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시가전 -->
후우웅!
숨 돌릴 틈도 없이 베아트리체가 달려들었다. 바얀의 몸 앞으로 바짝 파고든 그녀가 발차기 자세를 취했다.
'턱을 노리는 건가.'
다리의 움직임을 계산한 바얀이 재빨리 머리를 젖혔지만, 통증은 무릎 관절 쪽에서 왔다. 바얀이 본 것은 그저 페이크 동작, 그녀는 발차기를 가함과 동시에 발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다리는 여리여리했지만 바얀이 무릎으로 느끼는 충격과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다리를 회수한 베아트리체가 이번엔 손에 든 단검을 움직였다.
'큭'
바얀이 도끼를 들어올리는 방어 자세를 취하자, 베아트리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작을 취소하며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그녀가 비키자마자 붉은 빛을 내뿜는 탄환들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쿠쿵! 쿠쿵! 쿠콰콰콰쾅!
연달아 폭발이 터져나오며 바얀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콜록! 이런 비겁한!"
그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겁한 게 아냐."
베아트리체가 단검을 겨누며 천천히 걸어왔다.
"…싸움에서 상대를 속이고 허점을 유도하는 건 당연. 당신은 아직 치열하게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뿐."
그 말에 바얀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사로서 꽤나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아직 어린 애송이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렇다면…….'
바얀은 전방의 베아트리체는 무시한 채 측면으로 도약했다. 그의 노림 수는 멀리서 번거로운 지원 사격을 가하고 있던 유니벨이었다.
'죽어라!'
후우우우웅! 바얀의 도끼가 산사태와 같은 기세로 휘둘러졌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유니벨이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예비 동작 없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튀어나간 그녀의 발이 바얀의 손목을 때렸다. 그것으로 도끼의 궤적이 틀어졌다.
"이것도 일종의 페이크랄까."
유니벨이 발차기의 반동으로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거칠게 팔을 위로 올렸다.
쩌억!
막대 두 개가 솟구쳐올라 바얀의 턱을 세게 때렸다.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그의 발이 잠시 바닥에서 떠오를 정도였다.
이어서 폭발이 일어나며 바얀의 몸이 크게 기우뚱했다.
"내가 근접전에 약할 거라고 생각했지?"
바얀이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사이 수 개의 붉은 탄환이 몸 곳곳에 작렬했다. 으득! 으드득! 곳곳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 탄환은 폭발을 포기하고 속도와 위력에 집중한 타입이었다.
뒤이어 은빛 꼬리를 휘날리며 베아트리체의 몸이 날아왔다.
투콰아악!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이어지는 발차기에 비얀의 몸이 부웅 떠올라 바닥을 몇 번이고 굴렀다. 검은 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가 비릿한 내가 퍼졌다.
"끄윽! 빌어먹을!"
그가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일어났다. 뒤늦게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바얀을 감쌌다. 싸움에 끼어드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대장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무르익었군.’
후방에서 전황을 조율하던 로드가 눈을 빛냈다.
유니벨이 흩뿌린 융단 폭격, 그리고 암살단의 활약으로 액스 워리어들을 언덕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검보병들이 다시 언덕을 점거했다.
그리고 영웅들의 싸움에서도 아로게쓰의 힘의 상징인 바얀이 고전하는 그림까지 만들었다. 지켜보던 아로게쓰의 병사들의 사기가 줄어드는 것은 덤이었다.
'이때가 타이밍이야.’
로드가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다들 그만! 물러서."
로드가 신호를 내리자 기수가 파란색 깃발을 들어 휘날렸다. 곧이어 아로게쓰를 향한 모든 공격이 중지되었다. 화살이 멈췄고 구덩이 너머 평지에서 적을 교란하던 매복조들도 활동을 멈췄으며 베아트리체와 유니벨도 후퇴해 진형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또 무슨 짓거리냐?"
바얀이 표정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설마 이 정도로 너희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아직 전쟁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뭐, 그렇긴 하지.’
로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들은 선두 병력일 뿐, 아직도 아로게쓰의 병력은 많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영웅들의 싸움은 B급 영웅이 둘인 어비스가 우세했지만, 군의 화력에서는 아로게쓰가 훨씬 유리했다. 일기토에서 승리해도 병력에서 밀리면 끝장이었다.
"물론이다, 바얀. 우리가 이겼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승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
하지만 로드는 지금까지의 전투로 그들에게 확실히 깨우쳐 주었다. '어비스를 무너뜨리는 건 너희들의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강력한 인식을 그들의 머릿속에 박아 넣은 것이다. 로드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협상을 하자, 바얀."
자고로 협상은 유리한 입장에서 진행해야 하는 법이었다.
*
"……크크, 크크큭! 크하하하하!"
바얀이 광소를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금속음과 비명이 난자하던 세계였지만, 지금은 모두의 침묵 속에서 한 남자의 끅끅 거리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친놈!"
마침내 바얀이 말했다.
"이제 와서 협상을 하자고? 웃기지도 않는군. 우리는 싸우다 죽어간 전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검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살아남아있는 자들의 목숨까지 허망하게 내던질 필요는 없잖아?"
바얀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로드 폴렌티아!"
"자만이 아니다."
로드는 냉정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너희가 병력을 물려야만 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본래 아로게쓰의 전사들은 협상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로드는 싸웠다. 방금의 치열한 전투 또한 바얀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오기 위한 밑 작업에 불과했다.
"크크크, 재미있군. 좋다! 한번 들어나 보지."
'……당연히 들어는 보시겠지.’
로드는 짐작하고 있었다. 바얀의 고유 능력은 '자연 회복’. 잠시 숨도 고르고 상처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벌 셈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로드가 입을 열었다.
"첫째."
화륵! 화르륵!
방패를 든 검보병 사이로 횃불을 든 병사들이 걸어 나왔다. 어느새 궁수들도 일제히 불화살을 장전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지금껏 뒹굴고 쓰러지면서 온 몸에 묻힌 그거, 우리 연구소의 폐수야. 거의 기름 덩어리라서 불이 아주 잘 붙어."
"……역시나 화공이로군. 하지만 우리가 기름 냄새도 맡지 못했을 것 같은가?"
아로게쓰 쪽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소수 정예의 병력만을 운용하여 기름에 빠지는 병력 수를 최소화했다. 여기서 만일 화공을 당해도 소수만 희생될 뿐, 진군 루트를 바꾸어 얼마든지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드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스케일이 작은 줄 알아?"
상업 지구에 일으킨 모래 바람은 적병의 시야를 차단하고, 매복조의 움직임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화공의 예비 작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적들의 시선이 모래 바람과 매복조의 공격에 분산되어 있는 동안, 주거지에 숨어 있던 자들이 몰래 준비해둔 기름통을 바닥에 쏟아 부었다. 지금 거리 바닥은 기름으로 흥건해져 있는 상태였다.
"……사실입니다. 추장."
바얀의 지시에 따라 사실 관계를 확인하러 간 부관이 보고했다.
"어쩐지 싸우던 도중 바닥이 미끌거린다 싶었는데… 기름이 맞습니다."
"대체 어느 틈에……!"
"게다가 이 골목을 둘러싸고 있는 주거지들에도 불에 잘 타는 볏짚이나 땔감 같은 인화 물질을 잔뜩 넣어뒀어.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로드의 그 말에 아로게쓰 병사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바얀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허세로군. 제정신이 아닌 이상 도시 한복판에서 그런 대규모 화공을 명할 수 있을 리 없다. 네놈들의 수도 전체가 불타버릴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로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수틀리면 다 같이 죽을 생각이야."
"미, 미친 놈이!"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너희 손에 떨어질 도시잖아? 불태워 버리나 빼앗기나 매한가지지."
로드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본 바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형적인 미친놈의 눈이었다. 로드가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두 번째 이유야. 너희는 우리 병력 상황을 훤히 알고 있었기에 쳐들어올 결심을 할 수 있었고, 이상하게도 마틴의 병력은 그 계산에 넣지 않았다. 너흰 이미 그가 언더하임으로 내려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즉, 마틴이 너희에게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아, 일단은 내 추측일 뿐이니까 굳이 반박할 필요는 없어."
"……."
"하지만 마틴이 너희들에게 직접 그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면, 너희는 바보가 아닌 이상 쳐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함정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로드가 그동안 계속 고민한 부분이었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어느 날 바얀이 로드에게 접촉해 '나는 자무카를 몰아내고 싶다. 나는 병력을 이끌고 멀리 떨어져 있을 테니, 어서 자무카를 쳐라.’ 라는 제안을 했다고 하자. 과연 어느 누가 타국 사람의 말만 믿고 이를 행동에 옮길 것인가?
"따라서, 정보 제공자는 마틴이 맞지만 마틴의 정보를 이용하여 너희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믿을만한 제3자의 존재를 유추해볼 수 있다."
로드는 그 제3자가 아마 타국의 플레이어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로게쓰의 동맹인 그 플레이어가 마틴과 접촉해 정보를 듣고, 아로게쓰의 왕인 자무카를 꼬드겨 공격을 하도록 유도했다. 라는 게 그나마 지금으로선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너희는 속았어."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베아트리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병사들 사이에서 빠져 나와 바얀에게 다가갔다. 아로게쓰 병사들이 움찔하며 경계했지만 바얀은 괜찮다는 듯 팔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온 수정구를 건네받았다.
"……이건 통신용이 아닌 메모리얼 수정구로군."
메모리얼 수정구는 주위의 영상을 기억한 다음 원하는 때에 그 영상을 읽어주는 필름과 같은 마법 도구였다. 그가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
잠잠하던 바얀의 동공이 일순간 급격히 커졌다. 수정구 안에 담긴 모습은 마틴의 병력들이 모여 출진 준비를 하고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마틴 본인의 모습까지 보였다.
"몇 시간 전 드러그팜의 모습이야."
"……이, 이런 걸 어떻게 입수했지?"
메모리얼 수정구는 조작이 불가능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마법 도구였다. 바얀도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묻는 것이었다. 로드는 웃으면서 답했다.
"입수처는 비밀이야. 내 밥벌이라서."
사실 이 영상은 드러그팜에 뿌려둔 '어비스 스파이’의 눈으로 본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휘관 창과 연동된 화면을 메모리얼 수정구로 담아 놓은 것이다. 지휘관 창은 플레이어와 신관을 제외하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만 했다. 카오스월드에서도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었다.
"마틴이 제3자를 속인 건지, 아니면 제3자가 너흴 속인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에 마틴이 내려올 거야. 우리 둘 모두를 치우기 위해서."
"…그 마틴이란 자는 당신의 부하가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나와 마틴은 사이가 꽤 나빠. 만약 그가 내 편이라면 굳이 네게 뒤를 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이유가 없겠지? 여기서 불을 질러버리고 마틴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
로드가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자, 이제 마지막 이유. 지금 이 대륙에 너희의 대규모 침공 소식을 모르는 국가는 없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