"
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검지 손가락을 들었다.
"첫 번째 제의일 뿐입니다. 오펙투스에서 거절한다면 다른 나라도 고려해봐야죠."
'……이 자식.'
콜린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로드의 말은 그쪽이 첫 번째 제의였을 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라는 것이었지만 콜린의 생각은 달랐다.
힘으로 굴복시켜 속국을 시키는 게 아닌 스스로 속국이 되겠다고 먼저 제의를 해왔다. 당연히 해방의 경우의 수도 생각하고 있을 터, 한마디로 만만하다는 소리였다. 로드는 아마 카사르 같은 강대국에게는 절대로 속국 제의를 하지 않을 것이리라.
'너무 물로 보는군. 나는 당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어. 흐음, 하지만 그런 먼 문제는 잠시 넘겨두고 어비스의 속국화라……'
콜린이 다음 말을 꺼내는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지금 당장은 답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하하, 역시 그런가요?"
로드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아로게쓰가 금방 쳐들어올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하아, 그럼 일단 제 답은 보류라고 해두죠."
로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보류. 사실상의 거절이다. 콜린이 말했다.
"저희의 대답은 제쳐두시고 다른 나라에서 똑같은 제안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 그리고……"
콜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평화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조치는 해두죠."
그렇게 몇 마디가 더 오고 간 후에 대화는 종료되었다.
스크린이 사라지니 그 앞으로 이브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드의 입에서 절로 '헉!'하는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하!"
그녀의 표정이 유난히 살벌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죠? 속국? 속국이라니!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서는 그렇게 굴욕적인……!"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로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펙투스에서 거절할 걸 아니까 제안을 한 거야."
"……네?"
오펙투스는 강력한 마법사들이 나라의 주력인 만큼, 마법사들을 양성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즉, 초반이 약하고 중 후반이 강력한 컨셉의 국가이다. 따라서 오펙투스는 지금의 평화로운 상황이 길어질수록 유리한 입장이었고, 현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오펙투스의 밑으로 어비스가 들어온다고 치자. 초반에는 사려야 할 오펙투스가 6개국에 둘러싸여 있는, 감당이 안 되는 영지라는 혹을 스스로 붙이는 것이다. 어비스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다른 국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브레이크를 걸어올 것이다.
즉, 오펙투스는 지금의 평화를 스스로 발로 찰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 로드의 계산이었다.
"그럼, 거절당할게 뻔한 그런 제안을 왜 하신 거죠?"
이브가 갸웃하며 물었다.
"내 의도를 숨기고 오펙투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지."
"정보요? 아로게쓰가 쳐들어 온다는 것 말이군요. 하지만 어째서 그런 짓을?"
"오펙투스의 군사적 움직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어. 그들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아로게쓰가 우리를 집어삼켜버리는 상황은 원하지 않거든."
로드가 단언하듯 말했다.
주신전에 참가하기 전에 열렸던 신들의 연회 때, 로드는 2층에 앉아 모든 계약자들의 행동과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 중 콜린의 경우, 연회 초반부터 한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낯선 이들을 대할 때와 그녀를 대할 때의 시선과 목소리 톤의 차이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서로 이웃한 자리의 나라인 '마법의나라 오펙투스'와 '엘프의나라 알브헤임'을 1픽으로 선택했고 그 나라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나라가 결정된 후, 가까운 나라끼리 붙어있으면 다른 계약자들이 두 사람의 동맹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떨어져 있는 연출도 했다. 사소한 행동들이었지만 로드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신들 차원에서의 동맹인지, 연회 동안 자기들끼리 마음이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두 사람이 연합이라는 건 거의 확실해."
그런데 동맹국인 알브헤임의 바로 옆에는 초반 최강국 아로게쓰가 있다. 만약 아로게쓰가 어비스를 집어삼키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오펙투스-알브헤임 연합에 오게 될 것이다.
"아, 그리고 아로게쓰에도 연합국이 하나 있는 듯 해."
"……어느 나라인데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로게쓰가 극단적인 초반 올인 전략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유추는 할 수 있지. 아마 공격을 가는 동안 비어있는 자기네 영토를 그 연합한 나라가 지킨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던걸 거야. 그게 아니면 정신 나간 초반 올인 전략을 쓸 이유가 없지. 즉, 이 싸움은 오펙투스 연합 대 아로게쓰 연합으로 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다."
"……흐으응."
이브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끄덕일 때마다 머리 위로 보이는 곰돌이 귀 또한 함께 흔들렸다.
로드는 잠시 시선을 강탈당했다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시 오펙투스의 입장으로 돌아와보자. 오펙투스는 평화를 사랑한다. 어비스를 속국으로 삼는 건 아직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앞으로 자기네들 연합의 강력한 주적이 될 아로게쓰 연합이 어비스를 집어삼키는 건 싫다. 이런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움직임은 무엇일까?"
“그, 글쎄요…?”
로드의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우리 나라 국경 근처에 병력을 전진 배치해두는 것. 아로게쓰를 견제하기 위함이지."
"아! 아까 오펙투스의 왕이 '최소한의 조치를 해두겠다.' 라고 말한 게 바로 이거군요!"
"그렇지! 일종의 무력 시위랄까? 만약 수 틀려서 아로게쓰가 앞뒤 안 가리고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면…… 오펙투스 입장에선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들은 전투에 끼어들 명분을 얻음과 동시에 약해진 아로게쓰와 어비스 둘 다 어부지리로 일망타진할 경우의 수 또한 생기는 거니까. 물론……"
로드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걸렸다.
"아로게쓰가 움직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거, 거짓말이었어요?"
이브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응. 하지만 오펙투스는 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기본 전제는 '모든 나라들이 어비스의 말은 신뢰한다.' 그리고 '어비스는 이득을 볼 점이 없다.'는 거야. 콜린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리의 내부 사정 까지는 모를 테니까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거지."
이브의 눈동자가 커졌다.
"폐하."
"응?"
"상종 못할 변태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똑똑한 구석도 있으시군요."
"……욕인지 칭찬인지 하나만 해 줘."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말씀 안 해주셨습니다."
이브가 무릎에 손을 올리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오펙투스의 병력이 전진배치 되도록 유도했는가?"
"그거야 간단해."
로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어비스 내에, 그 움직임에 민감해 할 사람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