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시가전 -->
바얀이 앞장서자 병사들 또한 망설임 없이 검은물이 고여 있는 구덩이로 뛰어 들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 것은 그 유명한 아로게쓰의 액스 워리어들이었다. 그들이 양손에 도끼를 쥔 채 검은 물을 첨벙거리며 달려 나가는데 마치 평지에서 전력 질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빨랐다. 그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경비대장 한스가 소리쳤다.
"놈들이 사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쏴라!"
어비스 진형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구덩이에서 질주하는 액스 워리어들에게로 쏟아졌다. 방패가 없는 양손 무장이었기에 화살 공격에 취약했으나 그들의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빨랐다. 어느새 구덩이를 거의 다 건너고 있었다.
"방패를 세워라!"
철컥! 철컥! 철컥!
그들이 구덩이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검보병들이 절벽에 버티고 서서 방패를 내세웠다. 액스 워리어들은 머리 위로 두 도끼를 들어 올려 방패를 두들겨야 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힘이 온전히 들어가지 않은 공격임에도 검보병들의 방패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드가 혀를 내둘렀다.
'평지에서 붙었다간 그냥 몰살당했겠군.'
능히 두 배, 새 배의 병력 차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광전사들이었다. 동등한 상황이라면 어비스의 오합지졸 병력들은 그야말로 갈갈이 찢겨나갔으리라. 그나마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다.
'…특화 병종 부럽다, 부러워.'
*
전황은 팽팽하게 흘렀다.
액스 워리어들이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것을 검보병들이 방패로 막아 세웠으며 그 사이로 창병들이 창을 찔러 넣어 견제했다. 원거리에서는 궁병들이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 보내 적병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언덕을 올라와 방패에 착 달라붙은 액스 워리어들의 돌파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의 파괴력에 조금씩 방패 라인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슬슬 뚫겠군."
구덩이 밖에서 전장을 조율하고 있던 쿨란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선 족장이 인상을 쓰며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쿨란. 생각보다 놈들의 방어선이 단단하오! 이렇게 찔끔찔끔 보내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달려들어 힘으로 뚫어버립시다."
"그건 곤란합니다."
쿨란이 무릎을 굽혀 검은물을 바라보았다.
"이건 평범한 흙탕물이 아닙니다. 여기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이십니까?"
"…기름이라고 하셨소?"
족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 설마 적이 화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요?"
"바로 그렇습니다. 본래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바얀 추장께서 적에게 싸움을 거시는 바람에 일이 좀 꼬이게 되었습니다. 여차하면 놈들이 이 검은 물에 불을 붙일 터이니 우리는 조금씩 지원 병력을 보내야만 합니다."
"……하여간 교활한 것들!"
쿨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전황을 살폈다.
"하지만 앞서 나간 선발대가 잘해주고 있습니다. 적 방어선이 무너지고 저들이 조금만 더 뒤로 물러난다면, 즉각 투입 병력을 늘려 밀어버릴 수 있습니다."
"참모 나리!"
후방 상황을 살피러 보냈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쿨란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후방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길목 중간에 나타난 구덩이에 후방 부대의 발이 묶였으며, 다른 길을 찾으러 골목으로 들어간 부족들은 매복조의 집중 포화를 받아야 했다. 어비스의 군사들은 도시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퍼진 채 철저하게 게릴라 위주의 전투만을 펼치며 아로게쓰 군대의 발목을 붙들어 놓고 있었다.
'……아주 작정을 했군.'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실상 저 앞의 500을 제외한 전 병력을 매복에 사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전면을 가로막고 있는 저 병력들만 뚫어낼 수 있다면 전세는 단숨에 기울어질 것이었다.
이번엔 쿨란의 시선이 구덩이에서 싸우고 있는 바얀쪽으로 돌아갔다.
퍼어엉!
세찬 물소리와 함께 검정색 파도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이내 번쩍 하는 한 줄기 섬광이 파도를 양단하였다. 자세를 숙여 그 일격을 피한 베아트리체가 고쳐 잡은 단검을 절단된 파도 사이로 밀어 넣었다.
채앵!
바얀의 도끼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검을 튕겨냈다.
바얀이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고 베아트리체도 뒤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까다롭군.'
바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금방 결판이 날거라 생각했지만 무기를 맨몸으로 통과해 버리는 까다로운 영체화 능력 때문에 좀처럼 화끈하게 싸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베아트리체는 처음 상대해보는 부류의 적이었다.
바얀은 끓어오르는 피를 식히며, 냉정한 눈으로 도끼와 단검의 거리를 계산하며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두었다.
베아트리체의 입장에서도 상대가 까다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체격과 완력의 차이가 있는데다가, 바얀은 겉모습처럼 거칠고 투박한 전투 스타일이 아닌 도끼질 한번 한번이 정교하고 빈틈이 없었다. 심지어 베아트리체의 영체화 타이밍까지 계산하면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잘못 움직였다간 역으로 당해버릴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속으로 서로가 난적임을 인정하며,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쇳소리가 전장을 울리며 검은 물방울들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튀어 올랐다.
'베아가 잘 버텨주고 있다.'
로드는 가슴 졸이며 그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웅들끼리의 일기토는 전략이 개입할 수 없는 순수한 무력의 싸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로드는 다시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어느새 몇몇 지점은 방패 라인이 무너지고 백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백병전은 명백히 액스 워리어들의 영역이었다.
"캬햐! 쳐라!"
"죽어! 죽어라! 쓰레기들!"
방어진이 갖춰진 부대를 도끼 두 개만 달랑 들고 밀어 붙이는 그 모습은 어비스의 병사들의 입장에선 악몽과 같았다. 이에 질겁한 병사들의 기세가 꺾이며 진형의 견고함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로드는 즉시 방패 라인 쪽으로 병력을 충원했고, 후방의 병사들에게는 여분의 방패를 나르라고 지시했다. 액스 워리어들에 의해 방패가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로드가 손을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내자 검은 깃발이 들어 올려졌다.
삼십 명 밖에 없는 어비스의 특화 병종, '어비스 어쌔신'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침투하여 도끼를 휘두르느라 여념이 없는 액스 워리어들을 집중적으로 암살했다.
'개척시대에서나 훈련할 수 있는 고급 병력이다. 절대 허무하게 잃을 수 없어.'
로드는 어쌔신들에게 생존을 최우선 명령으로 지시해 두었다.
또한 D급 무력형 영웅이나 통솔형 영웅들을 위험한 방패 라인에 파견해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들이 개입함으로서 조금씩 방패 라인이 안정을 되찾았다. 액스 워리어들이 나가떨어지면 다시 검보병들로 하여금 방패를 언덕 정면에 배치하게 했다. 로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악물고 버틴다.'
방패 라인이 강화되자 아로게쓰에서는 화공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구덩이 안으로 투입 병력을 더 늘렸다. 최고 지휘관인 바얀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먼저 투입된 병사들의 성과가 지지부진했기에 내린 선택인 듯 했다.
애초에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아로게쓰 쪽이 더 많았다. 전면의 방패 라인은 교대도 없이 모든 체력을 불사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지쳐버릴 것이다.
'이제 그 녀석이 합류할 때가 됐는데…….'
로드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좋은 타이밍이었다. 유니벨이 도착했다.
"꺄하하하!"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양갈래의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유니벨이 하늘에서 자유 낙하하고 있었다.
"……!"
그녀가 공중에서 빙글 빙글 돌며 양팔을 떨쳤다. 빨간색의 마력을 머금은 원통형의 막대들이 넓게 퍼져 비처럼 내렸다.
"뭐, 뭐야?"
구덩이 물을 가르며 오고 있던 병사들이 놀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유니벨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콰콰콰콰콰콰쾅!
마력으로 이루어진 작은 다이너마이트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요란한 폭음이 연달아 잇따르며 주위가 새빨간 빛의 향연으로 가득 차올랐다.
"도와주러 왔어, 리체."
폭발의 불꽃을 스포트라이트삼아 유니벨이 검은 물이 고인 구덩이로 사뿐히 내려왔다. 주위에는 폭발에 휘말려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로 가득했다.
"…네년은 또 뭐냐?"
베아트리체와 대치하던 바얀이 시선을 돌려 물었다.
쐐애액!
그러나 대답 대신 유니벨이 던진 붉은 파스텔이 들이닥쳤다. 바얀이 다급히 양 손의 도끼를 휘둘러 쳐냈으나, 뒤이어 날아온 탄환들이 맹렬한 빛이 되어 붉은 장미와 같은 폭발을 불러들였다.
콰앙! 쾅! 폭발의 충격에 바얀이 신음성을 흘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네년은 또 뭐냐니? 시발, 말 한번 더럽게 하네."
"……네가 더 심해. 유니."
베아트리체가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유니벨은 콧방귀를 뀌며 베아트리체의 옆에 섰다.
"아직도 못 끝냈어? 거들어도 되지?"
베아트리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얀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저 빨간 머리의 소녀도 여기 있는 암살자 못지않은 강자임에 틀림없었다.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아저씨. 우린 다구리라던가 집단구타라던가 하는 게 생활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니까."
유니벨이 두 팔을 교차한 채로 들어 올리자 손가락 사이로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파스텔들이 나타났다.
"리체, 주전은 맡길게. 간다!"
교차한 유니벨의 팔이 펴지자 시뻘건 섬광이 일직선으로 바얀에게 쇄도했다.
'빠르지만 궤적은 단순하다.'
바얀의 양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쩍! 쩌적! 두 도끼가 춤을 추자 그의 등 뒤로 갈라진 투사체의 잔해가 흩날렸다.
"흐응?."
유니벨이 재차 팔을 흔들었다. 그녀의 팔이 덜컹거릴 때마다 마치 한 자루의 총이 되어 붉은 꼬리를 남기는 투사체를 쏘아 보냈다.
바얀은 그리 어렵지 않게 투사체를 쳐내는 듯 했다. 그러나 점점 투사체의 성질이 변해갔다. 폭발의 타이밍이 빨라지더니 이제는 도끼날이 투사체의 몸체를 파고드려는 순간 딱 폭발했다. 유니벨의 영점이 완전히 잡혀버리자, 바얀은 투사체를 도끼로 쳐내더라도 폭발에 데미지를 입어야 했다. 연이은 폭발에 그의 움직임이 점점 경직되었고 전방의 시야가 가려졌다.
"……!"
그 순간, 바얀은 뒤에서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한기를 느꼈다. 그가 본능적으로 목을 뒤틀자, 실선 같은 붉은 줄이 그어지며 아슬아슬하게 베아트리체의 단검이 빗나갔다.
'이 꼬마들이!'
도끼의 무게 때문에 반응이 늦다. 그런 판단이 든 바얀은 망설임 없이 왼손의 도끼를 놓았다. 손에 착용한 건틀렛만으로도 저렇게 작은 소녀들을 무력화시키기에는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의 주먹이 이제 막 바닥에 착지한 베아트리체를 노리고 움직였다. 오른손의 도끼는 영체화에 대비하여 시간차로 휘둘러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반응은 특별했다. 착지하며 낮은 자세에서 시작한 그녀가 손바닥을 바닥에 붙이더니 몸을 뒤틀어 발로 바얀의 주먹을 받아냈다.
"……!"
바얀의 머릿속엔 그녀가 정면으로 공격을 받아낼 수의 가능성은 없었다. 움직임이 꼬여버리며 오른팔의 도끼가 한발 늦게 휘둘러졌으나 그것은 실책. 유니벨의 폭탄이 날아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퍼벙! 퍼버버벙! 어마어마한 충격에 바얀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빌어먹을, 까다로운 콤비로군.'
두 소녀 모두 어비스 출신답게 전투의 변수를 만들어 내는데 능했다. 그저 올곧은 힘과 기술의 위력으로 승부가 나는 아로게쓰의 전투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