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세 기간 -->
얼마 안 가 어비스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번쩍 정신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서쪽방면에서 오펙투스가 쳐들어올 것이다.'
언더하임의 사람들 누구나 그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동안 잠잠했던 마법사들이 왜 이런 곳에 온다는 것인가? 마법무구 제작에 필요한 테라를 노리는 건가? 마법사들은 적국의 노예를 마법 실험 재료로 쓴다더라!
점점 소문은 커지고, 와전됐으며,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한 소문들이 떠도는 도중, 마틴이 직접 마피아들을 이끌고 어비스의 두 번째 영지, '드러그팜'으로 향했다는 비보가 왕궁에 도착했다.
"폐하! 정말로 마틴이 움직였습니다!"
이브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 젖히며 말했다. 로드는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를 맞이했다.
"역시 이 소문의 근원은 폐하인가요?"
"응, 맞아. 정보부에게 말해서 일부러 정보를 흘렸어. "
"마틴이 움직일 것도 예상하셨던 건가요?"
"그걸 예상 못했으면 이렇게 타국까지 활용하는 번거로운 짓거리도 안 했지."
지휘관 창으로 대륙 지도를 바라보던 로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공교롭게도, 오펙투스가 언더하임에 쳐들어 오려면 드러그팜을 지나는 루트를 타야 해. 드러그팜은 마틴의 실질적인 본거지이자, 마약의 주요 공급처이기도 하잖아? 그에게 있어서는 테라 광산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지."
"벌써 알고 계셨군요. 마피아의 수입 1위가 테라고, 2위가 마약이니까요."
"후후, 마틴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뒀지. 아무튼, 오펙투스가 우리와의 국경선 부근에 병력을 전진 배치해뒀으니, 마틴은 바로 그 근처에 있는 드러그팜을 절대 텅 비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오펙투스와의 병력 차이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본인이 직접 올라가야 했겠지."
"이해했습니다."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로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어려운 운영이 필요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로게쓰로부터 시간을 벌기 위해 대륙의 전 국가를 써먹었고, 국내 세력으로부터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타국 하나의 군대를 동원했다. 행동을 할 시간조차 일일이 벌어야 했고, 그 시간은 로드에겐 정말로 황금 과 같은 시간이었다.
"마틴 그 남자가 다시 언더하임으로 돌아오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놓자고."
*
오늘 ‘피닉스 다크파이어’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어제 상납금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간절히 고대하던 '스윗베어 100개 한정판'을 구매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이 강렬한 분노를 누군가에게 표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리고 서둘러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차가운 얼음딸기주를 가져오지 않으면 이 분노는 쉽사리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필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논리로 그는 옆에 멀뚱히 서있는 그의 오른팔 '칠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악! 아, 형님! 또 왜 때리쇼!"
칠리가 엉덩이를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시끄럽다."
"피닉스 형님은 가끔가다 보면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오. 쳇."
그러나 그의 멍청한 부하 칠리는 이 폭력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가 난 피닉스가 이번엔 칠리의 엉덩이를 날아차기로 박살내려는데……
쿠당탕!
"피닉스 형님! 큰일입니더!"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부하는 본인 다리에 본인이 걸려 넘어져 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다가 피닉스가 앉은 의자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피닉스는 자신의 화를 푸는 조건으로, 얼음딸기주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추가하기로 했다.
"…왠 소란이냐?"
"스, 습격입니다! 적이 쳐들어 왔습니더!"
피닉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번엔 또 어디야? 강철파냐? 아님 청동파?"
"조직이 아닙니다!"
"뭐?"
콰앙! 아지트의 문짝이 박살 나며 병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피닉스가 벌떡 일어나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문 너머를 바라보니 이미 주위를 지키고 있던 그의 아우들은 곤죽이 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우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울 상납 시간에 쳐들어오다니, 몹시 교활한 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피닉스가 위압감을 담아 소리쳤다.
"아니 근데 이런 잡것들이! 어디 소속이냐! 오리할콘파냐? 미스릴파냐?"
쳐들어 온 잡것들은 묵묵부답으로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피닉스의 화를 더 키웠다. 이제 얼음딸기주로는 이 강렬한 분노를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새끼들이! 아무리 몸담은 파가 다르다지만 이 바닥 오래 먹고 산 선배가 말하는데 빠져가지고 대답도 안 해? 앙? 요새 애들은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기분이 참 가락엿같네!"
"저… 혀, 형님. 아까도 말했지만 저자들은 조직이 아니라……"
피닉스가 부하의 뒤통수를 퍽!하고 때렸다.
"넌 싸물어, 짜샤!"
피닉스는 저 잡것들의 차림을 찬찬히 살폈다. 나름대로 기름칠 잘 된 갑옷에 무기는 날이 날카롭게 선 검과 창을 들고 있었다.
이 부분이 또 피닉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폭은 결코 좋은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연장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닌, 사람들을 겁먹고 쫄게 만들어 휘두르지 않아도 알아서 상납금을 가져다 바치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조폭의 철학도 찾아 볼 수 없는 조직이라니. 저 조직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게다가 병사들 말고 주위에 드문드문 서 있는, 단검을 든 검은 복장 차림의 잡것들은 더 했다. 그들의 절반 정도가 여성이었는데, 민망하게도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타이즈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다.
피닉스는 자신의 아랫도리에 위치한 남성성이 번쩍 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인정하기 싫지만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낮부터 술집 여자들에게 저런 옷을 입히고 돌아다니게 하다니! 저 조직의 보스는 분명 터무니없는 변태임에 틀림없었다.
"감히 네놈 같은 것들이 조폭임을 자처하다니, 원통하기 그지 없구나! 조폭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조폭 클랜 제 1세력 황동파의 보스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어라? 뭐해? 아직도 안 싸우고 있었어?"
아지트 문으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맞춰 병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하며 좌우로 물러섰다. 피닉스는 저 남자가 바로 저 조직의 우두머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헉! 저, 저 사람은?"
옆에 있던 칠리가 움찔했다.
"누군지 아냐?"
"알다마다요! 왕! 왕 아닙니까!"
"왕 이라고오!"
피닉스가 바닥에 발을 쿵쿵 내리찍었다.
"조직의 호칭은 형님, 혹은 큰형님으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을! 왕? 왕형님은 또 뭐냐! 네놈들은 무기와 복장의 규율을 넘어서 우리의 오랜 전통인 호칭마저 바꿀 생각이더냐, 이노옴! 왕형님이라고 불리면 우리보다 더 높을 거라고 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
잠시 멍하니 있던 로드가 옆의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쟤 뭐라는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폐하. 저희도 저 자의 기묘한 헛소리에 빠져 잠시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로드가 귀찮은 듯 손을 휙휙 흔들며 말했다.
"자, 거두절미하고 공지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조폭집단 황동파의 검열이 있을 예정이오니 다치기 싫으면 얼른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 주세요."
"이노옴! 조폭이 조폭을 검열한다는 거냐! 너희가 무슨 권리로!"
"아, 시끄럽네. 그냥 빨리 조져!"
로드의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왕실 친위대와 암살단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끄아아아악!"
"이, 이거 놔"!
황동파의 아지트는 사방에서 벌어지는 전투로 난장판이 되었다. 조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분투했지만 정규 군사 훈련을 받은 병사들을 당해내기는 힘들었다. 물론 조직원 쪽에서도 탁월한 싸움꾼들이 한 둘 정도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라 대세에 지장을 주진 못했다.
특히 이번 전투는 암살단원들의 실력이 빛을 발했다. 그들은 간단하고 깔끔하게 조직원들을 처리해 나갔다. 로드가 살상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암살단원들은 제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물론 조직원들과의 실력차가 압도적인 게 주요한 이유였다.
"커헉!"
부웅! 힘에 의존하여 각목을 휘두르기만 하던 조직원이 암살단원의 단검 손잡이에 머리를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매끄럽게 단검을 회수하여 허리춤에 꽂았다.
"방문 영업은 밤에나 하시지, 아가씨!"
그때 그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피닉스였다.
퍽!
그녀의 동공이 풀리며 아까 본인이 쓰러트렸던 조직원 옆에 나란히 쓰러졌다.
주위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암살단원을 일격에 쓰러트리다니! 지금까지 암살단원은 단 한 명도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내 스타일이었는데 어느 업소인지 못 물어봤다."
피닉스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저 자가 두목이다!"
"잡앗!"
병사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피닉스는 쇠방망이를 어깨에 짊어진 채 여유 있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앞에 놓여진 나무 테이블을 발로 밀었다.
콰당탕! 병사 하나가 테이블에 부딪쳐 밀려나 기둥에 부딪쳤다. 피닉스는 맞은편에서 휘둘러지는 칼을 무릎을 굽혀 피한 다음 단검을 꺼내 병사의 발등을 찍었다.
"끄, 끄아아악!"
피닉스가 일어나며 머리로 병사의 턱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피닉스는 병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볼 새도 없이 방망이를 후방으로 휘둘러 등으로 쇄도하는 창을 쳐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마치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만 같았다.
"하압!"
그가 돌연 테이블 위로 점프하여 테이블과 기둥 사이에 끼어있는 병사의 안면을 발로 깐 다음, 기둥을 밟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쇠방망이를 양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헉!"
지상에 있는 병사가 다급히 창을 세워 들어올렸다.
쿵! 쇠방망이가 창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창을 두 쪽 낼 기세로 휘둘러진 것에 비해 전달되는 힘이 약했다.
사실은 피닉스가 휘두르는 중간에 쇠방망이를 일부러 놓은 것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피닉스가 마치 원래부터 연결 동작이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달려들어, 여전히 창을 머리 위로 올린 채 굳어있는 병사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병사가 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깡패 주제에 제법이군."
그 장면을 지켜 보고 있던 남자 암살단원이 단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피닉스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랄하네! 같은 깡패면서 새삼스럽게 뭔 헛소리야?"
그 말에 암살단원이 질세라 말했다.
"뭐? 지랄? 우리만 보면 덜덜 떨면서 도망가던 놈들이 많이 컸군."
"많이 컸다고? 우리 황동파는 언제나 1위 세력이었다! 머저리야!"
"머, 머저리? 이 새끼들이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암살자 무서운 줄 모르는 구나!"
"암살자를 쓰겠다고? 니들이 그러고도 조폭이냐? 정정 당당하게 붙어라!"
두 남자는 서로의 대화가 왜 평행선을 달리는지 모르고 열심히 말싸움을 하였다.
"역시 너희 같은 사회악은 어비스에서 싹 사라져 버려야…… 헉!"
암살단원은 말을 채 잊지 못했다. 피닉스가 걸친 재킷이 펄럭이며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의를 벗는 속도가 숙련된 검사의 발검과 맞먹을 정도였다.
재킷이 달라붙으며 암살단원의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말이 많다! 미스릴파!"
이제는 아예 미스릴파라고 단정지은 피닉스가 쇠방망망이의 끝을 잡고 재킷에 엉켜있는 암살단원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암살단원은 얻어맞으며 단검을 휙휙 휘둘렀으나 거리가 너무 짧았다. 게다가 재킷은 겉면에 어떤 처리가 되어있는지 섬유에 붙으면 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재질이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얻어맞아 코피를 줄줄 흘리던 암살단원이 단검으로 재킷을 찢어버렸다. 싸움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시야를 확보한 역사적인 그 순간, 그의 코앞으로 쇠방망이가 '날아'왔다.
"……헉!"
뻐억! 코에서 퍼져나간 찡한 고통과 함께 그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피닉스가 달려와 허공에 튕겨나간 쇠방망이를 붙잡은 다음, 쓰러진 암살단원에게 몽둥이 찜질을 선사했다.
"죽어라! 오리할콘파!"
"미스릴파라며!"
쿵!
결국 시끄러운 암살단원 하나를 쓰러트린 피닉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라?'
그런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밀리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버텨 볼만한 상황인 줄 알았는데 맞은편의 아우들이 거의 괴멸 상태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얼굴에 핏물이 뭍은, 은발의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