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데타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끄으으……."
침대에서 막 일어난 로드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어젯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통 때문에 좀 더 늦장을 부리고 싶었으나, 출근 시간이 다 됐음을 깨닫고는 퍼뜩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이브의 화난 얼굴이 떠오르니 절로 움직임이 빠릿빠릿해졌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낸 그가 겉옷을 걸치려는데, 그만 팔꿈치에 스탠드가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와장창! 로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스탠드 장식이 깨져나가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윽, 어쩐지 하루의 시작이 불길한데…….'
대충 조각들을 한데 모아둔 로드는 메이드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침실에서 나왔다.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그가 이마를 짚었다.
'저쪽 세계에선 술이 센 편이라 방심했나? 아무리 그래도 얼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 지경이라니……. 쯧.'
아직도 머리가 띵한 것이 컨디션이 영 최악이었다. 오전 일정만 마무리되면 잠시 눈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왕궁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고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등이 뒤섞여 훌륭한 잡음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질서 없는 소음에 노출되어 있으려니 괜히 머리가 더 아파왔다.
"앗, 폐하!"
그때 마침 복도를 뛰어다니던 정보부 요원과 마주쳤다. 애니록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자주 집무실에 보고를 하러 와서 나름 눈에 익은 인물이었다. 그가 로드를 보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아니, 폐하! 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응? 이제 막 출근하는 길인데… 무슨 일 있어?"
"마틴이요! 마틴이 언더하임에 돌아왔단 말입니다!"
로드가 움찔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게 이렇게까지 난리 칠 일이야? 물론 이렇게 빨리 온 건 의외긴 하지만… 마틴이 언더하임에 돌아오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잖아. 아니면 성문까지 나가서 환영식 같은 거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내가 늦어버려서 일정이 캔슬이라도 된 건가?"
"아,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더듬거리며 말하던 정보부 요원이 이내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마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단 말입니다!"
"……?"
"이쪽에는 아무런 통지도 없이 밤 사이에 병력들을 데리고 언더하임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수도에 들어왔는데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병력을 각 길목에 퍼뜨려서 마치 수색하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로드가 진지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포위망 인가? 놈들의 예상 목적지는?"
"……아마도."
그가 긴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곳 왕궁입니다."
"……!"
정신이 번쩍 든 로드가 즉시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폐, 폐하!"
"왕실 친위대를 대기시켜! 그리고 경비대, 흑익, 황동파 등 각 클랜들에게 연락해!"
"아, 알겠습니다!"
로드는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에 나있는 가장 큰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런."
창가 너무 보이는 왕궁 정원의 광경 너머로, 무기를 든 마틴의 군사들이 왕궁을 포위하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심지어 가장 정면의 부대는 벌써 왕궁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난관을 붙잡은 로드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쿠데타…!'
*
"머, 멈추시오!"
"이러시면 안됩니다! 대부!"
왕궁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 둘이 창을 움켜쥐며 소리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너머로, 마틴의 군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새까만 검은 슈트에 도검과 나이프로 무장한 그들, 주위 거주지에 사는 사람들은 황급히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이 군사들의 가장 앞에 서서 걸어오는 곰 같은 덩치의 남자. 뒤에서 오는 군사의 행군보다, 이 한 사람의 존재감이 더 강했다.
"……비켜라."
시가 연기를 흩뿌리며 마틴이 음침하게 말했다.
"……!"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경비들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에 힘이 쭉 빠지며 들고 있는 창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마틴과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경비 하나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무, 물러나시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슈화악!
두 사람의 사이로 마틴의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가 양팔을 뻗자 친위대 두 사람의 몸이 날아가 좌우의 벽에 부딪치며 몸이 캔처럼 찌그러졌다. 살이 뭉개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가뿐하게 팔을 내린 마틴이 다시 성큼 성큼 걸어가 왕궁의 입구를 통과했다. 마피아들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놈들이 왔다!"
친위대들이 우르르 몰려와 왕궁 정원에 대열을 맞추어 서서 그들과 대치했다. 건물의 2층 복도에도 궁병들이 달려와 활을 겨누었다.
"멈추시오! 이 이상 다가오면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소!"
마틴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품에서 긴 총신을 가진 머스킷을 한 손으로 꺼냈다. 탄약을 사용하는 게 아닌, 정제된 마력을 탄환으로 쏘아 보내는 최상급의 마법 무구였다.
"본인에게."
철컥! 총구가 친위대 진형으로 향했다.
"명령하지 마라."
터어어엉!
머스킷의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환이 쏜살같이 친위대 진형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아앙!
관통 효과가 아닌, 탄환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주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지직! 지직! 마치 전기를 연상케 하는 푸른 마력의 총흔들만이 바닥이 남았다.
"마, 말도 안 돼!"
일격만으로 친위대의 1진이 전멸 위기에 빠진 것이다. 폭격의 범위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마틴이 머스킷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꾸물거릴 시간 없다. 쳐라."
"와아아아아아!"
마피아들이 무기를 뽑아 들며 친위대에게로 달려들었다.
드러그팜에서 돌아온 최정예 마피아들의 실력은 어째서 그들이 이 어비스의 지배자였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은 데다가 마틴의 고유 능력의 효과로 사기가 극도로 낮아진 왕실 친위대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마틴, 네이노옴!"
쿠웅!
바로 그때, 키가 2미터는 될법한 친위병이 마피아들의 포위를 뚫어내고는 홀로 서 있는 마틴에게 달려들었다. '친위대의 거인.'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가 외쳤다.
"네놈만은 내가 죽인다!"
후우우웅! 그가 본인의 덩치만큼 커다란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콰직!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야가 까매지며 안면에 통증이 일었다.
'크헉!'
마틴에게 얼굴을 붙잡힌 것이다. 그야말로 얼굴이 찌그러질 것만 같은 통증에, 그가 할버드를 놓으며 양 손으로 마틴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마틴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거구를 들어 올린 마틴이 그대로 몸을 숙이며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쿠쿠쿠쿵!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얼굴이 바닥에 박혔다.
"흐읍."
마틴은 당근이라도 뽑듯 다시 거구의 몸체를 들어 올려 친위대들이 뭉쳐 있는 곳으로 던졌다.
"피, 피해!"
콰콰쾅! 거구에 부딪친 병사들이 그야말로 볼링 핀처럼 나가떨어졌다.
마틴은 가볍게 옷소매를 턴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벅 저벅 왕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피아들이 먼저 달려들어 마틴의 걸음이 닿기에 앞서 전방의 친위대들을 처치해 나갔다.
전황은 압도적이었다.
*
콰앙!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무장한 마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없나?"
"여긴 없는 것 같습니다!"
"……."
서류를 탁탁 내리치며 로드의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둔 이브는 침착하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들이죠? 여긴 폐하의 집무실입니다. 당장 물러나세요."
그러나 마피아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마피아가 물었다.
"왕은 어디에 있나?"
"……지금 당장."
이브의 목소리에 으스스한 살기가 섞였다.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
이브의 꽉 쥔 주먹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마피아들이 움찔하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그때, 열린 집무실 문 사이로 마틴이 걸어 들어왔다.
"오래간만이군, 신관."
마틴이 후욱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이브는 마지못해 팔을 내리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대부."
"로드는 어디 있나?"
"모릅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도 당신께 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안타깝군."
마틴의 느긋한 태도에 이브가 울컥해서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점거하다니! 이번 행동은 정말로 도를 넘었어요! 이건 반역 행위란 말입니다!"
그녀의 날 선 외침에도 마틴은 그저 음침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본인이 뿌린 씨앗을 스스로 거두는 것뿐이다."
"마틴! 당신 대체…!"
그녀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나라에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뭐죠? 그래도 당신이 태어나 자란 나라 아닌가요? 대체 왜!"
"……당연하지 않은가."
후우우. 마틴이 다시 느릿하게 시가 연기를 뿜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가 이브에게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며,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신관은 이 방에 구금한다.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하면 죽여도 좋다."
"예! 보스!"
이브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폐하.'
*
로드와 베아트리체가 기둥 뒤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마피아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자 베아트리체가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시간을 낭비했어. 설마 지하실 통로마저 막혀 있을 줄은……."
로드가 움직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 정원으로 빠져나가는 루트가 남아있어요."
"좋아! 그쪽으로 가보자."
두 사람이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시 기둥 뒤에 몸을 숨겨야 했다.
"어이, 자네 어디가나? 갑자기 왜 그래?"
두 명의 무장한 마피아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여기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런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의 뒤로, 베아트리체의 신형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퍼억! 그의 동공이 풀리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뒤로 다가온 로드가 하나 남은 마피아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그 마피아 또한 동료 옆에 나란히 쓰러져 기절했다. 베아트리체가 신속한 동작으로 두 사람의 몸을 끌고 가 커튼 뒤로 숨겼다.
"가자."
"네!"
두 사람은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오르고, 벽을 탔으며, 4층에서 다시 3층으로 떨어지는 등 복잡한 동선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마피아들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이브가 무사해야 할 텐데……."
로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마틴이라도, 신관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겠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피던 베아트리체가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마치 한 마리의 도둑고양이처럼 동작이 은밀하고 신속했다. 이어서 그녀의 고유 능력으로 로드와 몸을 교체한 다음, 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지상에 내려온 로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궁의 뒤편에 위치한 정원으로 보였는데 높다란 덤불들과 식물들로 이루어진 자연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이었다.
"이쪽이야?"
그녀가 내려오자 로드가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켰다.
"네, 조금만 더 가면 테라광산과 연결되는 동굴이 보일 거예요."
"좋아.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다행히 마피아들의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전력 질주로 정원을 내달릴 수 있었다.
"이쪽이에요."
베아트리체가 속삭이듯 말했다. 높다란 울타리를 따라 달려간 그들이 정원 모퉁이를 돌았다. 이제 동굴이 눈앞에 보일 터였다.
'……어?'
로드가 경악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베아트리체 또한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둘 다 안녕?"
그곳에는, 유니벨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