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회의 -->
종족도 달랐고, 국적도 달랐으며, 문화도 달랐다. 생각하는 게 달라도 이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들 말하는 의견들이 제각각이었다.
먼저 의견을 낸 것은 모험가 연합의 대표였다.
"언더하임으로 오는 길목 근처에 트롤이 출몰하는 숲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놈들을 유인해서 야만인들과 트롤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 그리고 우리들은 트롤들이 싫어하는 돼지 똥을 몸에 듬뿍 발라 놈들의 공격을 피해 유유히 떠나는 거지요!"
이번엔 붉은 망치단의 클랜장이 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상대가 아로게쓰의 야만인들이라 해도,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하면 그 싸움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우리도 화끈하게 정면 승부로 맞불을 놓아야 하오! 우리 붉은 망치단이 선두에 서겠소이다!"
"이히히힛! 그게 아니지요! 그들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건 어리석은 일! 야만인 놈들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산적단의 수령 히그마가 말했다.
"놈들은 먹고 싸고 자고 싸우는 것 밖에 모르는 놈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미끼가 되어서 잠시 놈들과 싸워 주는척하면 신이 나서 달려들겠죠. 그 사이 우리 산적단이 후방에서 놈들의 보급품을 모조리 터는 겁니다! 그리고 놈들이 굶주렸을 때 언더하임 특제 발정약을 음식에 묻혀서 뿌리면……."
"저딴 발정난 개소리는 무시하쇼! 자, 행님들! 보쇼! 보쇼! 들어 보쇼!"
어비스 노숙자 협회의 협회장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대충 언더하임으로 오는 길목에 쪼매난 성을 하나 만들어 놓는 거요! 그곳 창고에 술과 고기를 잔뜩 박아 놓는 겁니다! 그럼 놈들이 옴마나! 하면서 전쟁 전에 연회를 한답시고 그 안에 들어가 먹고 즐기다 독한 술에 뻗어버리겠지요? 그때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안에 불을 지르면? 짜?잔! 벌써 끝나버렸네?"
"짜잔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 작은 성을 어느 세월에 만듭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더 게이즈의 회장이 한마디 했다.
"우리 게이들이 미남계로 야만인들을 유혹하겠어요!"
'……그냥 다 꺼져줬으면 좋겠다.'
로드는 왜 회의를 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막장도 이런 막장 회의가 없었다.
"자, 모두들 조용! 조용! 그만 싸우세요!"
이브가 열심히 중재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논쟁은 불이 붙다 못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먹을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무법지대인 언더하임에서 살면서 닳도록 닳은 자들이었고, 성격도 불같았다. 의견이 부딪치자 삿대질에 욕설까지 오고 갔고 당장 주먹을 휘두를 기세로 말싸움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회의가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려는 그때…….
쾅!
"아, 시끄러워!"
유니벨이 문을 걷어차며 회의실로 들이닥쳤다. 그녀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흥, 다들 뭘 꼬라봐? 눈 안 깔아?"
로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는 로드 자신이나 상단원들에게만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냥 모두에게 공평하게 싸가지가 없었다.
그래도 어비스의 실세는 달라도 뭔가가 다른 듯,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잔뼈 굵은 클랜장들이 하나 둘씩 제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오셨군요, 상단주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외눈 노인이 일어나 인사했다.
"응, 나 대신 수고했어. 할아범."
유니벨이 성큼성큼 걸어와 본인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두 다리를 테이블 위로 턱 올려놓는 불량한 자세 또한 잊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유니벨."
로드가 웃으며 말했다. 저 얼굴이 이토록 반가워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헐, 지금 변태왕 주제에 지각했다고 나 혼내는 거야? 기껏 상회일 대충 넘기고 뛰어 왔는데!"
"그거 눈물 나게 고맙네."
로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브에게 눈짓했다. 이브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모두들 주목해주세요. 처음은 그런 구체적인 계획들 보다는 먼저 큰 틀을 잡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녀가 지휘봉으로 보드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언더하임과 근처의 지형지물을 나타낸 지도가 붙어있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언더하임의 성문은 북쪽과 동쪽에 하나씩, 나머지 방향은 산맥에 막혀 있으므로 이 두 성문만 지키면 됩니다. 그리고 수성전에 대한 변수를 말씀 드리자면……"
그녀의 지휘봉이 지도의 성문을 한 곳을 가리켰다.
"현재 동쪽 성문의 상태가 많이 나쁩니다. 성문이 오래되고 갈라져서 다른 나무들로 급하게 덧대 놓았지만 상태는 여전히 취약합니다. 현재 아로게쓰의 추정 병력은 2500명이며, 두 성문을 동시에 공략하기엔 병력의 수가 적으니 동쪽 성문 한 곳을 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브의 설명에 클랜장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 상황에서 저희가 취할 전술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녀의 지휘봉이 언더하임 성벽의 내부로 향했다.
"열악하긴 하지만 성을 활용하여 싸우는 수성(守城)."
이번에는 지휘봉이 성 밖으로 향했다.
"성의 활용을 포기하고 전장 선택의 이점과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출성(出城)입니다."
"……흐으음."
클랜장들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어려운 문제라 그런지 아까와는 달리 바로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로드가 제안했다.
"그럼 배치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의 가용 전력을 먼저 파악해 봅시다."
가장 먼저 왕실의 친위대 200명과 암살단원 30명, 언더하임 경비대가 300명이 있다.
흑익은 아쉽게도 대규모 상단 호위 업무 때문에 대다수의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다. 따라서 현재 대기하고 있는 가용 병력은 1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어비스 용병단 100명, 부상자를 제외하고 전투 가능한 황동파 조직원 100명, 수인 연합회 100명, 붉은 망치단 70명.
그 외에 다른 클랜들의 크고 작은 병력들까지 모두 합쳐 총 1500명이었다.
여기에 도시의 예비병을 동원하면 어떻게든 적과 동일한 2500명 정도는 맞출 수 있었다. 계산이 끝나자 이브가 말했다.
"수는 거의 동률이군요."
"응. 하지만 전력의 격이 달라. "
아로게쓰는 긁어모은 병력도 아니고 민간인이 섞인 것도 아닌, 전원이 훈련을 받은 순수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500명은 특화 병종 중인 '액스 워리어'였으니 로드의 말대로 전력의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병력 계산이 끝난 후, 다시 회의실에서는 출성과 수성에 대해 논의가 벌어졌다. 6:4 정도로 수성이 근소하게 앞섰다.
수성파들의 논리는 병력의 질 차이가 크니 낡은 성문이든 뭐든 있는 구조물이라도 최대한 써먹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출성파들의 논리는 어차피 그런 성문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며, 성의 이점을 살리긴 커녕 오히려 아로게쓰의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돌파 당해 도시가 유린당할 위험이 크다고 했다. 차라리 출성을 하여 다른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폐하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브가 물었다.
"흠, 글쎄."
로드는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펼치는 클랜장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다른 성향, 너무 다른 스타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 개성 넘치는 자들을 어떻게 써먹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만약 마틴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는 십중팔구 카리스마로 클랜장들을 휘어잡고 '내 말을 따라라!' 하며 일갈했을 것이다. 그리고 군대는 단순한 명령체계와 상명하복이 필요한 조직이니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로드 자신은 마틴과 같은 그런 힘도, 영향력도, 남들을 휘어잡을 압도적인 카리스마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굳이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이들의 개성을 죽이는 게 아니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로드는 클랜장들이 싸우도록 내버려 둔 채 홀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로드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이번 토론은 전과는 달리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전술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남아있는 패를 가다듬어 보아도 강력한 아로게쓰의 군대를 막을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냉정하게 생각할수록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결론만 도출되었다. 그것은 점점 그들의 의욕을 갉아먹어갔다.
"……일단은 그 야만인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 주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클랜장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놈들이 술과 여자를 그렇게 밝힌다고 하니 값비싼 명주들과 어비스의 미녀들을 100명 정도 뽑아 진상하면……."
"에라이, 병신아!"
유니벨이 그 클랜장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외쳤다.
"시발, 니들이 그러고도 사내 새끼들이야? 엉? 가랑이 사이에 달린 그 쓸모없는 거 때서 끓는 솥에 처넣어 부족한 식량 상황 해소에 일조하시지?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이 구차한 목숨 연명할 고민만 하는 패배자 새끼들아!"
"하, 하지만 상단주! 여자나 재물 정도만을 소모해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거야 말로 많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입니다."
엉덩이를 맞은 클랜장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우리보다 신체 조건도 월등하고, 하루하루 격한 전투를 치르며 단련되어 있어요. 짐승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말 그대로 야만인들이란 말입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군사 훈련은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고, 할 줄 아는 건 잡다한 잔기술뿐… 게다가 우리 국민들은 영양 상태도 나빠서 무기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조차 의문입니다! 승산이 거의 없단 말입니다!"
"하, 하지만!"
"그럼 상단주께서는 다른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유니벨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비스에선 마틴, 베아트리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자이지만 본질은 상인이다. 상업에는 밝았지만 이런 전략 전술에는 약했다.
그리고 이 혼란한 틈을 타서 메넬라오스를 비롯한 친 마틴파가 다시 득세했다.
"아, 고민해봐야 별 수 없다니까 그러네! 답은 하나뿐이오! 왕실이 마틴 대부에게 용서를 비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올시다!"
다른 클랜장들도 조금씩 전쟁을 이길 방법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나마 피닉스와 붉은 망치단의 클랜장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쟁이라며 그들과 맞서고 있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오랫동안 홀로 고민을 거듭하던 로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저도 제안을 하나 내놓겠습니다."
여태껏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로드가 발언하자 모든 클랜장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수성과 출성 전략만 있는 게 아닙니다."
"……?"
"입성(入城)전략도 있습니다."
클랜장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야, 변태왕! 쉽게 설명 안 할래?"
유니벨이 툴툴댔다.
"그러니까, 일부러 적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 시가전을 유도하는 겁니다."
로드가 일어나 보드판에 붙은 지도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적은 분명 취약한 동쪽 성문으로 올 것이고, 서문은 클랜들이 모여있는 '상업 지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의 장기를 총동원 할 수 있는 장소인 이 상업 지구에서 말이죠."
"그게 무슨……!"
클랜장들이 수군거렸다.
"일부러 우리의 도시를 전쟁터로 삼는다는 겁니까? 그런 짓을 하면 이쪽의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겁니다!"
"그래도 자질구레한 시설 피해가, 여자들을 바치고 목숨을 구걸한다는 불안전한 가능성을 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놈들이 제물만 받고 마음을 돌려 우리의 목을 치면 어쩔 겁니까?"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아까 발언했던 클랜장을 노려보자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저도 인정합니다. 정면 승부로는 아로게쓰의 전사들을 상대로 승산이 없죠. 하지만 전장이 우리의 홈 그라운드인 언더하임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