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25화 (25/296)

<-- 전쟁 회의 -->

"저한테 부탁이라… 뭐죠?"

"저희 국경선 근처에 배치하셨던 병력들을 본토로 후퇴하도록 해주십시오."

로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펙투스는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있었다. 바로 어비스와 아로게쓰가 서로 싸우다 약해진 틈을 타 어부지리를 노리는 한 수. 로드는 아직 콜린에 대해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

여기서 거짓말로 둘러대고 병력을 그 자리에 둔다고 해도 어비스의 감시망을 피할 수는 없다. 콜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로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답을 기다렸다.

"로드 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 어라……?'

너무나 깔끔담백한 승낙. 딱히 고민하는 기색도 없었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로드는 아리송한 의문을 품고 고개를 숙였다.

"협조에 감사 드립니다."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별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하네요. 어비스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스크린 화면이 꺼지며 콜린과의 1:1대화는 끝이 났다.

"후아아아아."

로드가 머리를 젖히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콜린과의 대면 이후 의문이 더 늘어나기만 했다.

"일단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로드가 오펙투스의 병력을 물리게 한 것은, 오펙투스의 어부지리 전략을 막기 위한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드는 다시 애니록스를 불러 드러그팜에 전서구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내용은 '아로게쓰가 언더하임으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속히 언더하임으로 복귀하라. 오펙투스의 병력은 본토로 물러나고 있으니 드러그팜은 걱정할 필요 없다.' 라는 것이었다.

'이 자식의 도움을 받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마틴이 내려오면 기껏 로드가 고생해서 키워놓은 왕실의 영향력이 도로 줄어들어버리는 리스크가 있다.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마틴이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의 영향력이 지금 이상으로 더 커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의 세력 다툼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둘 수는 없어. 왕권 강화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

결국 로드가 생각한 답은 마틴이 언더하임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

"……뭐어어?"

로드의 입에서 경악성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서구를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답이 안 왔다고?"

보고를 위해 온 애니록스가 진땀을 흘리며 해명했다.

"저, 저희도 혹시나 해서 따로 사람을 드러그팜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마저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마 마틴에게 억류된 것 같은……"

쾅!

로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애니록스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마틴. 언더하임이 당하면 다음은 네 차례다.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텐데.'

마틴의 이상 행동으로 로드의 의문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드러그팜에 잔류할 이유를 없애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마틴.

마치 이쪽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듯,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해 들어온 아로게쓰.

그리고 아로게쓰의 이 공격 타이밍은 마치, 마틴이 내려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만 같지 않은가?

"……애니."

"예, 하명하십시오."

"이브한테 가서 왕실 간부들과 각 클랜장들이 참석하는 비상 회의를 소집하라고 해."

"왜 엘리트인 제가…… 가 아니고 회의 주제는 뭘로 할까요?"

로드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전쟁."

*

어비스 왕실에 위치한 대회의실.

로드가 지시한 대로, 이브는 회의실로 어비스의 클랜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왕실에 대해 호의를 가지지 않은 클랜들도 있었고, 마피아 테러건으로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클랜들도 있었지만 '전쟁'이라는 한 마디에 다들 허겁지겁 참가했다.

손을 곱게 모은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이브가 복도를 한번 슥 바라보더니 말했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클랜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로드가 회의 테이블 상석에 앉자 이브가 다시 착석을 명했다.

'…역시 마피아의 대표는 안 왔군.'

로드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서열대로 앉은 건지, 아니면 그냥 멋대로 앉았는데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알아보기 쉬운 배치였다.

상석으로부터 오른쪽은 '흑익'의 상단주 자리였다. 어쩐 일인지 유니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저번에 로드를 안내했던 한쪽 눈에 안대를 쓴 노년 신사가 대리 자격으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왼편에는 300명의 경비대를 이끄는 언더하임 경비대장인 한스가 앉았다.

두 노인들의 바로 아래 자리에는 용병길드 마스터인 '메넬라오스'가 보였다. 어비스의 용병길드는 전형적인 친 마틴 세력이었는데, 마틴이 일거리를 던져주는 주요 고객이라 그런 듯 했다. 맞은편에는 이미 로드가 회유한 조폭클랜의 대표이자 황동파 보스인 '피닉스 다크파이어'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친밀함의 표시인 듯 윙크를 했다. 로드는 못 본 척 했다.

다시 그 밑으로 수인 연합회 회장으로 알려진 팬더 인간 '스노노'가, 맞은편에는 용병 길드와 조폭클랜에 뒤쳐지지 않는다고 알려진 강력한 무장 세력 '붉은 망치단'의 클랜장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모험가 연합, 흑마술 교단 칼리, 어비스 노숙자 협회, 더 게이즈 등 14개클랜이 참석했으며 왕실과 경비대까지 합쳐 총 16개 조직이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물론 마피아처럼 소집령에도 참석하지 않은 클랜도 있었으며, 하버트의 연구소처럼 전투와 큰 관계가 없는 클랜들은 이브가 일부러 호출에서 제외했다.

"그럼,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로드가 입을 열었다.

"…아로게쓰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회의 주제가 '전쟁'인만큼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짐작만 하는 것과 왕이 직접 공표하는 것의 무게는 전혀 다른 법이었다.

이어서 로드는 스파이를 통해 알아낸 정보들을 공개했다.

"적 병력의 수는 2500명. 그 중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액스 워리어'가 500명입니다. 지휘관은 '바얀'이라는 장수입니다."

"아니, 잠깐! 그런데 이런 긴급한 상황에 마틴 대부는 뭘 하고 있단 말이오?"

한 클랜장의 물음에 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틴 숙부는 아마 오지 않을 겁니다."

"……!"

로드의 충격 선언에 회의장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이미 마틴 숙부 쪽으로 전서구와 사람을 보냈지만 응답은 없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진 지금까지도 답을 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마 언더하임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랜장들이 저마다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다들 마틴이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패닉 상태가 되어버린 듯 했다. '이 나라는 끝장이다!', '마피아의 전력 없이 무슨 수로 그 야만인들을 막는단 말인가!' 등등 벌써부터 패색이 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마틴 대부가 오지 않는다니! 이게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소?"

어비스 용병길드의 마스터, 메넬라오스가 테이블을 쿵! 내리치며 말했다. 모두들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거요! 여기 이 폐하께서, 각 클랜들을 돌아다니시며 마틴 대부에게 등을 돌리라는 것을 강요하고 다닌다는 소문 말이오!"

"……"

회의장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의도대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신감을 얻은 메넬라오스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심지어 이미 그 꼬드김에 넘어간 자들도 있지."

메넬라오스의 시선이 황동파의 피닉스와, 수인 연합회의 스노노에게 머물렀다.

"마틴 대부가 수도를 비운 그 잠시를 못 참고 선동과 분열, 배반의 징조들이 떠돌아다니니! 그분께서 소문을 전해 듣고 얼마나 진노하셨겠소! 이 일의 책임은 왕실과 그에 동조한 몇몇 클랜들에게 있소이다!"

그 말에 친 마피아 성향의 몇몇 클랜들이 슬그머니 동조의 뜻을 밝히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하긴, 마틴 대부가 그동안 나라를 위해 해온 게 얼만데!"

그들의 동의까지 힘에 업은 메넬라오스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왕실에서는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직접 드러그팜으로 올라가 공식적인 사죄의 뜻을 밝힌 다음, 마틴 대부를 이곳으로 모셔와야만 할 것이오!"

풋.

결국 로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회의장이 조용해지다 못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제가 무슨 우스운 말이라도 했습니까? 폐하."

메넬라오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로드는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좋아요. 백 번 양보해서 메넬라오스 마스터의 말이 모두 맞다고 칩시다. 그럼 제가 몇몇 클랜들을 회유했다는 걸 이유로, 마틴 숙부는 이곳에 남겨진 당신이나 다른 클랜들, 그리고 이 언더하임의 모든 국민들을 헌신짝 내팽개치듯 버릴 수 있는 겁니까?"

"뭐, 뭐요? 그게 무슨……!"

"그렇잖아요? 돌아와 달라는 전서구에 답장은 없고, 제가 보낸 사람까지 드러그팜에 역류시켜 버렸습니다. 사실상 거절의 뜻을 밝힌 겁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왕실의 선동? 하! 마틴 대부는 지금 사소한 내부의 정치 문제에 국민들의 목숨을 저울질하고 있는 겁니다."

의외의 반격에 메놀라오스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로드는 일부러 잠깐 반박할 시간을 주었으나 그는 원래의 입장만 반복할 뿐이었다. 로드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치고 나왔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사소한 내부의 세력 다툼에 선량한 국민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저는 제 자존심을 버리고 마틴 숙부에게 도와달라는 청을 했죠. 그분이 다시 돌아오면 제가 계획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숙부는 어땠습니까? 침묵을 가장한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게 진정으로 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크, 크흠흠."

이번엔 왕실이 회유한 클랜들을 중심으로 로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목소리들이 조금씩 튀어 나왔다. 역시 정치의 기본! 국민을 등에 업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분위기가 조금씩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마틴의 오른팔… 스카 파치노라고 했나? 넌 실수했어. 비록 내가 개최한 회의라도 마피아는 이 자리에 참석했어야 했다.'

만약 마틴이 아니더라도 마피아의 대표가 떡 하니 이 자리에 앉아있었더라면, 중립 입장의 클랜들은 마피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은 전시고, 전쟁 상황입니다. 더 이상 우리 내부 문제로 왈가왈부 할 때가 아니라 함께 힘을 합쳐 이 나라를 지켜야 할 때입니다. 비록 마틴 숙부가 우릴 버렸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도 해낼 수 있습니다!"

"오오!"

"맞는 말이오!"

"이대로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소! 해 봅시다!"

분위기가 다시 달아올랐다. 로드가 테이블 위로 깍지를 꼈다.

"자,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생각해둔 책략이나 의견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을 로드는 곧 후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