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들과의 외출 -->
"……거, 거의 다 해간다."
로드가 후들거리는 팔로 서명을 마친 후 서류 한 뭉치를 구석으로 밀었다. 하루 동안 꿀 같은 단잠으로 회복된 체력이, 오늘 업무로 모조리 다 소모된 기분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이브 또한 방금 정리가 끝난 서류를 탁탁 내리치며 한 쪽으로 밀어 두었다. 로드와의 속도 차이는 정확히 두 배가 났다. 역시 내정에 특화된 B급 정치형 클래스는 위대하다. 존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오늘 열심히 해주셨으니까, 컨디션 조절하는 의미에서 남은 건 내일 마저 해요."
"저, 정말이야?"
로드는 해방감에 만세를 부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이제 뭐하지?'
힘든 노동 후에 황금 같은 자유시간을 획득했다. 그냥 잠으로 산화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잠은 어제도 실컷 잤으니 뭔가 건전하고 유익한 여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밖은 축제 분위기라던데, 간만에 외출이나 해볼까?'
창밖을 바라보니 마침 주위도 어둑어둑해 있었다. 로드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번 시찰 때는 낮이라서 제대로 암시장 구경 못해봤잖아. 이번에 다 같이 가볼래?"
"어머, 시장에 갈 거야? 그거 좋네!"
그런데 그 대답은 이브나 베아트리체에게서 들린 것이 아니었다. 로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 내가 오면 뭐 어때서!"
유니벨은 집무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며 메이드가 내온 주전부리를 축내고 있었다. 그녀가 로드를 찌릿 노려보았다.
"문제 있어?"
"아, 아니! 별로 문제는 없는데, 어쩐 연유로 이런 누추한 곳에 친히 방문해 주셨을까 해서……."
"그야 당연히 우리 리체 보려고 왔지."
유니벨이 쿠키 하나를 집어서 베아트리체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녀는 순순히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과자를 먹으며 뺨이 불룩하게 부풀자 유니벨이 귀엽다는 듯 '꺅' 소리를 지르며 뺨을 문질문질했다.
"……하, 하지마아. 유니이."
"헤헤! 뭐 먹으면서 말 하면 못 써, 리체."
로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 원래 사이 나쁘지 않았었나? 저번에 만났을 땐 아주 죽자고 치고 박고 싸우더니."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유니벨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베아트리체도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과자를 먹는 데만 집중했다.
"으, 으음. 너희들이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그런데 리체라니?"
"내가 부르는 애칭이야."
"이미 내가 지어준 '베아'라는 애칭이 있건만! 이젠 메이드들까지 베아라고 부른다고!"
이상한 곳에서 경쟁 심리가 발동한 로드였다. 유니벨이 콧방귀를 꼈다.
"흥, 그런 무성의하고 흔해빠진 네이밍이 뭐가 좋다고. 나만의 애칭으로 부르는 게 뭔가 더 친밀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치? 리체?"
유니벨이 다시 과자를 하나를 먹여주며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뺨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의 애칭이라… 뭐,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군. 그렇다면 유니벨!"
"왜."
"나에게도 그런 애칭을 지어줘라!"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웩!"
그녀가 뒤늦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팔로 본인의 몸을 감쌌다. 그리곤 몸을 기울여 베아트리체의 뒤에 숨었다. 조금이라도 로드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노력인 듯 했다.
"……저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
로드가 말했다.
"와, 방금 엄청나게 소름 끼쳤어. 진짜 싫어. 죽어!"
"……아니. 네가 너무 과민 반응인 거야. 언제까지 날 '변태왕'이라고 부를 생각인데? 앞으로도 자주 얼굴 보게 될 사이인데 최소한 호칭은 똑바로 정리하자고. 평범하게 '폐하'라던가, 그게 싫으면 격식 없이 '로드'라고 하던가. 아니면 우리 베아처럼 '주인님.' 이라고 불러도 나는 전혀 상관 없……."
유니벨이 얼굴을 붉히며 배개를 집어 던졌다. 푹신했지만 아팠다.
"……변태 새끼."
"아, 아니. 단순한 예시일 뿐이야! 예시!"
"…알겠어. 그러니까 호칭을 달리 해달라는 거지?"
유니벨이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말했다.
"…병신 새끼?"
"……"
로드는 어떤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한참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야 할 나이에 언더하임에 와서 이렇게 입이 험하게 되어버리다니… 나쁜 건 그녀인가! 세상인가!
"욕은 안 돼. 다른 걸로."
"호칭이라며! 부르는 사람 마음이지!"
"안 돼. 다른 걸로."
로드가 냉정하게 짤라 말하자 유니벨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로드의 얼굴로 향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지긋이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팬더 새끼?"
"꼭 그 마지막 두 글자는 붙여야겠냐! 그리고 팬더는 또 뭐야?"
"맞잖아, 팬더! 스노노랑 붙여놔도 누가 인간이고 누가 팬더인지 구분 못하겠네!"
사람의 신체적 콤플렉스로 놀려먹다니! 로드가 짐짓 화를 내려는데, 옆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이브가 풋! 하고 웃었다.
"딱 좋네요. 팬더."
"……이브 너마저! 에라, 그래. 호칭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암시장에 갈 거야? 말 거야?"
베아트리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주인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역시 베아 밖에 없어! 이 아빠는 너만 있으면 된단다.'
"저는 빠질게요."
이브가 마침내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그동안 계속 밤을 새서 이제 한계예요. 오늘도 눈을 붙여두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몰라요. 죄송해요."
로드가 땀을 삐질 흘리며 '좋으실 대로.'라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이브가 쓰러지면 정말 정말 곤란하다.
"좋아! 그럼 셋이서 가는 거지? 재밌겠다!"
벌떡 일어난 유니벨이 눈을 반짝 반짝 빛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은근슬쩍 널 포함시키는 건데…….'
*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왕궁 밖으로 외출했다.
암시장은 상업 지구에서도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어서 전쟁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었다.
"오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암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가 마다 홍등을 걸어두고 있었는데, 긴 거리와 빨간 불빛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동화 속 분위기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로드가 생각한 블랙마켓의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활발하고 시끄러운 시장의 느낌이었다.
물론 일반 시장과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파는 품목이 꽤나 적나라하다는 것이었다.
도굴한 문화재, 불법 약품, 위조된 신분증, 마법 무구, 살아있는 불법 동물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일반적인 거래로는 매매가 불가능한 그런 품목들이 보란 듯이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그런 위험한 물건들 말고도 일반적인 시장처럼 싸구려 길거리 음식들, 한번 걸쳐 입고 버릴 수 있는 싸구려 옷들, 각종 오락 시설과 잡동사니 등 정말로 없는 게 없었다.
"와아아아!"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유니벨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야, 유니벨! 어디가? 네가 안내해 준다며!"
"나 잠깐 저 옷 좀 보고 올게!"
그녀가 방방 뛰며 상가로 달려 나갔다.
아니, 가이드로 온 애가 더 신나면 어쩌잔 말인가. 게다가 언더하임 토박이면서.
로드는 어쩔 수 없이 가이드의 설명은 포기한 채 홀로 관광객 모드로 들어갔다. 이 시장은 어비스 출신뿐만 아니라 대륙의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오오, 마법사다.'
어비스에서 흔히 보이는 검정 단색 로브가 아닌, 화려한 색감에 무늬를 수놓은 마법사 로브를 입은 영감 둘이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펙투스에서 재료를 사러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과연! 로드는 '언더하임에 없으면 대륙 어디에서도 못 구한다.' 라는 에덴 속담이 떠올랐다.
로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옷자락을 두어 번 잡아당겼다.
"응?"
로드가 내려다보자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알록달록한 과일 꼬치를 조그만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곤 쑥스러웠는지 손을 휙 내리며 힐끔 로드의 눈치를 보았다.
'젠장, 귀여워어어어!'
로드의 입 꼬리가 하늘로 승천할 듯 올라갔다. 이런 귀여운 딸이 있는데 지갑을 열지 않을 아빠가 어디 있으랴! 잠시 후 베아트리체는 행복한 표정으로 과일 꼬치를 핥고 있었다.
유니벨의 말로는 암시장의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위험하고 은밀한 물건들이 많아진다고 했다. 이쪽은 아직 입구 근처라 그런지 사람의 유동도 많고 분위기도 좋았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들어 올리며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드들은 음악을 연주했고 사람들은 그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아직도 승리의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듯 했다. 흥에 흠뻑 빠져있는 사람들을 보니 로드도 가볍게 한잔 하고 싶어졌다.
"짠, 어때?"
유니벨이 어디서 주웠는지 화려한 거적때기를 걸치고 나타났다. 동묘역 시장에서 많이 본 듯한 3천원짜리 할머니 옷의 중세 시대 버전 같았다. 로드는 예의상 '잘 어울려.' 라고 말해주어야 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진실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관 때문에 좀처럼 그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니벨."
"응? 응?"
"과일 꼬치 먹을래?"
기대감 어린 그녀의 표정이 곧바로 싸늘해졌다.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말을 해! 개자식아!"
그녀가 로드의 정강이를 발로 차주고는 씩씩거리며 상가로 되돌아갔다.
'…까다로운 꼬마로군.'
*
로드 일행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장을 쭉 둘러보았다.
세 사람의 관심사는 각기 달랐는데 로드는 관광, 유니벨은 쇼핑, 베아트리체는 그저 '먹을 거'였다.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사라지는 소녀들 때문에 로드는 여러모로 애를 먹어야 했다.
이제 유니벨은 본인의 옷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체도 데려가 멋대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뭘 입어도 귀여웠기에 로드는 언제나 아빠 미소를 지어주었고, 한쪽에 기운 후한 평가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유니벨은 다시 로드의 정강이를 걷어 차주고는 도망쳤다.
'그 놈의 계약만 아니었으면!'
하지만 로드는 참을 인 자를 가슴속에 새기며 참았다. 버릇없는 꼬맹이였지만 무려 B급 무력등급의 출중한 인재다. 같은 편이 된다면 베아트리체를 두 명 갖는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였기에, 로드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유니벨의 보모 및 짐꾼 및 패션 평가자가 되어줄 수 있었다.
"저거 귀엽다! 나 다녀올게!"
유니벨이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끌고 가며 말했다.
"너무 멀리 가지마. 길 잃는다."
"응!"
로드는 아까 간이주점에서 산 나무잔에 담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과연 대륙에서 유명한 맥주 브랜드답게 시원하고 풍미가 짙었다. 또 특유의 끈적끈적한 느낌이 중독성 있었다.
'쩝, 제조 공정의 비밀을 몰랐었더라면 더 맛있었을 텐데…….'
"조카들이랑 같이 놀러 왔나 봐요?"
로드 옆에 나란히 선 남자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음, 뭐… 그런 셈이죠."
로드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는 로드가 주점에서 들렸을 때 만나게 된 사람인데, 모험가 연합에서 일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꽤나 유쾌한 친구였고 서로 대화도 잘 통해서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은 고향이 어딘가요?"
모험가가 물었다. 로드는 예전에 이브와 함께 왔을 때의 설정을 떠올리며 답했다.
"에브게니아요."
"아아, 그렇게 먼 곳에서…… 고생이 많았겠군요."
모험가가 힘찬 동작으로 맥주잔을 내밀자 로드도 맥주잔을 내밀어 부딪치며 화답했다. 그가 독특한 억양의 발음으로 '건배!'라고 중얼거렸다.
어비스에서는 만난 사람의 과거를 캐묻는 것은 실례라는 관습이 있었다. 단지 고향이 어딘지 정도만 물어볼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 배려해주는 점이 로드는 마음에 들었다.
========== 작품 후기 ==========
크아, 주말을 글로 불살랐네요.
이것참 글 쓰는 속도가 선천적으로 느린 편이라 걱정입니다. 몇시간 만에 팍팍 두 세편씩 뽑아내는 작가분들 보면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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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크으리잇 / 베아야, 아조씨랑 비밀친구... 아, 아닙니다.
Lgb / 이런 한 편 한 편을 계기로 조금씩 나아지겠죠?
lineata / 그러게요. 정말 힘들게 궤도에 올랐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