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회의 -->
또각. 또각.
이브는 팔에 서류철을 끼고 빠른 걸음으로 왕궁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은 어느 때 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마틴이 돌아오기 전까지 어비스의 클랜들을 포섭하여 왕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녀는 메이드들에게 물어 물어 실외에 있는 왕궁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이브님."
임시 정보부장인 애니록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애니록스 님. 먼저 와 있으셨군요."
이브도 마주 인사했다. 그 순간 애니록스의 얼굴에 격한 반가움과 감동의 감정이 튀어 나왔다.
"……왜 그러시나요?"
그녀가 흠칫하며 물었다.
"여기 와서 제 이름을 제대로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역시 신관님은 엘리트의 길을 걷는 분답게 교양이 넘치시는군요! 하하하!"
그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극찬을 들어도 되는 걸까. 이브는 그런 의문은 잠시 묻어두고 연무장 쪽을 바라보았다. 두 남녀가 치열하게 공격을 주고 받는 모습이 보였다. 로드와 베아트리체였다.
"…이건 또 무슨 일이죠?"
이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브님은 외근 중이라 모르시겠군요. 갑자기 폐하께서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단장에게 전투를 가르쳐달라고 조르셨답니다. 덕분에 그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하시면서 틈틈히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고 계시죠."
애니록스의 설명에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번 암살 시도 사건으로 느낀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채앵! 챙!
맑고 청아한 쇳소리가 연무장에 연달아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단검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떨어지며 불똥이 튀었다.
'더 빠르게!'
기세를 탄 로드의 공세가 이어졌고 베아트리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비만 할 뿐이었다.
그때 로드의 부츠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진하더니 손에 쥔 단검이 깊숙하게 쑥! 하고 파고 들었다.
슈팟!
베아트리체의 단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와 로드의 칼날에 가볍게 닿았다. 그러자 일직선으로 움직이던 로드의 단검이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칼날 위를 쭉 미끄러져가며 방향이 바뀌었고, 이어서 그녀의 반대쪽 팔이 로드의 이마를 가격했다.
"컥!"
로드는 그대로 단검을 놓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방금은 찌르기 공격만 연속으로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같은 동작이 반복되면. 적에게 읽혀요."
"조, 좋아! 다시 한번 더!"
로드가 벌떡 일어나고 대련이 재개되었다.
대련은 아까처럼 공격을 한번씩 주고 받는 형국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로드가 맹공을 펼치기 시작했고 베아트리체는 수비로 들어갔다.
'저 작은 검으로 방어하는데도 전혀 빈틈이 없어!'
단검이란 무기는 가상현실게임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회피 동작도 없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착착 막아내는 그녀의 단검술은 절로 감탄이 튀어 나올 만큼 현란했다.
'역시 B급 무력형 영웅은 격이 다르단 거지? 하지만!'
휘두르는 동작을 취하던 로드가 순간적으로 손에서 단검을 놓았다. 기습적인 동작이라 힘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베아트리체는 허리를 젖히는 동작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 사이 로드의 왼손은 예비용으로 마련해둔 왼쪽 포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겼다!'
챙! 단검이 뽑히며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전진했다.
퍼억!
그러나 단검이 닿는 것 보다, 베아트리체의 발이 먼저였다. 복부를 가격당한 로드의 몸이 부웅 떠올라 연무장 뒤까지 날아갔다.
쿠당탕탕!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다리를 내리며 말했다.
"……기억해 주세요. 단검을 쥔 손보다 발이 더 길어요. 짧은 거리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체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예요."
"쿨럭! 쿨럭! 으하하…! 정말로 용서가 없구나, 베아!"
지쳐버린 로드가 쓰러진 자세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어라?'
익숙한 실루엣이 바로 위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이브! 언제 왔어?"
"방금 왔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으흐흐… 더럽게 아프긴 하지만 참을만해."
로드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베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괜찮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포켓에 집어 넣었다.
그들은 연병장 근처에 있는 원형 테이블로 갔다. 로드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자 베아트리체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냉정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 로드는 가장 만족스러운 취미 생활이 된 '베아트리체 머리 쓰다듬기'를 시도하려 손을 뻗었다.
움찔!
그러나 본능적으로 놀라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뇌리에 박혀있는 트라우마가 하루아침에 낫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로드는 서두르지 않고 노력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그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아팠어, 베아!"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정수리 위에 올린 손바닥을 좌우로 비비듯 흔들었다.
"…아, 아파요! 주인님."
그제서야 그녀도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단장, 폐하의 자질은 어떤 거 같아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브가 넌지시 물었다. 베아트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의외로 잘 훈련된 전사의 몸을 타고 났어요. 그리고 유연한 전투 감각, 배짱과 과감성."
"으하하하! 역시! 우리 베아가 사람 볼 줄 아는구나!"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로드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로드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니, 무슨 말을 하려고 등까지 돌리는 거지?
"살의가 담기지 않는 어린애 장난 같은 공격."
"헉."
"본인의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본걸 흉내 내는 듯한 전투 스타일을 고집."
"윽."
"효율보다는 겉멋에 치중."
"엑."
로드가 마음의 상처를 받고 휘청거렸다. 아까 발차기에 얻어맞은 것 보다 이쪽이 훨씬 더 아팠다.
"총평을 내리자면 자신보다 약한 상대라면 의외로 잘 먹힐지도 모르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한없이 약해지는 스타일입니다."
'……정답이다, 젠장.'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로드를 완벽히 꿰뚫은 평가였다.
'하, 하긴 전투를 가상현실 게임으로 배웠으니…… 그나마 이 정도로 하는 것도 시스템 어시스트로 D급 무력등급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크흡…'
베아트리체가 자세를 되돌렸다. 그리곤 로드의 의기소침한 표정을 보고는 마음에 약해졌는지 작게 덧붙였다.
"……노,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어요."
'음, 그래. 병 주고 약 고맙구나.'
로드가 고개를 돌려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보고할게 있어?"
"네. 수인 연합회에서 협력해주기로 했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노예시장 건을 들먹이니까 구워삶는 건 간단하더군요."
"오케이!"
로드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수인 연합회.
조직 이름처럼 수인들이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며,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차별을 막는, 그러한 느낌의 조직이었다. 언더하임의 클랜들 중에서도 꽤나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수인 연합회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 어비스에 있는 수많은 수인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앞으로 로드의 계획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써먹은 소스는 마피아들의 '노예시장' 운영 건. 어비스 내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마피아들이 대륙의 다른 영지에서 노예시장을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보부에 따르면 예전에도 한 번 이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마피아들은 '우리가 노예시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대륙의 존재하는 수많은 노예들을 새 터전인 어비스로 보내기 위한 선의일 뿐이다.' 라고 해명하며 논란을 일축해버렸다. 물론 로드는 마틴이 그런 자선 사업을 할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이 나라에 신경 썼다면 진작 식량을 풀고 광부들 일급도 제대로 지급했겠지.'
그런 의문으로 뒷조사를 해보니 지금까지도 언더하임의 도시 전설로 남아있는 '수인 실종 사건'이 마피아들의 소행이었다는 근거가 포착되었다. 언더하임에 살던 묘인족 하나가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그 노예시장에서 팔린 장부를 입수한 것이다. 표본은 적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수인 연합회의 분노를 일으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수인 연합회의 설득은 같은 수인이기도 한 이브에게 직접 맡겼는데, 이 선택은 꽤나 적절하게 작용했다.
"큰 건 하나 해냈구나! 정말 수고했어, 이브."
"말보다는 보너스 올려주세요."
"…전갈 꼬치로 어떻게 안될까?"
로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이블에 퍼질러 누웠다. 그의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검어진걸 보며 이브가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그러고 보니 어제는 어디에 다녀왔다고 하셨죠?"
"아, 그 정신 나간 사이비 종교회? 이름이 뭐였더라?"
"…어머, 언더하임의 사이비 종교회라면 '더 인텔리전스'아닌가요?"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고생하셨겠네요."
이브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비 종교회 - 더 인텔리전스
그들은 지식을 숭상하는 집단으로 사이비 종교치고는 매우 유니크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이비 종교라면 교주나 사물을 신격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지식 그 자체를 숭배한다. 또한 기성 종교에 적대심을 갖는 게 아닌,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신들 또한 더 인텔리전스의 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하나의 교인에 불과하다는, 사실 다른 종교들도 우리 밑이야! 라는 엄청난 정신 승리의 속성을 갖추고 있었다.
로드는 그들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나도 지식을 숭배하오!'라고 주장하며 들어가 온갖 난관과 고충을 겪은 후(폐하! 5개 국어쯤은 할 줄 아시죠?) 더 인텔리전스의 명예 신도가 되어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로드는 회유한 조직 목록이 적힌 메모를 꺼내 '더 인텔리전스'에 체크 표시를 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마틴과 마피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을 추려낸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가 그동안 로드가 알아낸 마틴의 행태를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틴에 대한 반발감을 통해 그들을 포섭해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본적인 골자이고 황동파는 조폭클랜 통합을 위한 전력 지원, 흑익은 테라 광산의 채굴권을 걸었으며, 더 인텔리전스는 왕인 로드가 직접 명예 신도가 되어 포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각 클랜들이 요구하는 것도 제각각이라 입맛에 맞춘 선물을 가져가는 것 또한 포인트였다. 현재 로드가 포섭한 클랜은 다음과 같다.
흑익
조폭클랜 - 황동파
어비스 과학 연구소
칼리 교단
수인 연합회
더 인텔리전스
대륙 혁명단
다크엘프 모임 '하이네의 검.'
로드는 메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흑익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로드는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졸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조급함이 사라지며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인간의 머리카락이란 게 이렇게까지 부드러울 수 있을까? 그의 손에 맞춰 새근거리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각박한 현대인들이 애완동물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게 아닐까?
"저, 저기요. …폐하."
그리고 지금껏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묻혀버린 애니록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 애니! 언제 왔어?"
"……아까부터 쭉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애니록스입니다!"
"아, 미안. 너도 보고할게 있었나?"
"어비스 정신 병동에서 왕실에 협력해 주겠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한 그는 '엘리트인 내가 왜 이런 짓을……'이라며 자괴감 섞인 목소리를 냈다.
"수고했어, 애니. 역시 엘리트는 다르구나."
라고 영혼 없이 대꾸한 로드가 메모에 '어비스 정신 병동'을 추가했다.
"그런데 애니 님."
"……이브 님 마저!"
"정신 병동이라면 어비스 외곽 지역에 있는 그 수용소 맞죠? 어떤 제안으로 그들을 끌어들인 건가요?"
애니록스가 잠시 연무장 너머로 보이는 먼산을 보며 답했다.
"일요일 마다 환자들에게 간식 제공 및 봉사 활동이요."
"……아하."
이브가 머쓱하게 웃으며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폐하. 우리 너무 오버하는 거 아녜요? 굳이 그런 곳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뭐 어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빈틈없이 대비하는 거지. 그리고 그 정신 병동도 엄연히 어비스 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발언권을 가진 24개 클랜 중 하나니까. 최종적으로 마피아를 제외한 23개 조직 모두의 지지를 받는 게 내 목표야."
"……후후, 불가능한 목표로군요."
"목표는 클수록 좋은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