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들과의 외출 -->
뒤에서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마피아들이 인파들을 거칠게 밀치며 바짝 추격해오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들 중간에 '비켜!'라고 말하는 격한 외침 또한 들렸다.
"저쪽 담으로 넘어가자!"
로드가 손으로 높다란 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 민간인들이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들은 군말 없이 로드의 말을 따랐다. 먼저 유니벨이 빠르게 담을 타고 올라갔다.
"주인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면……."
"훗, 이 정도면 혼자서도 가뿐해."
로드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담벼락에 박았다. 그리곤 '웃차' 하는 소리를 내며 능숙하게 담을 타고 올라가 다시 단검으로 더 높은 지점을 찍었다. 같은 방식으로 로드의 몸이 쑥쑥 올라갔다. 마력을 발에 집중하니 균형을 잡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해요!"
생각보다 능숙한 움직임에 베아트리체가 감탄했다. 로드는 우쭐해져서 더욱 더 속도를 냈다.
"이 변태 새끼가 진짜!"
위에 있던 유니벨이 스커트를 가리며 발로 로드의 머리를 퍽퍽 찼다. 너무 몰두해버려서 로드는 그녀가 위에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도 깜박하고 있었다.
하여튼 그녀의 제지는 적절했다. 만약 한번만 더 올라갔으면 로드의 머리가 그녀의 엉덩이에 닿는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핑크색인 거 이미 다 봤으니까 얼른 올라가!"
로드가 얻어맞으면서 소리쳤다.
"……시발 진짜 변태 새끼! 내려가면 죽일 거야!"
유니벨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담을 탔다. 그를 의식해서 그런지 동작이 전보다 굼떠졌다. 로드가 뒤를 돌아보자 마피아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이 왔어! 서둘러!"
"아, 정말! 이쪽 보지 말라고!"
슉! 슈슉!
마피아들이 담을 오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사슬이 걸린 단검을 던졌다. 동시에 지상에 있던 베아트리체 또한 위로 단검을 던졌다. 놀랍게도, 정확한 타이밍에 그녀의 단검과 날아온 단검이 서로 부딪쳐 상쇄되었다. 방향이나 속도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가능한 묘기였다.
"나이스, 베아!"
그녀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유니벨과 로드는 무사히 담을 넘었다. 베아트리체만 홀로 남겨졌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짚는 동작조차 없이 발만 움직여 눈 깜짝할 사이에 벽을 타고 올랐다.
"역시 기가 막히다니깐."
그렇게 세 사람이 모두 담벼락을 내려와 도착한 곳은 상업 지구의 뒷골목이었다. 일종의 지름길로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암시장 보다 달리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들은 금방 암시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좋아,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왕궁이 보일……."
그렇게 말하던 로드가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양 옆에서 따라오던 소녀들도 걸음을 멈췄다.
"찾았드아?."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다수의 마피아들이 걸어 나왔다.
"우리가 여기로 올 걸 어떻게 알았지?"
로드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는 암시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용! 당신들이 담을 넘었단 보고를 듣고 바로 건너왔지용."
"아, 당신이 바로 그 스카 파치노로군."
마피아 조직의 넘버투인 스카 파치노는 여성이었다. 다른 마피아들처럼 중절모에 슈트차림이었지만 그 의상이 무척 어울리지 않았다. 땅콩을 연상케 하는 땅딸막하고 통통한 몸집에, 커다란 머리와 튀어나온 턱주가리, 그리고 분장처럼 두꺼운 화장 때문에 마치 서커스나 오페라에 종사하는 단원 같은 느낌이었다.
'……흐음.'
로드는 등 뒤에서도 인기척을 느꼈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마피아들이었다. 완전히 포위당해 버린것이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듯한데… 어쩔 셈이야?"
스카 파치노가 호호호! 웃으며 코맹맹이 목소리를 냈다.
"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용! 우리라고 해도 섣불리 당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 게다가 당신이 시장에서 난리를 피워놓은 바람에 우리가 당신을 붙잡으려 했단 사실도 다 알려졌을 테니까용."
"잘 아는군."
"하지만?!"
그녀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말했다.
"우리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다시 그 몸에 새겨줘야겠지용! 티가 안 나는 엉덩이와 허벅지 살을 천천히 회 떠서 당신의 입에 차곡차곡 넣어 씹게 할 거야. 아마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때 가 많을 거예용!"
"고문을 하겠단 거군? 너무한데. 나는 그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라고."
"우리를 너무 우습게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용! 당신이 부린 수작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우리의 경고를 모두 무시했어용. 기억나나용? 한때 당신이 보스께 반발했다가 어떻게 됐었는지? 당신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얻어 맞았죵. 그리고 보스께 빌었어용. 제발 살려만 달라고. 다시는 까불지 않겠다고. 정말이지 보스의 구두라도 핥을 기세였지용."
"……."
로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시선을 슬쩍 돌리자 베아트리체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럼 과거의 나를 위해 여기서 복수라도 해 줘야 하나?"
"…무슨 소리죵?"
마침 마피아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왔구나.'
로드가 팔을 크게 흔들며 소리쳤다.
"어?이, 경비병들 거기 있어? 나 국왕이야! 살려줘! 놈들이 날 해치려 하고 있어!"
그렇다. 마피아들의 후방에서 나타난 건 열 명가량의 언더하임 경비대들이었다. 보통은 3인 1조로 순찰을 다니지만 요즘처럼 도시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는 소대 급의 인원이 함께 움직이곤 했다. 물론 로드는 그들의 순찰 경로를 암기하고 있었다.
"아, 뭔가 했더니 고작 경비대를 부른 거였나용?"
스카 파치노가 콧방귀를 뀌더니 살벌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거기, 당신들! 죽기 싫으면 꺼지세용!"
그녀의 엄포에도 경비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 하지만! 폐하가 그쪽에 계시다고……."
"그냥 술꾼의 헛소리예용! 어떻게 이런 허름한 골목에 왕이 있을 수가 있겠……."
그 순간 베아트리체가 골목 벽을 타고 뛰어가 포위하고 있던 마피아 무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쳤다. 그리고 경비병들 앞에 도달한 그녀의 모습이 파밧! 바뀌며 로드가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자, 나 맞지?"
"폐, 폐하!"
경비병들이 일제히 경례 자세를 취했다.
"나를 시해하려고 한 자들이다. 전부 체포해."
"오홍홍홍홍! 누가 누굴 체포한다는 건가용! 재미있군용!"
큰 소리로 웃어대던 스카 파치노의 눈동자에 순간 시뻘건 핏줄이 섰다.
"왕은 목숨만 붙이고, 나머진 전부 죽여."
스릉! 스릉! 마피아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경비병들은 벌벌 떨며 창을 앞세웠다. 마틴의 세력인 마피아들과 싸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봉급을 받고 사는 군인들이 왕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잘 부탁해."
로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경비병들에게 한 게 아닌, 마피아들의 건너편에 있는 유니벨과 베아트리체 더러 한 이야기였다.
"하아, 놀러 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그녀가 양 손을 교차해 세우자 손가락 사이로 탄환들이 붉은 마력을 스멀스멀 뿜어내며 나타났다.
"……집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도 양 손에 단검을 꺼내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다 죽여버려!"
스카 파치노가 꽥 소리 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 있던 마피아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
"…어라?"
스카 파치노가 입을 쩍 벌렸다.
"어라라라?"
멍하니 있는 그녀의 옆으로 마피아 하나가 날아와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이, 이게 대체 뭐야아!"
전황은 압도적, 아니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유니벨의 폭발이 펑펑 일어날 때 마다 조직원들은 낙엽처럼 휩쓸려 날아갔고, 베아트리체가 무표정하게 쓱싹쓱싹 검을 휘두르며 지나갈 때마다 조직원들이 털썩 털썩 쓰러졌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슬로우 모션인 적들 사이에서 홀로 두 배속으로 움직이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러니까요. 아줌마."
로드가 한가하게 귀를 후비며 말했다. 경비병들 쪽으로는 마피아들이 얼마 오지도 못했다. 저 두 소녀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쪽 병력 전부 다 합쳐도 50명밖에 없다면서? 대체 무슨 깡으로 덤빈 거야?"
"이, 이이이익!"
무려 B급 무력형 영웅이 둘이다. 군대를 통째로 데려와도 모자를 판에 고작 몇 십 명의 조직원으로 상대해 보려는 게 애초부터 무리수였다.
뻐뻐벅!
스카 파치노의 옆에서 호위하던 두 명의 마피아들이 붉은 탄환에 맞아 날아갔다.
"유, 유니벨 상단주! 당신이 어째서 우릴 공격하는 건가용! 지금 보스를 배신하는 겁니까!"
"참 나."
유니벨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아줌마가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라며?"
"다, 당신이 있는 줄은 몰랐어용! 당신은 제외할 테니까 그만 가봐도 좋아용!"
"염병, 이미 늦었어!"
그녀가 마피아 하나의 얼굴을 무릎으로 쳐 올리며 소리쳤다. 그는 쌍 코피를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자, 어떻게 할래? 스카 파치노."
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과거에 했던 짓을 이 자리에서 재현해본다면 용서해 줄 수도 있다고."
"이, 이, 이 새끼가 감히이이!"
그녀가 통통한 양 팔을 펼쳤다. 그러자 손톱이 길게 늘어나며 마치 검의 형상처럼 변했다.
"죽여버리겠어용!"
'어이쿠.'
로드가 뒤로 물러나자 경비대들이 창을 쥐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잔챙이들은 비키세용!"
그녀가 몸을 회전시키면서 두 팔을 뻗었다. 마치 날이 달린 팽이가 된 그녀의 몸이 전진하자 주위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오, 그래도 마피아의 넘버투라고, 제법 실력은 있는데?'
단번에 로드와의 거리를 좁힌 그녀가 회전을 멈추고 손톱을 휘둘렀다. 로드도 단검을 꺼내 대응 했다.
채앵!
로드는 손톱을 잘라버릴 기세로 휘둘렀지만 강철처럼 단단했다. 역시 고유 능력의 일종인 듯 보였다.
"죽어어!"
그녀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손을 뻗자 손톱이 슉! 하고 날아왔다.
'원거리 공격도 되는 거냐!'
하지만 로드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다. 투사체의 궤적의 계산을 마친 그가 옆으로 뛰어들며 날아오는 방향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채카앙! 불똥이 튀며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로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스카 파치노는 뽑힌 손톱을 다시 길게 늘여 달려들었다. 로드는 아직 동작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잡았어용!'
그녀가 그렇게 생각 하는 순간, 머리 위로 베아트리체의 가지런한 두 발이 떨어졌다. 쿵! 스카 파치노는 그대로 무게에 짓눌려 바닥에 머리를 크게 찧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입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바닥에 박고 기절했다.
"……휴우, 위험할 뻔 했네."
소매로 땀을 한 번 닦은 로드가 쪼그려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드는 오늘 아침, 정보부로부터 마피아들이 왕궁 근처에 잠복해 왕실식구들의 출입 사실을 살피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스카 파치노가 이끄는 마피아 잔당들은 유력 클랜을 상대로 테러까지 저지를 정도로 난폭하고 과감한 자들이었고, 그 점을 이용해 로드는 함정을 팠다. 그가 암시장으로 외출하기 전에 정보부 요원들에게 자신의 외출 사실을 마피아들의 귀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해둔 것이다. 사실 정보력부터 게임이 안 됐었다.
그렇게 스카 파치노는 미끼를 물었고, 무모하다면 무모한 국왕 납치 사건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왕궁이 아닌, 경비대의 감옥에 갇힐 것이다. 로드의 목적은 바로 마피아의 문제에 '경비대'를 엮는 것이었다. 경비대장 한스는 언제나 중립을 표명해왔으나 마피아의 넘버투를 잡아넣으면 사실상 마피아와 척을 지게 될 것이다.
물론 마틴은 마음먹으면 능히 그녀를 감옥에서 빼낼 수 있겠지만 강제적인 수단을 쓸 경우 더더욱 한스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로드는 이 수지타산까지 계산을 마치고 경비대의 정찰 루트로 도망친 것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을까?'
로드가 그녀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니, 딱히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상대가 왕이나 공무를 수행하는 경비대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죽여 버리라는 명령을 간단히 내렸다. 거기에 상대를 깔보는 듯 한 거만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아직도 마피아라는 조직이 어비스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듯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의 로드를 본 적이 없다. 여전히 그를 천하의 소인배마냥 평가절하하고 있었는데, 아마 붙잡아다 고문 좀 시키면 입을 꾹 다물고 고분고분해질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네 방심이 자초한 일이다. 스카 파치노."
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연행되는 그녀와 마피아 조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왕을 납치하려다 오히려 경비대 감옥에 갇히게 되는 마피아들. 마피아가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였다.
로드는 정보부를 통해 이 사실을 크게 소문 낼 생각이었다. 이로 인해 마틴의 권위가 떨어짐은 물론이고, 마피아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국민들의 인식 속에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야! 팬더!"
상황이 정리되자 유니벨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날 이용한거지? 이러려고 날 암시장에 데려온 거지?"
그녀가 노발대발하자 로드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스스로 오겠다고 한 거잖아."
"……."
그녀는 갑자기 민망해진 듯 고개를 돌리며 손 부채질을 했다.
"아, 시끄러! 나 힘썼으니까 배고파. 밥은 네가 사는 거다?"
"……돈도 나보다 많으면서."
로드가 투덜거리고 있는데 그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보였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딸을 먹이지 않으면 누가 먹이겠는가!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뺨에 혈흔을 묻힌 채로 저렇게 귀엽게 쳐다봐서 조금 무섭다는 점이었다.
"그래, 다들 고생 했으니 오늘은 내가 쏜다!"
"진짜지?"
유니벨은 그제서야 인상을 풀고 활짝 웃었다.
"술 마시러 가자!"
"너흰 미성년……."
"아 시끄러! 내가 맛집 아니까 얼른 와!"
유니벨이 달려나가며 말했다. 로드도 픽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