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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전 문명게임-22화 (22/296)

<-- 유세 기간 -->

과일 주스를 음미하고 있던 유니벨이 켁켁 거리며 찻잔을 내려 놓았다. 로드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틴 아저씨를 친다고? 시발 너 지금 제정신?"

"응, 제정신."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좀 이상해졌다 싶었는데 이상해진 게 아니라 완전히 미쳐버린 거구나."

"후후. 맞아.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선 살기 힘든 세상이지."

"개소리 집어치우고 똑바로 말해! 그리고 너, 옛날에 마틴 아저씨한테 반항했다가 호되게 당한 거 기억 안나?"

"그건 그때 일이고."

로드가 시종일관 침착하게 대꾸하자 그녀도 흥분을 가라앉히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좋아. 그럼 내가 널 도와서 얻는 이득은 뭔데?"

"이 나라의 상업 파트를 통째로 때서 네게 줄게."

"콜록! 콜록!"

그녀가 다시 켁켁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로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주스가 뭐길래 삼켰다 하면 목에 걸리는 걸까.

"나라의 상업을 내게 넘긴다고?"

"응, 말 그대로야. 시나리오를 설명해보자면 넌 이 나라의 재정 전권 대리자가 되는 거고, 네가 이끌고 있는 흑익은 전원 공무원으로 승급한다. 그 아래의 크고 작은 상단들은 계속 네 관리하에 있을 거야. 즉, 공무와 민간 사업을 동시에 손에 쥐는 거지. 기존의 타국과의 거래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시발, 잠깐만."

그녀가 팔을 뻗어 로드의 말을 멈추게 했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이지. 사실 나라에 소속되라는 건 그냥 네 부하가 되라는 거잖아? 우린 이대로가 더 좋거든! 괜히 국가 소속이 돼서 거래에 발목 잡히긴 절대로 싫다고."

"네가 상업 파트를 맡게 되면 무엇보다 강력한 이점이 있어."

로드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테라 광산이 네 것이 된다."

"……!"

"이건 구미가 좀 당기지 않아? 마피아들은 광산에서 나오는 테라와 각종 값비싼 광물들, 심지어 식량의 공급까지 독점하고 있지. 마피아와 흑익이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알맹이들은 그들이 전부 다 가져가고 너희는 운송업 같은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잖아. 예를 들면 테라 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카사르로 옮긴 다거나."

"……너어!"

유니벨은 목청을 높이려다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잠시 화를 누그러뜨리고는 말했다.

"그딴 싸구려 도발은 안 통해. 흑익이 국가 소속이 되는 게 어째서 이점이라는 거지? 나는 상인이야. 돈만 벌면……"

"너 말이야."

로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돈만 벌면 그만인 그런 흔한 상인인 거야?"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내려 놓은 것은 그동안 그녀의 여러 흔적들이 기록된 서류였다. 그동안 그녀가 나라에 기부한 것들. 그리고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혹은 마진을 남기지 못할 가격으로 제공한 것들의 목록이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내 뒷조사를 한 거야?"

벌떡 일어선 유니벨의 진홍빛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오싹한 긴장감이 피부를 타고 흘렀지만 로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 정보부 애들이 고생 좀 했지. 하여튼, 보통의 상인들은 수익이 나면 저축하거나, 취미 생활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재산을 더 부풀리기 위해 투자하는데 너는 거의 상단의 모든 수익을 이 나라를 지탱하는 데 쓰고 있었어. 이 정도로 비정상적인 체계의 나라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네 역할이 컸지."

"하아."

유니벨은 다시 자리에 풀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래, 좋아. 하지만 그게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고, 마틴 아저씨를 적으로 돌리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못 돼. 나는 내 방식대로 이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 애쓸 꺼야. 굳이 너와 손을 잡을 필요는 없어."

"……흠, 리스크를 감수하기엔 부족하단 거지? 좋아, 그럼 하나 더 걸도록 할게."

"…또 뭐를?"

로드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나라의 미래를."

"……"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유니벨이 이내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이제 보니 너 이새끼, 순 사기꾼이었잖아?"

'……!'

마력에 둔감한 로드였지만, 으스스한 기운의 흐름이 이 방에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의 분노가 형상화 한 것처럼 거칠고 난폭했다.

"땅속에 묻힐 준비는 됐……"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

로드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쏘아 붙이듯 말했다.

"이대로 가면 이 나라는 무조건 멸망한다."

"……"

이때다. 밀어붙여 주도권을 가져온다.

"내가 말했었지? 이제 대륙 전체가 전쟁에 휩싸일 거라고. 너도 상인이니까 물자의 흐름 정도는 꿰차고 있을 테니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 다른 나라들은 일찌감치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우린 내부의 문제조차 해결 못하고 끙끙 앓고 있어. 나라 꼴이 정말 정상이 아니야. 이대로라면 우리는 스물두개국 중에 제일 먼저 무너지는 망국으로 역사에 기록될 거야."

그 말을 들은 유니벨이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러니까 시발 그게 누구 때문인……!"

"정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로드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전에 내게 말한 대로, 난 허수아비일 뿐인걸? 허수아비의 퀄리티가 아무리 구려도, 농사를 망친 잘못을 허수아비에게 물을 수는 없지. 허수아비의 성능보다는 그 주인인 농부의 노력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

"물론 내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이 나라가 이토록 기우는데 일조한 자는 마틴이야. 국민들을 쥐어짜고, 그 수입으로 식량을 구매해 다시 국민들이 사도록 유도하지. 그리고 그가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들인 돈은 다시 이 나라에 쓰이지 않아. 즉, 순환이 안 되는 거야. 게다가 자기 외의 다른 세력이 커지는걸 꺼려해서 나라의 군비 확장도 막아놨어. 이게 공직자의 자리에 앉은 인물이 할 일이야?"

"그러는 당신은 다르단 거야?"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사람들은 다 죽어나는데 허구한 날 비싼 음식만 먹고, 술 처마시고 여자랑 놀아난 변태 한량 주제에!"

"그러니까!"

로드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렇게 날 믿기 힘들면 네가 직접 하면 될 거 아냐!"

유니벨이 멈칫했다.

"…뭐?"

"사실 말이야. 나는 이 꼭두각시 포지션이 그리 나쁘지 않거든? 별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도 없고,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냐. 내가 이렇게까지 발버둥치는 이유는 날 조종하고 있는 인형사가 마음에 안 들 뿐이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모르겠어? 상업 파트를 넘긴다는 건 사실상 네가 마틴의 역할을 대신 하는 거야. 네가 그 사람 대신 나라의 자금줄을 쥐고, 테라 광산을 확보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유니벨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로드가 다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이어 말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면에서 능수능란하게 뛰어난 왕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초인이 아니라서 말이야. 나보다 더 상업에 밝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믿고 전권 위임할 거고, 나보다 싸움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길 거야. 왕은 그저 바다가 되어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도록 할 뿐인 거지."

유니벨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권한을 스스로 축소하겠다고?"

"응."

"왕인데? 권력의 최정점인데?"

"그렇지 뭐."

로드가 덤덤하게 답하자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친 사상이네."

로드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정과 종교밖에 없는 이세계에서 쭉 살아온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로드가 넌지시 물었지만 유니벨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대답이 없었다.

'하긴 자기네 식구들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겠지.'

그렇게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로드는 몇 번이고 다 떨어진 커피를 홀짝이는 걸 그만두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결정하기 힘들면 나중에 다시……"

"멈춰."

유니벨이 말했다.

"우리 쪽도 조건이 있어."

손바닥에 가려 얼굴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진홍색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더욱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첫째, 왕실에 소속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일이 모두 마무리 된 후 우리가 최종적으로 결정해."

"응, 좋아."

로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 정도까지는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 왕실에 소속되든 아니든 일이 마무리 되면 테라 광산은 우리에게 넘길 것."

'……윽!'

이건 조금 위험했다. 나라의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테라 광산을 민간 사업체인 흑익이 넘겨받는 다면, 나라 전체가 고작 상단 하나에 너무 휘둘리게 된다.

"이, 이봐. 아까 내가 한 말들은……"

"확실히 들었어."

유니벨이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난 당신을 신뢰하지 않아."

"……으으음."

이렇게 나오면 할말이 없다.

"사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거였으면 누구나 현자가 됐겠지? 당신이 그 미친 사상을 실현할지도,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도 의문.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쪽에도 그 정도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역시 상인은 상인.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로드가 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열심히 하면 왕실로 오는 거지?"

"그건 너 하는 거 봐서."

'…젠장.'

여자들의 '너 하는 거 봐서'만큼 무서운 건 없었다. 흔히 말하는 밀당녀들이 주도권은 자기가 쥐고 있으니 잘해라. 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저 말을 미끼로 남자를 죽어라 흔들어 대겠지.

'하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나……'

주도권을 잡은 줄 알았는데 다시 그녀에게 끌려 다니게 생겼다. 하지만 로드는 배짱을 부리거나 큰 소리칠 입장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장 아무런 카드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미래를 팔아 그녀의 협력을 얻어내려고 한 것이다. 백날 좋은 조건을 걸어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일뿐이었고 그것에 따른 결정권은 유니벨과 흑익에 있었다.

로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조건을 수용할게."

"그럼, 거래 성립이네. 잠깐만 기다려봐."

그녀가 소파 위에서 등을 돌려 책상 쪽에 놓인 서류를 집으러 손을 뻗었다.

"…계약서까지 쓰려고?"

"거래의 기본이지. 왜? 쫄리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문서로 남겼다가 유출돼서 우리 계획이 알려지면……"

"지금 흑익을 개 무시하는 거야? 그런 일 절대 없으니까 닥치고 있으셔."

그런데 그녀의 팔이 짧았는지 좀처럼 서류에 닿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서 가져오면 될 것을, '익! 익!' 거리며 서류와 자존심 싸움을 하던 그녀가 결국 소파 위로 엎드리는 자세로 바꾸었다.

'……호오.'

그녀의 스커트 아래로 분홍색 팬티가 보였다. 로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좀 더럽긴 하지만 취향은 그럭저럭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속옷을 찬찬히 감상하던 로드가 고개를 든 순간 유니벨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시발 새끼!"

그녀가 치마를 착 가리며 소리쳤다.

"아, 아니… 일부러 본 게 아니라!"

"역시 예전과 바뀐 게 하나도 없어!"

분위기가 급격히 살벌해졌다. 로드가 양 팔을 빠르게 휘저으며 변명했다.

"오, 오해다, 유니벨! 내가 팬티를 본 게 아니라 내 시선이 향한 곳에 우연히 팬티가 있었……"

투콱!

로드의 얼굴 옆으로 붉은 막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막대가 벽면에 박히자 후두둑 소리가 나며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로드는 뒤통수에서 식은땀이 흐르는걸 느꼈다.

"새로운 계약을 추가하겠어."

그녀가 싱긋 웃는 얼굴로 붉은 막대 몇 개를 손바닥 위에 소환했다.

"네가 이 방에서 10분을 버텨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생각해볼게."

"자, 자, 잠깐만!"

"죽어버려! 이 변태새끼야아아!"

그렇게 로드는 1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을 시달린 끝에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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