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4화 (24/296)

<-- 전쟁 회의 -->

23개 클랜 모두의 지지를 받는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날마다 언더하임에 나가 각 클랜을 찾아 다니고 있는 로드였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러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왕이긴 했지만.

'자, 훈련도 끝났으니 다음은 어딜 가볼 까나?'

"폐, 폐하!"

로드가 다음 일정을 고민하고 있는 그때, 정보부 요원이 다급한 얼굴로 연무장에 들어왔다.

정보부장인 애니록스가 있는데 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왔다는 것은 급박한 상황임을 뜻했다. 로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더 인텔리전스가 테, 테러를 당했습니다!"

"……뭐어?"

보고를 모두 들은 로드는 충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테러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마피아들. 그들은 마틴이 가진 검열 권한을 앞세워 들이닥쳤으나 그것은 명목에 불과했고, 사실은 일방적인 테러였다고 한다. 더 인텔리전스의 신도들에게는 목숨과 같은 책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렸으며, 파괴 행위를 막으려 하는 신도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 미친놈들이! 보는 눈은 신경도 안 쓰는 거냐?'

로드가 특히 놀랐던 점은, 명색이 테러라면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오히려 보란 듯이 저질러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테러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왕실의 편을 드는 놈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아라!' 라는 무언의 경고를 클랜들에게 던진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로드는 가신들과 헤어지고 이브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보부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폐하! 밀매상 조합에서 왕실과의 회견 자리를 거절한다고 밝혔습니다!

"폐하! 망자 연구회에서 오후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로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어휴, 바보들아. 바로 꼬리를 내리는 거냐?'

마피아들이 존재감을 들어낸 것 만으로 덜덜 떠는 어비스의 클랜들. 마틴이 없을 때도 이 정도의 존재감과 장악력이다. 대체 얼마나 이 나라에 뿌리깊게 파고들어 있단 말인가?

'역시 뭐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구나.'

로드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상황이 꼬이고 어려워 질수록 더 오기가 생기고 승부욕에 불탔다. 이것이 그가 가진 게이머로서의 성향이었다.

로드는 다시 애니록스를 불러들였다.

"마틴이 마피아 전 병력을 이끌고 간 건 아닐텐데… 누가 남아있지?"

로드가 지금까지 조사해본 바로는 이런 과격한 방식은 마틴의 방식이 아니었다. 애니록스가 바로 답했다.

"마피아 클랜의 넘버투인 '스카 파치노'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로드가 재차 질문했다.

"그럼 마틴이 언더하임에 남겨두고 간 조직원의 수는?"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50명 안팎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50명이면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어비스의 그 누구도 마피아들을 손 댈 수 없다. 사실상 언더하임을 장악하기에는 충분한 수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니."

"……애니록스 입니다만, 아무튼 말씀하시지요."

"일단은 뒷수습부터 해야겠어. 더 인텔리전스에 찾아가서 부상자들과 재산 피해액을 알아보고, 왕실 예산을 지원하고 병사들을 풀어. 왕실이 재건에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말도 잊지 말고."

"예."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쪽에서 악역을 자처하겠다면, 이쪽은 철저하게 선역이 되어 마피아의 대척점을 맡는다. 그것이 로드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브."

"말씀하세요."

"아직 약속이 취소되지 않은 클랜이 있으면 말해줘."

"네, 잠시만요."

그녀가 수첩을 꺼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여기 어비스 노숙자 협회가 아직 남아있네요."

벌컥!

"폐하! 어비스 노숙자 협회가 이틀 뒤 약속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다고…"

"……아오, 씨."

로드가 움찔했다.

"자, 잠깐만, 이브? 너 방금 뭐라고 했……"

"네? 제가 뭐가요?"

그녀가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표정과는 달리 살벌한 아우라를 온 몸에서 뿜어내고 있었지만. 로드가 재빨리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냐."

"흐응…… 그러면."

수첩을 뒤적거리며 살펴보던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나 남아있긴 한데요."

수첩에서 시선을 땐 그녀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오오! 어딘데?"

*

어비스의 제2 영지, 드러그팜의 성.

어둠이 드리운 성 꼭대기.

달빛이 처연하게 비추는 창가를 배경으로,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은 남자는 느긋하게 시가를 태우며 밤의 평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마틴이었다.

"……계획은 어떻게 됐나?"

그의 입에서 낮고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공입니다. 얼마 안 가 기별이 올 겁니다."

그리고 마틴의 상대 목소리는 책상에 놓인 통신 수정구에서 들리고 있었다. 마틴은 물고있던 시가를 손에 쥐며 말했다.

"본인이 그렇게 못미더운가? 로드 폴렌티아는 애초에 내가 옹립한 꼭두각시. 그것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건 쉬운 일이다."

"……당신의 힘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의 로드 폴렌티아는 당신이 알던 그 무력한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마틴이 느릿하게 웃었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 봐왔던 본인보다 더 잘 안다는 투로 말하는군."

"가끔은 아들에 대해 부모보다 친구가 더 잘 아는 경우도 있지요. 그리고 오펙투스를 끌어들여 당신이 드러그팜에 가도록 움직임을 강요한 그의 계획은, 미약한 허수아비치고 제법이지 않습니까?"

마틴은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볼 뿐, 남자의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도 로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로드 폴렌티아는 만만한 적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계획이 과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알겠다. 결과가 같다면 방법은 상관치 않겠다. 하지만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

마틴의 눈빛이 번뜩였다.

"약속은 지켜라."

"……후후, 물론입니다. 정말이지 나라를 '끔찍하게' 아끼시는군요."

그 말에 마틴이 '푸흐흐' 웃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수정구의 마력이 거의 끝났다. 다음 연락은 언제지?"

"상황이 마무리되면 저희 쪽 사람이 새로운 수정구를 들고 올 겁니다. 그럼, 맡겨드린 일은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죠."

이내 수정구의 마력이 사라지며 영상이 꺼졌다. 마틴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잔에 피처럼 붉은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와인 잔을 들어올려 창가로 보이는 달을 가렸다. 붉은 액체가 출렁이며 이내 달의 모습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

"흐아아아아……"

로드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설마 게, 게이바였다니이……"

어비스의 24개 클랜 중 하나인 '더 게이즈'. 그리고 그곳 클랜장의 논리는 이랬다. '마피아고 왕이고 믿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이나 게이는 믿을 수 있다!' 그렇게 그는 로드를 일일 게이바 점원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자세한 회상은 생략한다.'

로드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순정을 지켜내며 마침내 '더 게이즈'의 협력을 얻어냈다. 회장이 로드와 악수하며 말한 한마디가 그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언제나 게이는 옳다!'

"역시 이 동네는 미쳤어."

로드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낮에는 왕실 전체가 비상이라 어수선했지만 밤이라 한적했다. 이 평화가 좋았다. 그 놈의 문을 열어 젖히면서 '폐하!'라고 외치며 나쁜 소식을 보고해 멘탈을 박살내는 요원들이 없어서 평온했다.

로드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벌컥!

"폐하!"

"아, 젠장."

애니록스가 요란스럽게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폐, 폐하! 큰일났습니다!"

"또 뭔데……?"

"아, 아, 아로게쓰가!"

"아로게쓰가 왜."

"정말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

왕실은 다시 비상이 걸렸다. 로드는 퇴근했던 이브를 다시 불러들였고 암살단원들은 모두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긴급 대기 상황에 들어갔다.

이어서 애니록스의 보고에 따르면, 아로게쓰는 현재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언더하임으로 오고 있으며 그 중 특화 병종인 '엑스 워리어'의 수만 500명이라고 했다. 총 병력 수가 그렇게 압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특화 병종이 전체의 오분의 일이니 아로게쓰의 최정예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드는 이마를 감싸며 고민에 빠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오펙투스에게 말한 아로게쓰의 침공 소식은 로드가 지어낸 거짓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린 것이다.

'내가 놓친 게 있나? 생각. 생각을 해보자.'

아로게쓰는 초반 올인 전략을 준비했다가 로드에게 그 사실을 들켜 채팅창에 폭로 당했고, 하는 수 없이 병력 양성을 줄였다. 로드는 이것으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로게쓰의 이른 타이밍의 공격. 초반 올인 전략의 타이밍까지는 아니었어도 로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2500이란 병력 수는 애매했다. 차라리 좀 더 일찍 쳐들어오거나, 아니면 병력을 더 모으고 다듬어서 어비스가 개척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가장 취약한 때를 노리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미 병력 양성까지 줄인 아로게쓰가 어째서 다시 부랴부랴 군대를 꾸려 어비스를 침공한단 말인가? 로드는 뭔가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타이밍은 어비스의 상황과 맞물려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현재 국내 최강의 영웅인 마틴 워커와 마피아의 정예 병력들이 그들의 근거지인 드러그팜으로 올라가 있었다. 따라서 언더하임은 적의 공격에 무척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공격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던 거지?'

아로게쓰는 '어비스 스파이'와 같은 강력한 탐지 병종도 없었고, 문화적 특성상 첩보 기술이 발달한 국가도 아니었다.

'그저 우연일 뿐?'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로드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분석은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의 손이 지휘관 창 위로 향했다.

- '로드 폴렌티아'님이 '콜린 롤링'님께 1:1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몇 분 정도 지나고 콜린 롤링이 대화를 수락했다는 알림이 뜨며 새로운 스크린 창이 떠올랐다.

"아, 로드 님.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콜린은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아, 죄송합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서……"

"네? 설마."

"전에 말씀 드린 대로입니다. 아로게쓰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콜린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한결 잠이 달아난 표정으로 물었다.

"제게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건…… 아직 도와줄 국가를 구하지 못한 듯 하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 저번에 제가 드렸던 제안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콜린은 한숨을 푹 쉬더니 답했다.

"좋습니다. 확실히 말씀 드리죠. 로드 님께는 죄송하지만 저희는 타국의 전쟁에 끼어들 여력이 없습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콜린의 선택은 타당했다. 안 그래도 초반이 약해 병력을 아껴야 하는 오펙투스이다. 만에 하나 아로게쓰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고 해도 병력 손실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고, 어비스가 속국으로 들어와도 적은 병력으로는 6개국에 둘러싸인 영토를 감당할 힘이 없을 것이다. 본인 능력 이상의 것을 욕심내면 분명히 탈이 난다. 카오스월드 게이머들의 지론이었다.

즉, 오펙투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상황은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아로게쓰가 어비스를 집어삼켜 더 강성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수록 더 병력을 아끼고 개척시대로 빠르게 넘어가는 게 정답이었다.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콜린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희의 사정만 들먹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사소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사실 로드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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