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회의 -->
클랜장들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자 로드가 고개를 돌렸다.
"피닉스!"
"예, 큰형님."
"너희가 맨날 짱박혀있는 그 미로 같은 뒷골목이 무대다. 적이 외부인이라면 거기서 몇 명까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뒷골목에서 싸우란 말요?"
피닉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남? 나와바리에서 우리 조폭들은 무적이오. 약간의 지원만 있으면 골목 하나당 백 놈이 붙어도 거뜬하오."
"모험가 연합!"
로드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뒤에 앉은 젊은 청년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아, 옛!"
"아직 테라 광산 던전의 초장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면서, 이대로 야만인들에게 던전과 보물들을 넘겨줄 겁니까?"
"그, 그럴 수야 없지요!"
"앞으로 삼 일이면 저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바람총을 몇 개까지 만들 수 있겠습니까?"
"조금 무리하면 오백 개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래 소형 몬스터를 잡는 용도라, 마비침 한두 방으로는 놈들을 쓰러트리기 힘들 텐데요."
"칼리 교단."
로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칼리 교단의 클랜장은 고아원을 운영하던 그 노파였다. 그녀가 대답하자 로드가 씩 웃으며 턱짓을 했다.
"……그렇다는데요?"
"저희들의 흑마술 극독을 쓰면 5분안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입니다. 흘흘."
"좋습니다."
로드가 지도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놈들은 상업 지구의 길목으로 진군할 것이고, 그 양 옆의 시가지에 매복해있으면 바람총의 짧은 사거리로도 충분히 맞출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활보다 유리하죠. 그리고 수인 연합회."
"응! 폐하!"
팬더 인간 스노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길목을 통과하는 적들의 시야를 교란시킬 만한 방법이 없을까?"
"우리 쪽 두꺼비 친구들! 입에서 바람나와! 흙먼지 일으키는 거! 잘 해!"
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
"대충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술과 재능을 총동원하여, 상업 지구를 요새화시키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선 왕실이 검수만 할 뿐, 전적으로 각 클랜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클랜장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우린 약합니다. 하지만 이 언더하임에서 만큼은 우리가 최강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다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로드가 클랜장들을 한 명씩 슥 훑어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를 믿고 싸워주시길 바랍니다."
*
우거진 수풀을 가르며 전진하고 있는 군대가 있었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쩍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을 자랑했으며 일반 규격보다 크고 투박한 무기들을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의 잘 조직된 군대로서 강한 군기나 정돈된 움직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병사들 하나하나의 육체와 눈빛은 개인 그 자체로 완전하게끔 느껴졌다.
"……"
그리고 그 군대의 행렬을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서 관찰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주위의 나뭇잎으로 완전히 몸을 은폐한 그는 한쪽 눈동자가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이, 같은 시간에 언더하임의 한 스크린 창에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도착해가는군.'
로드는 지도 창과 스파이가 보여주는 상황을 몇 번 대조해 보고는 적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지휘관 창을 종료하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전쟁이구나.'
에덴에 오고 나서 첫 전쟁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려서 좀처럼 진정 되질 않았다. 그때 이브가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밀었다.
"드세요."
"어, 땡큐. 이거 뭐야?"
컵을 받아 드니 안에는 우유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백색의 불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브가 묘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어비스 사람들이 자주 많이 먹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뭐냐고?"
"정말로 알고 싶으세요?"
그렇게 묻는 이브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아, 아니. 배려 고맙다."
로드가 한 모금 마셔보았다. 살짝 비린내 같은 게 느껴졌지만 정말로 우유와 비슷한 느낌에 은은한 단맛이 났다.
"좋아, 이제 말해봐. 뭔데?"
"트롤의 젖이에요."
"콜록! 콜록!"
로드가 몸에서 일어나는 거부 반응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들 쪽으로 뛰어 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큰형님!"
피닉스였다. 그의 뒤로는 황동파 조직원들이 각종 건축 자재들을 들고 있었다.
"이쪽 준비는 모두 끝났소! 이번엔 큰형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거요! 한 번 와서 봐주쇼!"
"곧 갈게. 그리고 그 되도 않는 방해물들은 다 치웠지?"
"더 개조했소!"
"아오, 그냥 치우라니까! 그런 걸 깔아두면 적이 함정인 걸 바로 알아보겠다."
피닉스와 조직원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드가 혀를 차며 휘휘 손짓을 했다.
"알았어. 곧 가볼 테니까 눈에 안 띄도록 더 보수해봐."
그 말에 피닉스와 조직원들이 꺄르륵! 웃으며 멀어져 갔다. 그에 이어서 다른 클랜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로드를 찾아왔다.
"이거 수정구 어떻게 작동시키는 겁니까?"
"밀가루 폭탄의 체크를!"
"애들을 요렇게끔 배치할 건데 어떻당가?"
로드는 친절하게 하나하나 지침을 내려주었고, 명확한 해결책을 얻은 사람들은 기뻐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하하… 좀처럼 쉴 틈이 없네."
"폐하."
"어, 왜?"
"이쪽 세계에 오기 전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의외의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브가 로드 본인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묻는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으음. 의외로 낯선 환경에 대해 적응력이 상당하고, 의외로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의외로 잡다한 지식들도 많으시니까."
"……왜 자꾸 ‘의외로’를 붙이는 거냐."
"의외로 모험가 쪽 계열 일을 하신 게 아닐까요?"
그녀의 결론에 로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살짝 비슷하긴 했지만 오답!"
"그럼 뭐예요?"
"방구석 게임 폐인! 좀 더 쉽게 말하면 일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백수라고나 할까!"
"……노숙자셨군요."
"그, 그 정도는 아냐!"
로드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폐하가 말씀하신 건 모험가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후후후, 우리 쪽 세계는 굳이 직장 같은 걸 가지지 않아도 집에서도 충분히 모험을 즐길 수 있어. 사실 밖에서 하는 것보다 집에서 하는 모험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재밌다구."
"이해가 잘 안되네요. 아, 그런 건가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집에 아내 몰래 하나씩 숨겨두고 있다는 나만의 은밀한 파라다이스……."
"……부,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거 말고 진짜 모험이야!"
로드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사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내게는 이미 학습된 내용이라고나 할까? 클리셰를 따르는 거라고나 할까."
"또 이해 못할 말씀을 하시네요."
이브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천천히 알려줄게. 나도 그런 생활을 하면서 얻어낸 나름대로의 팁이란 게 있거든."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문 쪽 상황을 체크하러 간다며 먼저 떠났다. 로드도 잠깐의 휴식으로 다리에 힘이 붙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당신이 말했던 그런 거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허, 헉! 놀래라."
언제 왔는지 유니벨이 팔짱을 낀 채 골목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로드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니. 이건 그냥 현재 상황에 맞추어 최선의 방법을 고안해 낸 것뿐인데…."
"흐응."
그녀가 다가와 팔꿈치로 로드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조용히 같이 걸어.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말고."
'……전형적인 삥 뜯는 대사 아니냐? 그거.'
두 사람은 골목을 빠져 나와 함께 상업지구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은, 전쟁 준비를 하는 것 치고는 사람들이 활기가 넘쳤고 또 즐거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 준비라기보다는…… 그, 그거 아냐? 학교 축제 반 부스 꾸미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로드는 위화감이 소름 끼치는 익숙함으로 바뀌어 버려 그 온도 차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야, 변태왕."
나란히 걷고 있던 유니벨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꼬맹이."
"꼬맹이 아냐!"
그녀가 발끈하며 외쳤다.
"나도 변태왕 아닌데."
"넌 변태 맞잖아! 사람이 잠시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치마 속이나 훔쳐본 새끼가!"
"……마, 말했잖아. 우연히 시선이 향한 곳에 팬티가 있었을 뿐이라고."
"그걸 변명이라고 해? 내 주먹이 향한 곳에 당신 면상이 있는 꼴 한번 보고 싶냐!"
한 나라의 왕과 최고 상단주의 대화 내용 치고는 유치하기 짝이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결국 로드가 정강이를 한대 얻어맞은 것으로 이 화제는 끝이 났다.
"……어째서 이런 방법을 쓴 거야?"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로드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허수아비 왕이긴 하지만 말야.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깐 엄연히 어비스의 최고 통솔자잖아? 그냥 말 안 듣는 클랜장들 본보기로 목을 확 쳐버리고, 그 기세로 다른 애들도 휘어잡아서 군대답게 바꾸는 게 낫지 않아? 명색이 용맹하기로 소문난 아로게쓰의 병사들과 전면전을 펼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로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로드라고 잘 꾸려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 적국의 군대와 힘과 전략을 겨루는, 그런 화려한 전장의 모습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카오스월드의 전쟁은 그런 낭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은 이상일 뿐이었다.
"그런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동안 허수아비로 군림해온 무늬만 왕인 왕이잖아. 그렇게 분수에도 안 맞는 강경책으로 나가면 분명히 탈이 생겨. 다른 클랜에서 내 명령을 순순히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헤에?, 그런 리스크가 두려워서?"
"아,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지나가던 붉은 망치단원이 걸죽한 목소리로 로드에게 아는 척을 했다. 로드도 인사를 받아주며 그와 하이파이브하고는 다시 유니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내가 잘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흥, 그러니까 당신의 능력 부족?"
유니벨이 약 올리는 듯한 웃음을 띄웠다.
"…흐흐, 부정하지는 않겠어. 전해도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면에서 능수능란한 초인이 아니야. 내가 잘 하는 분야는 극히 한정되어 있지. 그리고 만약 그런 방식을 써서 공포 분위기로 군권을 장악한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래서야 지금 쳐들어오는 아로게쓰의 군대와 차이점이 뭐가 있지? 이미 한참을 앞서있는 그들을 어중간하게 따라갈 바엔, 우리만의 특징들을 살리는 게 가장 좋다 이거야. 헤엄으로 물고기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려 애쓰는 게 아니라, 트랙을 깨고, 육지로 올라와서 말을 잡아타는 게 더 빠를 수 있다는 거지."
"……너 말이야."
유니벨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시발, 내가 어리다고 자꾸 이상한 식으로 논점을 흐리면서 빙빙 돌려 말하는데, 그런다고 모를 줄 알아?"
"쳇, 들켰다."
"…그러니까 그 둘을 따라갈 엄두가 안 나니까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다는 거 아냐."
"그렇게 낮잡아 말하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군."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유니벨은 이마를 감싸며 '하아, 내가 어쩌다 이런 새끼랑……'이라고 구시렁거렸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로드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등을 돌렸다. 유니벨도 눈을 깜빡이더니 로드를 따라 등을 돌렸다.
언더하임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근처에는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긴 자신들이 쓸 공간이라며 싸우는 사람들, 내 아이디어 따라 하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마차는 이쪽이 필요하다며 자재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 이 와중에 잡동사니들을 팔아먹으려고 돌아다니는 암상인들과, 전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네 신을 믿으라고 포교활동을 하는 교단도 있었고, 뜬금없이 매춘부와 게이가 한 고객의 양 팔을 붙잡고 싸우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하버트의 연구소에서 들린 게 틀림없는, 쾅! 쾅! 거리는 폭발음이 연달아 거리에서 울려 퍼졌다.
완벽한 언더하임의 모습이었다.
"어때?"
로드가 물었다.
유니벨은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냥 평소 우리의 모습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