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들과의 외출 -->
"……으으음."
창가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눈이 부셔서, 로드는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이제는 익숙해진 집무실의 천장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귓가에는 평화로운 새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따뜻한 날씨, 푹신한 소파의 감촉, 졸음에 취해 기분 좋은 몽롱함. 잠시 '완벽함'을 느낄 정도로 행복했다. 로드는 이 평화를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니, 잠깐!'
로드가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의 팔에 기대어 자고 있던 베아트리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바닥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아, 폐하. 일어나셨어요?"
마침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이브가 나타났다. 그녀가 들어오기 무섭게 로드가 소리치듯 물었다.
"어떻게 됐어?"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집무실의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공기가 실내로 들어오자 로드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걸 느꼈다.
"진정하세요, 사태는 잘 마무리 되었으니까요."
"……하아, 다행이군."
마지막까지 남아 상황을 조율했어야 했는데, 그동안의 과한 업무와 전쟁 준비 등으로 쌓여있던 피로가 쿨란과의 전투를 계기로 한 방에 터져버린 듯 했다. 덕분에 이브가 홀로 고생했을 걸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로드는 세상모르고 맨바닥에서 자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안아 들어 자신이 누워있던 소파 위에 눕혔다. 잠에서 깰 듯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다시 몸을 웅크리며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동안 계속 폐하 곁에 머무르면서 잠도 안자고 기다렸거든요."
"……그, 그래?"
"지극정성이었죠."
베아트리체가 몸을 웅크리자 소파에도 공간이 생겼다. 이브가 베아트리체의 머리 쪽에 앉았고 로드는 그녀의 다리 아래에 앉았다.
'후후, 이렇게 있으니 마치 귀여운 딸을 사이에 둔 젊은 부부 같은 그림인걸.'
로드는 잠시 실없는 망상을 해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폐하께서 이제 일어나셨는데 먼저 쓰러지면 어떻게 해요? 바보."
이브가 베아트리체의 뺨을 콕콕 찌르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가 베아트리체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정리해 주었다.
'…오.'
로드는 잠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마침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절묘하게 비춰지며 한 폭의 명화를 보는 듯 했다.
'이제 보니 이브도 참 예쁜데… 혼기도 다 찼을 텐데 왜 시집을 못 가고 있을까? 흠흠, 아무래도 역시 성격의 문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로드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든 이브가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으, 응?"
"방금 속으로 저 흉봤죠?"
로드는 당황함의 반대급부로 소리쳤다.
"……그, 근거 없는 트집이다!"
"아니라면 죄송해요. 제 얼굴을 보면서 이상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올리고 계시길래, 한번 찍어 봤네요."
'정확했다, 이브. 아주 정확했어.'
로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브는 차분한 어조로 경과를 설명해주었다.
로드와의 맹약대로, 바얀이 이끄는 아로게쓰의 군대는 별다른 수작 없이 깨끗하게 언더하임을 떠났다. 퇴각을 결정한 바얀과 후방에서 매복조들에게 시달렸던 부족장들간의 잡음이 조금 있었지만 결국 아로게쓰는 힘의 원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계였고, 족장들 또한 바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흐흐흐, 퇴각 소식을 들은 자무카가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지는걸."
로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무카요?"
"아로게쓰의 왕 말이야. 나름대로 무리해서 준비한 출정이었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병력만 잃고 돌아오는 꼴이 됐으니 열 좀 받았겠지."
"그렇다면 그 바얀이라는 장수는 아무래도 살아남기 힘들겠네요? 원정 실패의 죄를 모두 뒤집어 써야 할 테니까요."
그녀의 물음에 로드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뭐, 이 시대의 왕들이라면 격분해서 목을 베어버리고 삼족을 멸하고도 남겠지만, 우리 플레이어들은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거든. 그도 그럴게 바얀은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B급 무력형 영웅이야. 한 번의 패배로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를 스스로 찢어버리는 일은 죽어도 못하지."
이브가 알 것도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흘렀다.
"……물론, 그건 바얀의 군대가 무사히 '풋힐랜치'에 귀환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이브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뭔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셨군요?"
"으흐흐! 내가 잘 하는 건 이런 것뿐인걸. 한 대 얻어맞고도 멍청히 손 놓고 있는 호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맞은 건 되갚아 줘야지. 아무튼 이야기나 계속 해 줘."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로게쓰의 군대가 물러나 전쟁이 끝나고, 어비스는 한동안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대륙을 전전하던 자들이 끝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 언더하임이다. 낙오자들의 마지막 터전인 이곳마저 외국에서 빼앗으러 온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낙오자들만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그동안 패배 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어비스의 국민들에게는 정말로 의미가 큰 승리였다. 그날 밤은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다. 어비스의 상회들과 상인들이 술과 먹거리를 풀었고, 수도인 언더하임 뿐만 아니라 어비스의 영토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까지, 모두가 어비스의 첫 승리를 열렬하게 즐겼다.
그와 동시에 로드에 대한 여론도 한결 나아졌다. 이번에 로드가 적장과 담판을 짓는 모습, 그리고 막바지에는 왕인 그가 직접 나서서 적의 전사를 쓰러트리고 담판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작용한 듯 했다. 그동안 무능한 한량으로 알려진 로드 폴렌티아라서 더욱 화제가 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튼, 로드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국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드디어 왕이 정신을 차렸다.' '진정한 귀감이다.' '그 동안의 이상한 행태는 연기였다.' 등등 축제 분위기가 순풍이 되어 더욱 상승세를 타게 된 것이다.
"결국 그동안 우리가 각 클랜을 돌아다니며 영향력을 늘리려 온갖 고생을 한 것 보다, 타의에 의한 전쟁 한번이 수십 배나 더 효과가 컸어요."
"그러네. 위기가 곧 기회가 됐군."
로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브도 마주 웃었다. 아로게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지금은 들뜬 사람들을 달래서 상업 지구 복구 작업에 들어가 있어요. 시설의 피해가 작지는 않지만,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답니다."
"고생 많았어, 이브."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이브가 선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다 폐하께서 이 나라에 와주신 덕이죠."
"……흠흠."
아니, 이브가 칭찬을 다 해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듯 했다. 로드는 무안해져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 마틴이나 언더하임에 있는 마피아 잔당들의 움직임은 어때?"
"마틴은 여전히 드러그팜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넘버투인 스카 파치노 또한 특별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고 잠잠해요. 왕실에 대한 여론을 의식하고 있겠죠."
로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좋아. 하긴 마틴도 이제 와서 언더하임에 내려오면 꽤나 모양 빠질 거야. 뭔가 명분을 만들 때 까지는 거기 계속 있겠지. 당분간은 제대로 쉴 수 있겠구나!"
이브가 상냥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헉!'
로드는 본능적으로 소름이 오도도 돋아났다. 그녀가 평소 이상으로 상냥한 저런 미소를 보일 때면 언제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쉬신다고 하셨어요?"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서류를 한 뭉치 꺼내 책상 위에 쿵 소리가 나게 올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책상에는 빈 공간보다 높다란 서류의 탑이 더 많게 되었다.
"그동안 미뤄진 내정 업무에다가 전쟁으로 인해 피해 복구 관련 내용들도 만만치 않답니다. 하루 정도는 잠으로 땡땡이 쳐도 봐드릴 생각이지만 오늘은 아녜요. 제대로 일해주세요."
"……."
그 시간, 밀대로 복도 바닥을 닦고 있던 메이드들이 집무실에서 들린 로드의 절규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
어비스의 제2 영지, 드러그팜의 성.
"……자네의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은 것 같군."
의자에 걸터앉은 마틴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방금 막 카사르의 요원이 가져다 놓은 통신 수정구가 있었다. 수정구의 사내가 말했다.
"이거 민망하군요. 로드 폴렌티아를 얕보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저인데…… 저도 은연중에 그를 얕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즐거운 듯 한 느낌을 풍겼다
"…설마 아로게쓰의 장군과 협상을 해서 전쟁을 중단시켜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덕분에 본인의 꼴만 우스워졌다. 지금 수도는 놈을 찬양하는 여론들로 가득하다더군."
마틴은 상황이 묘하게 꼬였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중간에 중단되어 버리는 바람에 드러그팜에 있는 그가 수도로 돌아간다 한들, 여론은 썩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당신은 뭘 했느냐, 연락도 안 받았다는데 겁먹어서 도망친 거였느냐.' 벌써부터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구설수들이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 했다.
"아아, 정말 유감입니다. 돕겠다고 한 일인데 괜한 피해만 드리고 말았군요.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무엇이든 지원하겠습니다."
마틴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무엇이든, 이라고 했나?"
"호오, 뭔가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 듯하군요."
"계책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명목을 만들고."
마틴이 테이블에 있던 체스 말을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툭 하고 튕겼다.
"…뒤엎는다. 그것이 본인의 방식이다."
"후후, 좋습니다. 어떤 일이든 돕겠다고 약속드리죠."
그때 뒤 쪽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틴의 인상이 찌푸려지자, 수정구의 남자가 괜찮다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저도 잠깐 급한 볼일이 있는지라,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이어서 하도록 하죠."
"알겠다."
파밧! 수정구의 전원이 꺼졌다. 마틴은 수정구를 서랍 안에 넣어두고는 들어오라고 말했다. 마피아 조직원 한 명과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보스! 먼저 부르실 때까지 대기하라고 하셨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되었다. 넌 꺼져라."
조직원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마틴의 시선이 로브를 입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자넨 누구지?"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남자가 정중하게 마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두를 주눅 들게 만드는 위압감을 뿜어내는 마틴의 앞에서도 생글생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가 품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마틴에게 건넸다.
"저희 마스터께서 대부님께 보내는 자료입니다."
마틴은 대꾸 없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서류를 꺼내 읽던 그의 얼굴에 잠시 동요가 일어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재밌군."
서류를 모두 읽은 마틴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 녀석이 보냈다니 더욱 신뢰가 가는군."
청년이 송구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본인에게 이걸 보낸 까닭은?"
"저희 마스터께서는 대부님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그게 무엇이 됐든 대부님께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틴은 시가를 꺼내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시가에서 자욱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와 금세 방을 짙게 뒤덮었다.
"……좋다. 서신을 보낼 테니 대기하고 있도록.
"감사합니다!"
청년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방에서 나가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자 마틴이 물었다.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아! 벼, 별건 아니고, 여기로 올라오는 길에 우연찮게 외부인을 봤습니다. 놀랍게도……"
청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옷의 무늬를 보나 억양을 보나 ‘카사르’ 쪽 사람 같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도 그와 이야기하여 거래를 좀 트고 싶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구나."
후와아아아아악!
순간, 마틴으로부터 내뿜어지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남자는 그만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뇌의 통제를 벗어난 다리가 의지와는 관계없이 후들거렸다.
"대, 대, 대부!"
"호기심은 명을 재촉한다, 애송이."
마틴의 팔이 서서히 청년의 눈으로 움직였다. 푸확! 핏물이 솟구치며 청년이 찢어질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틴이 팔을 빼내자 그의 손엔 흥건하게 피가 묻은 신체 일부가 쥐어져 있었다. 청년이 피가 철철 흐르는 텅 빈 눈을 부여잡았다.
"본래는 죽여 마땅하나, 중요한 손님의 졸이라 목숨을 건지는 줄 알거라."
"……크흑, 크으으윽! 자, 자, 자비에 감사 드립니다! 대, 대부!"
"네가 본건 모두 잊어라. 만약 어떤 수단으로든 발설할 시에는……"
다시 한 번 위압감이 터져 나오며 청년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렸다.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마틴의 손바닥이 쥐어지며 퍽! 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