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33화 (33/296)

<-- 언더하임 시가전 -->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바얀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로드와 쿨란,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며 서로의 거리를 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주위를 뒤덮었다. 양측 모두 많은 것이 걸려있는 싸움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이 대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움직일 때 마다 질척거리는 바닥의 진흙이 로드의 발을 붙잡았다.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 리스크는 상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로드는 거리를 재면서 계속 정신 무장을 했다.

'베아와의 대련을 생각하자.'

그녀의 움직임이 떠오른다. 철저하게 절제되면서도 정교한, 그야말로 군살 하나 없는 단검의 움직임. 그렇기에 오히려 더 화려하게 느껴졌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살의가 담기지 않은 어린애 장난 같은 공격. 어디서 본걸 흉내 내는 듯 한 전투 스타일. 효율보다는 겉멋에 치중. 과연 그때에 비교하여 지금은 얼마나 나아져 있을까? 로드는 그녀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뇌에 박아 넣으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쿨란은 계속해서 주위를 돌 뿐 절대로 먼저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참모답게 신중한 타입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간다.'

주위를 빙빙 돈다고 없는 허점이 발견되는 게 아니다. 차라리 기세를 더하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로드가 먼저 물살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쿨란 또한 움직임을 척 멈추며 도를 세워 드는 자세를 취하더니, 신속한 속도로 전진하며 도를 크게 휘둘렀다.

'이크!'

도에 담긴 힘이 어마어마했다. 로드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으며 뒤로 빠졌다. 후우웅! 푸른 날의 곡도가 대기를 쪼갰다. 이어서 연속 동작이 펼쳐지며 푸른 검광이 허공을 베고 또 베었다. 로드는 스탭을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뭡니까, 당당하게 결투를 신청한 것 치고는 회피뿐이군요."

로드가 물러설수록 쿨란은 더욱 악착같이 달려들어 도를 휘둘러댔다. 날카로운 날이 로드의 옷을 가르고 핏물을 흩트리자 어비스 진형에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으, 쓰려라.'

쿨란이 도를 치켜 올려 아래로 내리쳤다. 연이은 회피 동작으로 스탭이 엉킨 로드가 처음으로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채앵! 도가 단검의 날에 닿은 순간 도날이 살짝 미끄러지며 힘이 분산되었다.

베아트리체가 준 로드의 단검 반대쪽 날에는 맨들맨들한 부분이 있었다. 마력을 실어 쇠붙이의 방향을 미끄러뜨릴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걸렸다!'

공격을 막아내고. 로드가 비어있는 손으로 단검을 꺼내 던졌다. 그러자 쿨란이 기다렸다는 듯 아대로 감싼 팔 한쪽을 내밀었다.

푹! 아대가 붉게 물들었지만 단검은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당신들의 잔기술을 염두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쿨란이 빠른 동작으로 도 손잡이를 다시 양손으로 틀어쥐고는 힘을 가했다.

'큭!'

순간적으로 단검을 타고 느껴지는 거대한 완력에 로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간신히 양손으로 단검을 붙들었다.

'엄청난 힘이다.'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체격은 로드와 비슷한 정도였으나 완력의 격이 달랐다. 대체 저 몸의 어디에서 저런 괴물 같은 힘이 나온단 말인가! 조금씩 조금씩 단검이 아래로 내려와 어느새 로드의 눈앞까지 칼날이 도달해있었다.

"잔기술만으로는 승부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순수한 힘과 싸움에 대한 집착만이, 승리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단 말입니다!"

쿨란이 이대로 승부를 굳히려는 듯 더욱 힘을 가했다. 로드는 팔이 끊어질 듯 한 고통을 참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잔기술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바닥에 꿇어앉은 자세의 로드가 엉덩방아를 찍으며 순간적으로 한쪽 다리를 올려 찼다. 검은물이 팍! 하고 튀어 올라 쿨란의 눈으로 들어갔다. 그가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대치 상황에서 풀려나자 팔이 간절히 휴식을 외치는 와중에도 로드는 손에 쥔 단검을 던졌다.

푸욱!

단검은 힘이 온전히 실리지 않아 쿨란의 허벅지에 살짝 박히는 정도에 그쳤다.

"허억, 허억."

거리를 벌린 로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로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쿨란도 몇 발짝 물러나며 소매로 눈에 들어간 검은 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뽑으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로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몸을 날렸다.

'한번 맞붙고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서로 숨 돌리는 클리셰 따위, 알게 뭐냐!'

쿨란이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도를 들어 올려 날아오는 단검을 막아냈다. 불안전한 가드라 자세의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정녕 왕의 전투란 말인가!'

로드가 다가오자 쿨란이 이를 악물며 도를 크게 휘둘렀다. 로드는 무릎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를 취했다. 부우우웅!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도가 그의 머리칼을 몇 자락 베고 지나갔다. 로드가 허리를 일으키며 단검을 꺼낸 오른손을 움직였다. 쿨란의 시선이 날카로운 단검으로 향하며 몸이 반응했다.

'단검을 쥔 손보다 발이 더 길다!'

퍼억! 로드가 대뜸 오른 발을 뻗어 쿨란의 허벅지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밀어 찼다. 그와 동시에 눈에서는 보랏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로드의 고유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크헉!'

허벅지에 박힌 단검이 더 깊게 들어오며 쿨란은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서 어마어마한 2차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이런 끔찍한 통증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쿨란의 동작이 굳어진 이때 로드가 이를 악물며 단검을 휘둘렀다. 은빛 섬광이 실선을 그리며 로드의 몸이 그를 지나쳐갔다.

"……!"

관전자들 모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승부의 행방을 좇았다. 서로를 교차한 두 사람의 등 뒤로 긴 침묵이 일었다.

"후우욱!"

로드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푸화악!

쿨란의 목에서 피 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

"하, 한 순간에 결판이!"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쿨란의 몸이 천천히 기울여졌다. 서 있는 자와 쓰러져 가는 자의 시선이 한 순간 허공에서 만났다. 로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래도 내가 전사가 아닌가?"

쿨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내 그의 몸이 무너지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시뻘건 선혈이 검은 물에 섞였다.

"……."

두 진영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정적 속에서 로드는 잠시 생각했다. 아로게쓰 전사들의 승리 세레머니가 뭐였더라? 대충 적의 피가 묻은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들고 있는 게 작은 단검이라 조금 모양 빠지긴 했지만, 뭐 어떤가? 로드가 단검을 머리 위로 척 들어 올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어비스 진형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아로게쓰의 전사들은 환호도 슬픔도 없이 그저 고개를 숙여 승자의 명예를 칭송하고 패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똑같이 애도를 표한 바얀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승자는 어비스의 로드 폴렌티아다. 그는 마르스의 검에 의거하여 명예로운 전사의 시험을 통과했으므로, 앞으로는 진정한 한 사람의 전사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바얀이 그렇게 외치며 로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듯 하군. 비록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그 순간, 자네는 확실히 전사였다."

"음, 뭐… 인정해줘서 고맙네."

로드가 머쓱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동등한 전사의 입장에서, 선조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우리는 퇴각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군대가 다시 당신들의 땅을 침공할 일은 없을 것이다."

"좋아."

로드가 재차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마틴이 오기 전에 얼른 물러나 달라고."

협상을 마치고 로드가 진형으로 복귀하자 어비스 병사들이 격한 환영으로 맞이했다. 한 나라의 가장 존귀한 존재인 왕이 목숨을 던져 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로드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주인님!"

베아트리체가 달려와 로드의 품에 와락 안겼다. 로드는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자빠질 뻔 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로드도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함께 다가온 유니벨이 뺨을 긁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흐,흥! 자, 잘하긴 했어. 하지만 너무 어깨에 힘주지 말아 줄래? 별거 아닌 놈 하나 쓰러트린 것 가지고……."

평상시처럼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무안해진 그녀가 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무척 나빴다.

"뭐야? 어디 아파?"

"아, 아니. 하하… 딱히 아픈 건 아니고."

로드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수전증이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 이라서."

"뭐가?"

"아무것도 아냐."

로드가 애써 웃어 보이며 베아트리체에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였다. 그녀가 옆으로 돌아와 로드의 오른팔을 부축했다.

"흥."

베아트리체가 혼자 끙끙대고 있으려니 유니벨이 로드의 왼쪽으로 다가와 나머지 한 쪽을 부축했다.

"여, 영광인 줄 알아! 이번엔 잘했으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니까……."

"뭐, 고맙긴 한데…."

로드가 무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너희 둘 다 키 좀 커야겠다. 오히려 더 불편해."

"…뭐어어?"

유니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냥 들것을 가져와 주면 안 될까?"

"이, 이, 이! 변태왕 따위가! 기껏 신경 써 줬더니 날 개 무시해?"

"으악! 상단주! 때리시면 안 됩니다! 폐하께선 부상자이십니다!"

병사들이 다가와 유니벨을 뜯어말렸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부축한 팔을 내리더니 말했다.

"……주인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생각해서 참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실례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로드의 몸을 능숙하게 안아 들었다. 연인들끼리나 한다는 바로 그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베, 베아야?"

"신속하게 왕궁 의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자, 잠깐만!"

베아트리체가 병사들을 지나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지 주위의 환경이 휙휙 지나갈 정도였다.

'…음. 이, 이거 생각보다 편안한데.'

로드는 아늑함을 느끼며 그녀의 품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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