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시가전 -->
골목마다 구성 또한 제각각이었다. 칠리처럼 적을 유인한 다음 위에서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 골목이 있는가 하면, 수인족의 코뿔소 인간을 영입해 좁은 골목에 몰려든 병사들에게 돌진시키는 골목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연금술 상회와 제휴를 맺어 각종 폭발물을 활용하거나, 매춘부와 손을 잡고 미인계로 적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등 클랜간의 특징을 살린 개성 넘치는 코스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거, 이거, 너무 좋군요! 아?주 좋아!"
하버트가 바닥에 쓰러진 아로게쓰 병사의 목에 주사기를 꽂으며 중얼거렸다. 주사기의 액체가 줄어들자 병사가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이렇게나 신선하고 품질 좋은 실험체들이 제 발로 걸어와주다니!"
하버트가 쓰러진 병사의 복근을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본 몇몇 조폭클랜 조직원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저 자식이랑 손을 잡았을까' 하는 회의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게다가 보너스로 우리의 제품들을 실험해볼 기회까지! 어비스에 와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었을까요? 아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폐하!"
하버트가 양팔을 뻗으며 왕궁 방향으로 큰절을 했다. 조직원들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장님! 화학 트랩 5종세트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가운을 입은 하버트의 연구원이 달려와 보고했다. 하버트가 빙그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 들었죠? 친애하는 동맹 아다만티움파 여러분! 어서 또 실험체를 유인해 오도록 하세요! 오호호호홋!"
*
한편, 로드는 이 모든 광경을 지휘관 창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길목 곳곳마다 설치해둔 마력 수정구가 영상을 감지하여 로드의 지휘관 창에 화면을 출력시키고 있었다. 이 마력 수정구들은 지휘관 창과 연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서 플레이어들이 특히 자주 쓰는 도구였다.
'흐흐흐, 내가 아로게쓰에 대한 공략법도 없이 주신전에 뛰어들었을까 봐?'
주신전이 열리기 전 지구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카오스월드 베타 테스트. 로드는 이 세 차례의 서로 다른 아로게쓰 플레이 데이터를 완벽히 머릿속에 집어놓은 상태였으며, 그 덕분에 나라 전반의 문화와 풍습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로게쓰는 여러 호전적인 부족들이 '대추장'이라는 자의 이름하에 통합되면서 건국된 국가로서, 그 역사가 짧고 아직 왕정이라는 체계도 완전히 잡히지 않은 나라였다.
아로게쓰의 특징 중 하나는, 전사의 명예를 숭상하는 전사들끼리 날마다 서로 전투를 벌이며, 이 싸움에서 훌륭한 전사들, 즉 D급 이상의 무력형 영웅들이 자주 배출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문화 때문에 아로게쓰는 언제나 대륙에서 가장 많은 D급 무력형 영웅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이 하급 영웅들이 대체로 하나의 작은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의 군대 안에서도 작은 부족들이 소대처럼 움직이는데, 어느 정도 훈련이 잘된 아로게쓰의 군대는 적의 매복과 기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스스로 진형을 변형하며 맞받아치는 경지까지 오르기도 한다. 마치 유기물처럼 기민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약점 없는 군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로게쓰라는 나라의 강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전제 조건, 이러한 체계가 굳어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즉, 초반에는 이 강점이 통용되지 않으며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그 약점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원인이었다.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로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자무카는 한 가지 실수를 했어. 최고 영웅을 사령관으로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대추장인 그가 직접 왔었어야 했다.'
B급 무력형 영웅인 바얀도 결국 한 사람의 족장일 뿐이다. 대추장의 대리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과연 다른 족장들이 이러한 상황을 좋게만 받아들일까? 아니다. 각 족장들은 지휘관의 명령보다는 부족원들의 안위를, 전쟁의 승리보다는 부족의 명예를 더 중요시하게 된다. 부족 단위 군대의 명확한 단점이었다.
이것은 로드의 단순한 예상이 아닌, 세 차례의 아로게쓰를 관찰한 결과 나온 당연한 인과관계였다.
'강력한 초반 군사력을 가진 아로게쓰가 항상 쉽게 무너져 버리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아로게쓰는 병사들의 압도적인 하드웨어와 기원 시대 특화 병종의 강력함 때문에 '초반 강국'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그들의 잠재력을 100% 발휘하려면 아로게쓰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무카가 이쪽의 힘든 사정을 염두하여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수의 병력을 보낸 결단력은 칭찬할 만 하다고 로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의 약점에 눈이 팔려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고려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즉 디테일이 부족했다.
이러한 배경을 파악하고 있었던 로드는 홈 그라운드인 상업 지구를 무대로 병사들에게 기습과 매복을 명했다. 바얀이 직접 지휘하는 전방 부대는 통제에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후방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모래 바람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진군 속도를 높이면서 후방 부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것 또한 지금의 상황에 한몫 했다.
"자, 그럼……."
로드가 전원이 꺼져있는 수정구를 꺼내 연결했다. 수정구에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바로 지금이야. 부탁한다!"
"넵!"
쿠쿠쿠쿠쿠쿠쿵!
아로게쓰의 군대가 지나고 있는 중간 지점의 바닥이 움푹 들어가더니, 이내 지면이 통째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바닥 위에 서있던 병사들은 갈팡질팡 하다가 모래 속에 파묻혀 구덩이에 떨어져 버렸다.
"성공!"
"킥킥킥!"
두더지 인간들이 저들끼리 킥킥거리며 모래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구덩이에 갇힌 병사들이 빠져 나오려고 모래벽을 기어올라봤지만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갑작스런 구덩이의 출현으로 군의 허리가 끊겨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로게쓰의 전방 병력은 계속 빠른 진군 속도를 유지했고 후방과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젠장, 일단 골목으로 우회해서 다른 루트를 찾는 것이 어떻겠소? 어서 선두를 따라잡아야 하오! 이대로 있으면 고립될 것이오!"
한 족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는 건 놈들이 원하는 바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방해되는 건물들을 부수고 가는 게 편해!"
"아니 다들 무슨 헛소립니까! 지금 우리 부족원들이 구덩이에 갇혔다고! 형제들 먼저 구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지휘자의 통제가 사라지니, 급기야 족장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쟁과 다툼이 있으면 언제나 결투로 해결하는 문화였기에 서로 간에 합의를 해야 할 상황이 닥치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 도중에 한가히 결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뒷골목의 공격에 병사들은 착실히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
"추장! 후방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부관 쿨란의 보고에 바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되돌아가기엔 또 늦었다. 더 신속하게 움직여 놈들의 심장부를 박살낸다!"
바얀과 그가 이끄는 전방 부대는 오히려 더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바얀 휘하의 부족원 들이거나, 명예로운 '액스 워리어'의 호칭을 부여 받은 최정예들이었다.
후방을 도우러 가지 못한 점은 가슴 아팠으나,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빨리 어비스의 왕을 찾아내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되돌아가는 것은 적들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뿐이다. 바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 판단이 정답인 듯하군.'
흙먼지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바얀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어비스의 병력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을 돌파하기만 하면 상업지구를 빠져 나와 바로 왕성이다. 어비스에서도 더 이상의 진격은 허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장! 위험합니다!"
"음?"
싸움을 앞두고 피가 끓어오르는 나머지 발밑을 보지 못했다. 바얀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어비스 진형과 아로게쓰 진형 사이에 널찍한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검은 물 같은 것이 고여 있었다.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이 액체 때문에 섣불리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다. 결국 두 진영은 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국면이 되었다.
그때 어비스 진형 사이로 젊은 청년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발 머리에 기묘한 색감의 눈동자. 바얀은 그가 바로 어비스의 왕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어비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로게쓰의 위대한 전사여."
바얀도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호오, 나를 아는가?"
"알다마다. 그대의 명망 높은 이름 두 글자는 대륙 전체에 알려져 있지."
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명성 운운하기 전에 바얀은 로드가 개인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는 캐릭터였다.
에덴에서는 기존의 카오스월드에서 등장했던 인물들과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이 섞여서 등장했는데, 특히 바얀은 아로게쓰의 주력 영웅으로 자주 쓰인, 꽤나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알아봐주니 감개무량하군. 나도 당신을 알고 있다. 어비스의 우왕이자 폭군, 로드 폴렌티아."
"……하하하! 부정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면전 앞에서 들으니 기분이 묘하네."
바얀은 대화를 멈추고 상황을 다시 세심하게 살폈다. 로드가 이끌고 있는 병력은 대략 500명 정도. 무기와 갑옷도 제대로 갖춰있지 않은 다른 습격자들에 비해 이들은 장비도 좋았고 제법 군사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 나름 이 나라의 정예들인 모양이었다.
"성대한 환영 인사는 잘 받았다, 무법자들의 왕이여! 병력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나름대로 방어 체계를 갖춘 점은 칭찬해 줄만하군. 솔직히, 당신들이 이 정도로 저항할 수 있을 줄은 예상 못했다."
"…오호, 그 말은 역시 우리의 사정을 꿰차고 있었단 거네?"
로드가 눈을 빛냈다.
병력이 없다는 바얀의 말은 확실히 정확했다. '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질적인 병력은 여기 있는 500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다 민간 조직의 인력이거나 도시에서 차출한 예비 병력이었다.
"정보원은 어디지?"
로드가 그렇게 묻자 바얀은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우문이군. 그걸 내 입으로 밝힐 것 같은가."
"하하, 그건 그래."
"사설은 이쯤 하지. 우리 쪽 후방 부대들이 자네의 계략 때문에 여러모로 고전하는 모양이야."
바얀이 양 손에 투박한 전투 도끼를 쥐고는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투항하라는 소리는 않겠다. 네놈들 전원,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하라!"
무릎을 굽히는 자세를 취한 바얀이 돌연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그의 몸 뒤로 태양이 번쩍이는 듯 하더니 이내 빠르게 어비스 진형 쪽으로 떨어졌다. 목표는 최전방에 있는 로드였다.
'…저런 무식한 돌진을!'
병력들의 호위도 없이, 그리고 저 넓은 구덩이를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었다.
바얀의 두 도끼가 내려와 로드의 몸을 조각내려는 찰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뒤바뀌어 베아트리체가 대신 자리에 나타났다.
"……!"
그녀가 날렵한 동작으로 뛰어올라 내려오는 바얀의 얼굴을 차올렸다. 동시에 두 도끼와 단검이 허공에서 크게 한 번 부딪쳤다. 까아아아앙! 귀청을 때리는 금속음과 함께 바얀의 몸이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풍덩! 검정색의 흙탕물이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무릎이 잠길 정도의 깊이였다.
"……이 나라는 여러모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고개를 든 바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런 작은 여자가 내 상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로드 폴렌티아."
로드가 다시 앞으로 걸어 나와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손을 올렸다.
"뭘, 이 나라에 온지 제법 지났으면서 아직도 모르겠어?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구."
"……흠."
아까 베아트리체와 무기를 맞댈 때의 반동으로 팔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흘렀다.
"그래도 나름 이 나라의 강자인 건 확실해 보이는군. 좋다!"
투콰앙! 바얀의 몸이 예비 동작도 없이 미사일처럼 튀어나갔다. 그 동작으로 한 순간에 구덩이를 빠져 나온 그가, 언덕 위에 있던 베아트리체와 격돌했다.
콰아아앙! 금속끼리 부딪쳤다고 생각할 수 없는 맹렬한 폭음이 일어났다. 주위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좋다, 전력을 다해서 상대해주마! 모두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