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1화 (21/296)

<-- 유세 기간 -->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 아냐."

로드가 힘든 표정으로 본인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간의 강행군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눈 밑의 다크서클도 좀처럼 회복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너희는 패배 의식에 찌들어 그냥 개 노릇에 안주할 뿐이잖아? 같은 취급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그 말에 피닉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현실에 안주할 뿐이라고? 우리라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형제들끼리 싸우는 줄 아나? 모든 것은 조폭클랜의 대 통합을 위해서다! 네가 말한 그 빌어먹을 사슬을 끊기 위해서 란 말이다!"

"정말 통합을 위해서라면 다같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편이 훨씬 더 빠르지 않아?"

피닉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에겐 힘의 원리가 전부일 뿐이다. 상생과 협력? 평생을 더러운 뒷골목을 진전하며 내키는 대로 살아온 조폭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로드가 그제서야 씩 웃어 보였다.

"맞는 말이야."

피닉스의 눈 앞으로 팔랑거리며 서류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가 의아한 눈길로 서류를 쳐다 보았다.

"이게 뭐지?"

"그동안 마틴이 원조한 조폭클랜들의 리스트."

서류를 바라본 피닉스의 인상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마틴이 너희 황동파만 편애하는 줄 알았어?"

로드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너희 조폭클랜들의 세력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무기와 물자를 차등 공급해 왔어. 그리고 너희들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겨 왔지. 그 방식은 너희들이 더 잘 알 테고."

왕실을 억압하고 왕의 기본적인 군사권마저 언더하임 경비대에 넘겨버린 것처럼, 마틴은 자신을 위협할 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이번 조폭클랜의 경우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마틴은 언제까지나 조폭클랜들이 뒷골목에 찌그러져 상납금이나 바치는 것을 바랄 뿐, 그들의 대통합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

서류를 바라보던 피닉스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폭들은 힘의 원리가 전부일 뿐이야. 누군가 패배와 복종을 선언하기 전 까지는 상생과 협력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까?"

"……뭐?"

이제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다 나왔다. 본론을 꺼내야 할 때였다.

"우리 왕실은 마틴과는 달리 ‘차별 대우’를 할 생각이야. 너희 황동파가 조폭클랜을 재패하는 걸 뒤에서 도와주겠다."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가? 각 클랜들은 서로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제 1위인 우리 황동파도 2위 강철파와 세력 차가 크게 나지 않아."

피닉스가 진정이 된 것 같자 베아트리체가 그의 위에서 일어서 로드의 옆으로 다가왔다. 로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암살단원 삼십 명 전원,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붙여줄게."

"고작 그 정도…… 뭐, 뭐라고?

피닉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왜 모자란가?"

피닉스는 입을 다물었다. 모자라긴 무슨 분에 넘칠 지경이었다. 베아트리체 하나만 있어도 이쪽 세계는 초토화된다. 거기에 삼십 명의 암살단원이라니… 뒷골목 싸움에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없는 군대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왕실 세력의 대부분을 지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대신."

로드가 검지 손가락을 들었다.

"너희는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그 후로 우리는 아무 빚도 없이 서로 자기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지. 어때?"

"그 부탁이란 건 뭐지?

"어, 음…… 그건 아직 못 정했어."

로드가 그렇게 말하자 피닉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피닉스는 평소답지 않게 꽤 오래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흐흐, 어비스의 왕답게 교활한 면은 마음에 드는군. 좋다. 하지만 우리도 조건이 있다."

"어떤 조건이지?"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은 반드시 이 피닉스의 이름을 걸고 지키겠다. 하지만 만일 그 부탁의 내용이 우리 조직의 존속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문제라면, 나는 한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거절할 수 밖에 없다. 당신도 명색이 우두머리라면, 내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로드가 슬며시 웃었다.

"이해한다, 피닉스. 그럼 이제 우린 친구인가?"

로드가 턱짓을 했다. 암살단원 하나가 다가와 피닉스를 구속하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피닉스가 일어나며 말했다.

"조직에 친구 따윈 없다. 상하 관계만 있을 뿐."

"하하, 그거 곤란하네."

"곤란할 것 없다. 여기선 더 급하고 절실한 쪽이 아래로 들어가는 게 맞겠지. 어떤 자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가장 절실한 부분을 제대로 꿰뚫었다."

피닉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오, 큰형님."

로드가 흠칫하며 조금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윽, 오글거려. 정말 그 호칭으로 할 거야?"

" 원래부터 조직의 호칭은 형님과 아우밖에 없수다!"

"……아, 알았어."

"암살단의 지원은 언제부터 해줄 거요? 이쪽 상황이 썩 좋지 않소. 미스릴파가 우리 쪽 작업장을 하나 가져갔거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도 돼. 나도 너희가 최대한 빨리 세력을 통합하는 게 유리하니까."

그때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소매를 슥슥 잡아 당겼다. 로드가 시선을 내리니 그녀는 마치 치과에 가기 싫은 아이의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커헉! 이, 이것이 바로 심쿵이라는 것인가!'

로드의 몸이 비틀거렸다. 정말이지 이 귀여움은 치명적이었다.

"미, 미안해. 베아. 하지만 날 위해 한 번만 더 수고해 줄 수 없을까?"

"……"

결국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로드는 다시 시선을 되돌려 말했다.

"피닉스."

"뭐요?"

"혹시 애한테 이상한 짓 하면 죽여버린다."

로드가 살벌하게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피닉스가 흠칫하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소."

"좋아. 그럼 용건은 다 끝난 거지?"

로드가 기지개를 쭉 피며 말했다. 그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데 우물쭈물 뭔가를 망설이던 피닉스가 돌연 다급히 외쳤다.

"혀, 형님!"

"뭐냐?"

"……메이드 복."

로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피닉스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메, 메이드 복 입히는 것만은 허, 허락해 주쇼……!"

"……"

잠시 침묵과 같은 정적이 흘렀다.

"……너 이새끼!"

로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피닉스도 이에 물러서지 않고 격양된 표정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손바닥을 세게 맞부딪치며 하이파이브 했다. 짝! 하는 경쾌한 소리가 아지트에 울려 퍼졌다.

"역시 뭘 좀 아는구나!"

"형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소!"

그 모습을 본 병사들과 조직원들이 우렁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시 한번 왕실과 조폭이 메이드복으로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나라는 글렀군.'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성 암살단원들은 잠시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했다.

*

"자, 다음은 여기 인가."

마틴이 드러그팜에 가 있는 공백의 시간 동안, 로드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늘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번 계획에서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퍼즐. 다른 어떤 클랜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이 퍼즐 하나가 없다면 전부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어비스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유니벨의 '흑익'이었다.

로드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흑익 상단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가자, 베아."

"……네, 주인님."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과거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 유니벨은 로드를 끔찍이 싫어했다. 그리고 이미 안정적으로 뿌리를 박고 자리 잡은 어비스 최고의 상단이 불안정한 가능성밖에 없는 왕실과 손을 잡아 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로드는 무엇보다 흑익의 힘이 절실했다. 제 2위 세력인 흑익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능히 마틴의 마피아와도 견주어 볼 만 했다.

로드는 상단 건물로 들어서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정체를 밝히자마자 문전 박대 당할 가능성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만약 유니벨을 만나지도 못하면 어떻게 하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면 이야기를 들어줄까? 상회 건물 앞에 대자로 뻗어있으면 민망해서라도 들여보내주지 않을까?

"어서 오십시오. 저희 상단에 방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장을 차려 입은 외눈의 노년 신사가 허리를 숙이고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리며 인사했다. 로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계단, 고풍스러운 가구들, 천장의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보였다. 왕궁에 버금갈 정도로 호화로운 외형이었다.

로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익의 상단주를 만나고 싶습니다만."

"실례지만 손님, 존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로드는 어쩔 수 없이 로브에 달린 후드를 벗었다.

"로드 폴렌티아 입니다. 이쪽은 제 호위로 온 베아트리체구요."

"아, 실례했습니다."

노년 신사는 놀란 기색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폐하."

'……어, 어라?'

예상했던 문전 박대는 없었다. 노년 신사는 순순히 로드와 베아트리체를 3층으로 안내했다.

복도를 쭉 걸어가다가 중간 즈음에 무기를 든 수인족들이 통로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년 신사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송구스럽지만, 폐하."

"왜 그러죠?"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주셔야 합니다."

베아트리체가 눈을 치켜 떴다. 그녀의 손이 허벅지의 포켓으로 향하자 경비들이 움찔하며 창을 치켜 세웠다.

"괜찮아, 베아."

"……주인님."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금방 다녀올게."

베아트리체는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는 소지한 무기가 없는지 간단한 몸 수색을 받은 다음, 다시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몇 번의 통로를 더 지난 후에 노년 신사가 한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노크를 했다.

"상단주 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잠시 문 너머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잠시 삼분 정도가 흘렀다.

"응, 들어오라고 해."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있는 유니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이 약간 뻗쳐있었는데 급하게 손질한 티가 났다.

"…뭐야, 당신이었어?"

유니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로드는 애써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거기 앉던지 말던지."

'좋은 시간 되십시오.' 노년 신사가 그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닫고 물러났다. 로드가 건너편의 소파에 앉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뭐 마실."

"……응?"

"아, 시발 귓구멍이 쳐 막혔나! 뭐 마실 거냐고 묻잖아!"

화들짝 놀란 로드가 재빨리 '커, 커피로 부탁드립니다.'하고 말했다. 그녀는 로드를 한 번 노려본 후 방 구석으로가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들여보내주네."

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문전 박대를 예상했었는데. 아니면 혹시 그런 거야? 나를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여서, 소리 소문 없이 훅 보내려고?"

고개를 돌린 유니벨이 로드를 한번 쏘아봐준 후 말했다.

"일단은 여긴 상단 안이고, 난 이곳의 상단주야. 밖에서 만났다면 피떡으로 만들어 놨겠지만 네가 손님 자격으로 왔으니 어쩔 수 없이 대접하는 거니까, 착각하지마."

공과 사는 가린다는 건가? 로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조금은 그녀를 다시 봤다.

"아, 물론."

그녀가 탁 소리가 나게 로드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용건으로 온 거라면 네가 말한 그 일들이 현실이 될 테니까."

'…히익!'

그녀는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몫인 과일 주스를 한 입 들이켰다.

"그래서, 감히 여길 무슨 깡으로 왔는지 한번 들어볼까?"

로드는 떨리는 가슴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올려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꽤 맛있었다. 조금 달긴 했지만.

"돌직구로 간다."

"……돌직구? 뭔진 모르겠지만 말해봐."

"나와 손잡고 마틴을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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