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시가전 -->
이틀 후.
"추장, 언더하임에 도착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아로게쓰의 사령관, 바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어깨하는 아로게쓰의 전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큰 몸집과 덩치를 자랑했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에 두피 좌우를 삭발한 모히칸 스타일에, 다른 전사들처럼 우락부락한 상체 근육을 드러내었으며 몸에 난 무수히 많은 상처들은 화려한 색의 문신들로 뒤덮여 있었다.
"선발대의 정찰 결과를 보고하라."
"예. 우선 자무카 대추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바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됐군."
"그런데 이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더하임의 상황이 너무 수상합니다."
"무슨 소린가?"
"언더하임은 북쪽과 동쪽에 성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북쪽 성문에는 아주 소수의 병력들만이 성벽을 지키고 있었으며, 동쪽 성문은 최소한의 병력도 없이 성문이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바얀의 눈썹이 꿈틀했다.
"……성문이 열려있다고? 그럴 리가 있는가? 언더하임은 명색이 한 나라의 수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놈들도 알고 있을 터."
"하,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문을 열어놓았지만 백기가 걸려있거나 항복의 문서를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얀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이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흐음…… 알겠다. 보고를 계속하라."
"예! 그리고 열린 성문 안을 얼핏 살펴보니 거리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흐음."
바얀이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북문은 병력이 지키고 있다고 했으니 어비스 놈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항복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놈들은 서문 쪽으로 우릴 유인하는 게 목적이겠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추장! 아마 도시에 병사들을 매복을 시켜놓은 게 아닐는지……."
그 말에 바얀이 껄껄 웃었다.
"좋은 매복 포인트라면 이미 우리가 오는 길목에 얼마든지 있었을 터! 전장을 자신들의 도시로 삼으면 전쟁이 승패와 상관없이 그들의 피해만 커질 텐데, 왜 도시에 병력을 매복시킨다는 말이더냐!"
"그, 그것까지는 저도 잘…… 하지만 역시 동쪽에 뭔가 장치를 해두었으니 일부러 성문을 열어 놓은 게 아니겠습니까? 역시 찜찜한 서쪽은 내버려두고, 북쪽 성문을 공략하는 게……."
"하하하하!"
대뜸 큰 소리로 웃던 바얀이 매서운 눈초리로 부관을 노려보았다.
"귀관은 정녕 우리 대 아로게쓰의 전사인가?"
"예? 예! 그, 그렇습니다! 추장!"
"선발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본분을 착각하지 말라, 전사여! 이건 놈들의 도발이다. 우리더러 들어 올 수 있다면 들어와보라는 교활한 도발이란 말이다. 만약 우리가 열린 성문에 지레 겁먹고 북쪽 성문을 공략한다면, 아로게쓰는 대륙의 웃음거리로 놀아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승리를 거머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승전보를 전하면서도, 부끄러움에 대추장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하, 하지만 굳이 함정인걸 알고도 들어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괜찮다."
바얀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앞뒤 생각 없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대추장의 말에 따르면, 지금 언더하임에 남은 자들은 오합지졸들일 뿐이다. 군사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자들이 절대다수지. 그런 놈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좋은 지리적 조건으로 승부를 뒤바꿀 수 있는 수준 차가 아니란 말이다!"
그가 허리춤에 찬 자신의 도끼 한 쪽을 가볍게 꺼내 들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놈들의 교활한 계략에 흔들릴 필요 없다! 전장은 오로지 더 강한 전사가 승리할 뿐. 그것이 전장의 하나뿐인 진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믿고, 우리가 그동안 흘려온 피를 믿는다! 전군 출진하라!"
"와아아아아아아!"
아로게쓰의 2500명 전사들이 물밀듯이 언덕을 내려왔다. 그들의 시선 너머로 언더하임의 성벽이 보였다.
*
쿠구구구구쿵!
힘 좋은 병사들이 성문에 달라붙어 군대가 통과하기 쉽도록 완전히 열어젖혔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무혈입성이었다.
사기가 오른 바얀군은 당당한 걸음으로 성 안에 들어왔다.
"……이건."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정적에 잠긴 황량하고 텅 빈 거리였다.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허와 같은 공간.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전개와는 양상이 달랐다.
"…왕궁은 어느 쪽인가?"
바얀의 물음에 그의 부관들 중에서 참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쿨란이 대답했다. 그는 다른 전사들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에 머리숱도 풍성했다.
"저쪽입니다, 추장.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쿨란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과연 높다란 건축물 한 채가 보였다. 바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놈들이 매복해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열을 유지하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왕궁으로 간다!"
바얀군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회색 도시는 왠지 모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오히려 이런 이질적인 정적이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언더하임에서는 자주 불어 닥치는 흙바람만이 그들을 반겨줄 뿐이었다.
"……큭."
도시 깊숙이 나아가던 바얀이 팔로 눈을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지나가는 모래바람 치고는 강했다. 시야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게다가 도시 한가운데서 이 정도의 모래바람이라니… 바얀의 머릿속에서 '설마' 하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이 모래바람은 자연적인 게 아니다!"
그가 빠른 어조로 외쳤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전군! 진군 속도를 높여라! 신속하게 이곳을 돌파해 왕궁으로 간다!"
어차피 함정에 걸린 것이라면 빠르게 돌파하는 게 답이라고 바얀은 판단했다. 병사들의 걸음 속도가 점점 올라가더니 급기야 뜀박질로 변했다.
그렇게 그들이 모래바람을 뚫고 상업 지구 중간 즈음에 도달할 때였다.
"끄, 끄아아악!"
"허억!"
"살려줘!"
모래바람 곳곳에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매, 매복이다!"
"습격에 주의하라!"
아직도 모래바람의 사정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하게 몰아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흙먼지에 의해 먼 곳의 시야는 제한되어 동료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쿠쿠쿠쿠쿠쿵!
이번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들이 통째로 기울어지더니 병사들이 있는 자리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뚫고 불쑥 무너지는데다가 병력들이 길목에 밀집해있어 피해가 제법이었다. 사방에서 부상자가 발생했고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업 지구 길목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매복조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래를 막기 위한 터번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나타나 철저하게 치고 빠지며 아로게쓰 병사들을 괴롭혔다.
"놈들의 수법에 현혹되지 마라! 앞만 보고 진군하라!"
바얀의 부관들이 돌아다니며 독려했으나 매복조들의 수법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
특히 납치한 부상자를 쇠사슬로 묶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것을 미끼로 다른 부족원들까지 낚아 죽이는 수법은 전사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아로게쓰 전사들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심지어 죽어가는 부상자의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들고 밧줄에 묶어 보란 듯이 건물에 매달아 놓는 경우도 있었다.
"으, 으아아악! 도, 도와줘!"
또다시 동료 하나가 매듭에 목에 걸려 거리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주위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국가 간 문화가 다르다 해도 저들도 전쟁에 참여한 전사인 이상, 응당 무기 한번 휘둘러볼 기회는 주어야 마땅했다.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전사 하나가 도끼를 뽑아 들고 성큼 성큼 걸어갔다.
"이, 이봐! 어딜 가? 지금은 진군 중인……."
"내 형제가 잡혀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지막하게 말했다.
"남의 족장의 명령을 따르는 것 보다 내 부족원들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해! 흰독수리족은 나를 따르라!"
아로게쓰의 군대는 크고 작은 부족의 전사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는 형태였다. 사령관인 바얀 또한 자무카로부터 지휘권을 위임 받은 한 사람의 족장일 뿐, 그들은 타 족장의 명령보다 피가 섞인 형제처럼 동고동락해온 부족원들의 안위와 복수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몇 족장들이 격한 분노를 표출하며 통제를 벗어나 습격자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어이쿠, 잘못 걸렸군."
골목으로 내달리고 있던 피닉스의 오른팔 칠리가 뒤를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흰독수리족의 족장이 직접 부족원들을 이끌고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거기 서라!"
"형제의 복수를!"
부족원들이 바짝 쫓아왔다. 칠리는 도망치면서도 주위에 널려 있는 쓰레기 더미나 잡동사니들을 휙휙 던져댔다. 덕분에 가장 선두에 달리고 있는 족장만 우스운 꼴이 되어갔다. 칠리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된 듯 등을 돌렸다. 부족원들도 뒤따라 걸음을 멈췄다.
"네이놈들! 비열한 짓거리로 형제들의 목숨을 빼앗다니! 네놈들을 죽여 억울하게 죽어간 형제의 명예를 되찾으리라!"
"전쟁에서 방심하다 죽은 사람 잘못 아니오?"
칠리가 손가락을 까닥했다.
"한 번 덤벼보랑게요. 거기 머리 위에 바나나 껍질은 좀 치우시고."
족장이 바나나 껍질을 내팽개치며 달려들었다.
"잘근잘근 씹어 죽여주마!"
후웅! 한번에 머리통이 날아갈 정도의 완력이 담긴 도끼가 연속으로 휘둘러졌다. 칠리는 몸을 뒤로 빼거나 바짝 숙이고, 벽에 딱 붙는 등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갔다.
'큭, 공간이 너무 좁다!'
족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족원들을 잔뜩 데리고 왔지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 도끼의 움직임이 턱 하고 멈췄다. 휘두르려던 도끼가 그만 벽에 박혀버린 것이다.
"역시 무기는 작고 빠른 게 최고지."
칠리가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족장은 빠른 반응으로 팔이 날아가는 것을 피했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 비열한 자식!"
"그런 말은 싸움에서 이기고나 하쇼."
족장이 분노의 고함을 내지르며 남은 한 손으로 도끼를 휘두르려는 순간, 칠리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 터뜨렸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밀가루가 터져 나와 족장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크, 크아악!"
칠리가 그대로 달려들어 족장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가 '끅끅' 거리는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더니 이내 쓰러져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 이 비겁한 놈!"
"후후후, 이게 바로 뒷골목의 싸움이란 거요."
칠리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벽 위로 창문이 벌컥 벌컥 열리며 조직원들이 활이며 바람총이며 잡동사니 같은 각종 원거리 무기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로게쓰의 병사들은 머리 위로 날아오는 공격에 간단히 노출되어 픽픽 쓰러져 갔다. 좁은 골목이라 제대로 피할 틈도 없었다. 결국 사색이 된 부족원 하나가 소리쳤다.
"제, 젠장! 도망쳐!"
그들이 등을 돌려 뒷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어느새 뒤로도 조직원 셋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 언제 뒤를?"
그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며 조직원들이 시시덕거렸다.
"물론 동료의 복수도 중요하지만, 뒷골목에 널려있는 쓰레기통을 한번쯤 발로 차보고 지나갈 생각 못 했어? 얼마나 순진한 거냐? 야만인."
이제는 칠리 쪽에서도 조직원들 몇 명이 더 붙었다. 칠리가 외쳤다.
"시간 없어, 쳐라!"
고립된 아로게쓰의 병사들이 전멸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리가 모두 끝나자 칠리는 다음 유인 작전을 명했다.
아로게쓰의 병력들이 지나고 있는 큰 길목에서, 좌우의 주거지로 나있는 좁은 골목들, 그곳엔 수많은 조폭 클랜원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골목에서 이와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규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지만 홈 그라운드인 뒷골목에서만큼은 아로게쓰의 병사들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