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하임 시가전 -->
"……그게 무슨 말이냐?"
"너희들의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그 정보를 대륙에 모조리 뿌려버렸거든. 어비스의 정보력에 대한 이야기는 너도 들어봤지?"
바얀은 그저 침묵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꿔 말하면 너희의 수도가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가는 없다는 거야. 너희가 만약 여기서 계속 싸울 생각이라면, 우리도 목숨을 내놓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하겠지. 결국 우리 두 세력 모두 승패에 상관없이 많은 병력들을 잃게 된다."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빙빙 돌던 로드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서 타국이 너희 영토를 공격해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너희 수도에 남은 병력이라고 해봐야 어림잡아 일천도 안 될 텐데…… 상대가 될까 모르겠네."
"……이 개자식이!"
바얀이 살기를 흩뿌리며 으르렁거렸다. 로드는 차분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이상 세 가지다. 다시 한번 말하지. 여기서 우리와 계속 싸운다고 해도 우린 쉽게 져줄 생각이 없고, 두 쪽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이야. 너희의 '최선'은 이제 막혔다. 그러니까 '차선'을 택할 기회를 주는 거야."
로드는 손을 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바얀이 일갈해 버리기 전에 모든 카드를 다 털었다.
사실 이 중에서 타국에 아로게쓰의 침공 사실을 알렸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약삭빠른 플레이어라면 아로게쓰의 수도가 빈 것뿐만 아니라, 어비스의 병력이 소모된 것까지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쪽으로 공격해 들어올 가능성도 있었기에 섣불리 알리지 않은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바얀이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로게쓰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 설령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아로게쓰의 신념이다!"
"흐으음, 정말?"
로드는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있었다.
바얀은 카오스월드를 통해 알려진 인물이며, 로드는 그의 약점을 한 가지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약점은 바얀이라는 영웅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뒷일은 아무래도 좋은 거냐? 너희의 수도 '풋힐랜치'에는 아마……."
로드의 눈에서 보랏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바얀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 리. 야.'
그 순간 바얀의 안면 근육이 큰 폭으로 꿈틀거렸다.
아리야는 바얀의 하나 남은 막내 여동생이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병으로 죽어버리고 유일하게 하나 남은 혈육이었으며, 바얀은 세상 무엇보다 그녀를 아꼈다. 1차 베타 테스트에서 아로게쓰의 플레이어가 적대 토착 세력이었던 바얀 부족을 끌어들이기 위해 쓴 방법이 바로 아리야를 납치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화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로드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이걸로 또 새로운 정보를 얻었군. 기존 캐릭터들의 배경 스토리는 카오스월드와 동일. 치트 같은 느낌이라 좀 치사하긴 하지만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주지.'
만약 로드의 생각대로 됐다면 지금 바얀의 머릿속에는 걱정과 그리움의 감정이 파도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로드가 말한 세 가지 이유를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며 합리화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후우우우."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바얀이 땅을 꺼트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군은 언더하임에서 퇴각한다."
"추, 추장!"
부관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얀이라면 당연히 전쟁 재개를 선언할 줄 알았던 것이다.
"저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오래 머물러봐야 지금 살아남은 전사들과 우리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부족원들에게 폐만 될 터."
"하, 하지만! 죽은 형제들의 복수는……!"
"타국의 땅을 먼저 침공한 쪽은 우리다."
바얀이 다시 한숨을 쉬었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호오…….'
고유능력의 효과가 생각보다 강력해서 로드는 놀랐다.
아무래도 이 고유능력은 개인차가 있는 것 같았다. 하버트에게 사용했을 때에는 평상시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얀의 경우는 가치관을 잠시 바꿔버릴 정도로 효과가 뛰어났다.
바얀이 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드 폴렌티아. 협상을 받아들이겠다. 우리에 대한 모든 공격과 도발 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를 물려라.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물러나겠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고유 능력의 효과가 너무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저 결심이 로드가 제시한 상황에 의거하여 내려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저 고유 능력에 의한 감성적인 판단일 뿐이라면, 고유 능력의 효과가 다 떨어질 때 바얀이 되돌아와 동문으로 공격해올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문제니 불확실성은 확실히 제거해야 한다.
"좋다. 그 전에 당신들이 약조한 퇴각을 '선조의 영혼'에 걸고 명예로운 맹세를 할 수 있겠는가?"
로드의 물음에 바얀과 부관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아로게쓰 병사들 사이에서도 술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의 오랜 전통이자 비밀스러운 맹세를 어떻게 외부인이 알고 있단 말 인가!
바얀이 이마를 감싸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의 부관인 쿨란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어비스의 왕이시여."
로드는 짐짓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감히 이 자리에 끼어드는 것인가?"
"바얀 추장의 부관이자 참모인 쿨란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 드립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뭐지?"
쿨란의 눈이 번뜩였다.
"포악한 왕이시여, 당신은 전사의 명예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좆던 자가 이제 와서 필요할 때만 신성한 전사의 명예를 들먹이다니… 우리 아로게쓰의 맹세는 그렇게 편리한 게 아닙니다."
'…오호라.'
로드는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야만국가에도 조금은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 있었다. 로드는 쿨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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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쿨란
소속 : 아로게쓰 1군단
직위 : 군단 참모
종족 : 인간
무력등급 : (D)
통솔등급 : (F)
지략등급 : (C)*
정치등급 : (D)
C급 지략형 클래스 입니다.
고유능력 : 계략 간파자
전사의 문화가 퍼져있는 아로게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쿨란은 병법과 군술을 갈고 닦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할 시간을 가졌으며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나갔습니다.
특히 그는 모략에 뛰어난 감각을 보였는데, 타인의 말을 듣고 의중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그의 조언에는 위대한 추장들도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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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로게쓰에서 C급 군사가 태어나다니… 본 적도 없는 일이다!'
바얀이 기존의 인물이라면, 쿨란은 완전히 새로운 뉴페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등장으로 로드는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떻게 한다?'
쿨란은 로드의 과거로 발목을 잡았다. 진정한 전사가 아니니 전사의 명예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위험하긴 하지만 파훼법은 있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로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뜻인가?"
"당연합니다. 전사의 맹세는 진정한 전사들끼리 이루어지는 것. 당신과 같은 자가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옳소!"
"외부인 따위가 감히!"
아로게쓰 측에서 동조의 외침이 들렸다.
"재미있군."
로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내가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겠다? 쿨란."
"그, 그렇소."
"그렇다면……."
로드의 팔이 뻗어나가 쿨란을 똑바로 가리켰다.
"마르스의 검에 걸고, 너에게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한다."
"……!"
“뭐?”
로드의 충격 선언에 두 진형이 동시에 불이라도 붙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르스의 명예로운 결투는 둘 중 하나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워 살아남은 단 한 사람만이 진정한 전사임을 인정받는 아로게쓰의 오래된 의식이었다. 둘 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아로게쓰 내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전통이었다.
"폐, 폐하!"
"……진심이십니까? 너무 무모해요!"
가신들이 로드를 말렸다. 한 나라의 왕이 일개 전사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등한 상황에 놓고 싸우기엔 목의 값어치가 너무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로드가 전투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로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진심이야."
"주인님!"
베아트리체가 허겁지겁 달려와 로드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베아."
"안돼요!"
그녀가 로드를 올려다보며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 모습에 잠시 마음이 약해질 뻔 했으나, 로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흔들리는 결심을 다잡았다. 이곳은 전장. 왕이든 일개 병사든 누구든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게 맞다.
"만약 위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고유 능력은 쓰면 안 돼? 우리가 먼저 결투의 룰을 깨버리면 모든 게 물거품 될 테니까."
"하,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있었다. 로드는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네 제자를 조금은 믿어봐."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베아트리체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아.' 하는 탄식과 같은 소리를 냈지만, 로드를 다시 붙잡지는 못했다. 로드는 구덩이로 떨어졌다.
"로드 폴렌티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얀 또한 이 상황에 몹시 당황하는 듯 보였다.
"당신이 정말로 마르스의 명예로운 결투를 알고 있다면 그 결말이 어떨지도 알고 있을 텐데?"
"내 결심은 변함이 없다."
"……알겠다."
바얀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마르스의 명예로운 결투는 눈표범족의 추장인 나, 바얀이 승인하며, 직접 증인으로 참관하도록 하겠다! 두 전사는 앞으로 나와라!"
스릉!
쿨란이 등 뒤에 매고 있던 곡도를 빼어 들었다.
"실수 하셨군요. 어비스의 왕이시여! 저 또한 참모이기 이전에 숱한 전투를 치른 한 사람의 전사. 덕분에 적장의 목을 벨 명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드가 피식 웃으며 포켓의 단검을 꺼내 휘리릭 돌렸다.
"실수인지 아닌지는 해보면 알겠지."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바얀의 이름으로 결투가 성사되었으며 이제는 아로게쓰의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그리고 어비스 또한 로드의 명령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멍청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일을 벌이는 거야?"
유니벨이 손가락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야, 리체! 정말 싸우도록 내버려 둘 거야? 저 변태가 무슨 수로 저 아로게쓰 덩치를 이기겠냐고!"
"……."
베아트리체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태도가 유니벨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저것들이야 결투를 신성하게 여긴다지만 그게 뭔 상관이야! 역시 안 되겠어. 당장 가서 저 변태 놈을 빼오겠어."
"……그러지마."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내저으며 너덜너덜해진 목소리를 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니벨은 움찔하며 보이지 않는 그물에 속박된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녀의 결심을 깨부수는 짓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니벨은 홧김에 애꿎은 땅을 퍽퍽 찼다.
"후욱!"
로드는 숨을 내뱉으며 쿨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동일한 D급의 무력등급. 고유 능력은 내정 계열이므로 전투에 특별한 변수는 없어보였다. 무기는 곡도외에 다른 무장은 없다. 곡도의 크기는 딱 적당한 수준이라 한 손으로도, 양 손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전사들처럼 쩍 벌어진 몸은 아니었지만 신체 곳곳에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모습이 힘을 쓰는 것에도 능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마르스의 검에 걸고, 두 전사의 결투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마침내, 바얀이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