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39화 (39/296)

<-- 쿠데타 -->

바위에 앉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유니벨의 뒤로, 흑익의 호위병들과 마피아 몇몇이 물샐 틈 없이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유, 유니벨."

로드는 말문이 턱 막힌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베아트리체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유니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우훗, 보면 모르겠니?"

그녀가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로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태껏 그녀에게서 본 적이 없는, 가면 뒤의 새로운 얼굴을 대면하는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나 마틴 아저씨한테 붙었어."

그 말을 들은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싹 얼어붙었다.

"……배신, 하는 거야?"

"어머, 배신이라니? 난 처음부터 너희들의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너희가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바보들아,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렇게 저 변태를 혐오하던 내가 너무 순순히 협력했다. 뭐 그런 의심 안 해봤니?"

로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의심은 했지. 그래도 그동안 네 편견을 바꾸려 노력했는데…… 불합격인가?"

"응, 불합격이야."

유니벨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겨우 한 번의 애매한 승리 가지고 뭐라도 된 듯 도취되지 말아줄래? 나는 상인이야. 좀 더 확실한 가능성에 투자를 하지."

그녀가 로드의 눈을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네 방식으로는 절대 이 나라를 구할 수 없어. 넌 그냥 길바닥에 널린 이상주의자 중 하나일 뿐이야."

"……유니이이이이!"

말릴 새도 없이 베아트리체가 단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유니벨이 '하-'하고 웃으며 여유롭게 붉은빛의 막대를 소환해 공격을 막아냈다.

"또, 또, 그런다."

맞댄 무기 사이로 유니벨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가 으스스한 광채를 뿜어냈다.

"감정에 먹혀 버리면 약하다니까."

꽈앙! 유니벨의 막대가 폭발로 산화했다. 힘을 주고 있던 베아트리체의 단검이 그대로 움직여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동작을 비집고 들어온 유니벨의 발이 베아트리체의 복부를 강하게 타격했다.

'크읏!'

베아트리체의 몸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주위로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베, 베아!"

"잘했다. 유니벨."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틴과 마피아들까지 도착했다. 마틴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바닥에 쓰러진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더 경직됐다. 로드 또한 팔이 으슬으슬 떨리며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 졌다.

"계획대로 잘 움직여줬다. 그대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놓쳤을 지도 몰랐겠군."

"웬일로 안 어울리게 칭찬을 다 하고 그래?"

유니벨이 손바닥을 탁탁 털며 말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말아줬음 하는데. 아저씨가 좋아서 돕는 게 아니라, 나는 단지 저 개자식을 찢어 죽이고 싶었을 뿐이야."

"공공의 적이라, 그런 이유라면 더 좋군."

마틴은 그렇게 말하며 로드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큭.'

로드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포켓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고통을 참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머, 약효가 이제 오나 보네?"

그 모습을 본 유니벨이 웃었다.

"……약효라고?"

"술에 조금 장난을 쳤거든. 지금까지 뛰어다닌 것도 용해."

마틴이 로드에게 접근하려 하자 베아트리체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멈춰!"

베아트리체가 마틴에게 달려드려는 순간, 유니벨이 그녀의 뒤로 번쩍 나타났다. 그리고는 빠르게 수갑을 그녀의 한쪽 팔에 걸었다.

"이까짓 거…!"

영체화 능력을 가진 베아트리체가 수갑을 통과하여 달려 나가려했지만 수갑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그녀의 몸이 덜컥! 멈춰졌다.

'어, 어째서?'

"그 까다로운 능력. 내가 대비하지 않았을 것 같아?"

유니벨이 그대로 힘을 실어 수갑을 잡아 당겼다. 몸의 중심을 잃은 베아트리체가 끌려 들어오자 유니벨은 수갑을 놓으며 돌려차기를 가했다.

퍼억!

베아트리체가 몸이 풀밭을 가르고 날아가 성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어서 유니벨의 붉은 탄환이 쇄도하여 연거푸 폭발을 일으켰다.

"베아!"

로드가 단검을 꼬나 쥐고 달려가려 했지만 마틴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로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마틴과의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데 순간 그의 얼굴이 슉! 하고 코앞에서 나타났다.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리군."

뻐억!

복부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로드의 몸이 기역자로 꺾이며 발이 잠시 땅에서 떨어졌다.

"커… 커허억!"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다시 바닥에 발이 닿은 로드가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줄을 끊고 달아난 개는."

후우웅! 마틴의 팔이 움직였다.

"필요 없다."

콰아아아아앙!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로드의 몸이 공중에서 몇 미터나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마틴은 시가를 꺼내 물며 등을 돌렸다.

"두 놈 다 옥에 가둬라."

*

'……으으으.'

메이드는 평소처럼 음식이 담긴 서빙 카트를 몰고 왕궁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왕궁 복도에 불량한 포즈로 늘어서있는 마피아들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성희롱의 수준을 넘어선,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의 외설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체가 자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듣지 않으려, 얼굴이 빨개지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며 걸어가야 했다.

그때 벽에 기대어 서있던 마피아가 하나가 슬쩍 발을 걸었다. 앞만 보고 걷고 있던 그녀가 발에 걸려 휘청거렸고 그 바람에 밀고 있던 카트가 움직여 한 마피아의 몸에 툭 하고 닿았다.

메이드의 얼굴이 백지처럼 새하얘졌다.

"이 여자가 미쳤나?"

험상궂은 마피아가 분노하며 걸어왔다. 주위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들이 들렸다.

"……아."

이 나라에 살면서 마피아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녀는 뱀 앞에서 굳어져 버린 개구리 마냥 꼼짝할 수 없었다.

"이봐."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한 건 둘째 치고, 어떻게 할 거야? 새로 산 구두에 수프가 튀었잖아."

그가 한 쪽 발을 내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구두에는 수프는커녕 얼룩 하나 없었다. 전형적인 싸구려 시비였으나, 겁에 단단히 질린 그녀는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핥아."

마피아가 입 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네 멋대로 더럽혔으니 깨끗하게 해야 할 거 아냐."

너무나 두려운 와중에도 그녀는 모멸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길거리의 창녀들에게도 이런 모욕적인 요구를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몸을 떨면서 가만히 있자 마피아가 단검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를 지나 그녀의 발밑에 콱! 하고 박혔다. 메이드가 너무 놀라 그만 바닥에 엎어졌다.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보네."

마피아의 눈동자에 살의가 일었다.

순간적인 생명의 위협에 그녀의 사고는 정지되었다. 모든 감정, 감성이 억압되며 생존에 대한 본능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여, 혓바닥을 더러운 구두에 가져다 대었다.

"큭, 크하하하하하!"

"웃기네! 하란다고 진짜 하냐?"

"변태왕의 성노예들 아니랄 까봐, 능숙하구만. 능숙해."

메이드는 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박힌 단검에 계속 시선이 갔다. 살고 싶다는 본능이 애써 이 치욕을 더디게 해주었다.

"엉덩이 더 치켜들어, 이년아!"

"다른 것도 시켜봐. 다른 것도."

그때 그녀의 몸에 낯선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놀라 그만 몸이 굳어졌다.

"쉬지 말라고!"

마피아가 그대로 발을 올렸다. 얼굴을 부딪친 그녀가 나자빠지자 다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들이 쏟아졌다.

'……'

한발 늦게 비참함이 밀려들었다. 이것이 패배한 세력의 여자들이 겪는 운명이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뚝.

마피아들의 웃음소리가 일제히 끊겼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무거운 정적.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마틴이었다.

마피아들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마틴의 시선이 널브러져있는 메이드와 바닥에 박힌 단검으로 향했다.

"본인이 두 번 물어야 하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물었다."

"보, 보, 보스! 그, 그것이……!"

메이드를 희롱하던 마피아는 패닉 상태가 되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분명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말했을 터."

마틴이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꺼냈다.

"보, 보스! 제발 자비를!"

쩌억!

마틴이 손바닥으로 마피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마치 파리가 찌부러지듯, 그의 얼굴이 벽에 부딪쳤다.

쿵! 그리고 벽에 부딪친 피범벅의 얼굴이 서서히 내려오며 벽에 생생한 붉은 자국을 남겼다.

"너는 가라."

메이드에게 향한 말이었다. 그녀는 입도 뻐끔거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서핑 카트를 몰고 뛰었다. 정말로 본능에 충실한 움직임이었다.

마틴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서빙 카트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로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 입구에는 마피아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이제 마피아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녀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죠?"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 식사를 가져왔어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울먹임이 섞인 외침에 이브가 문을 열었다. 메이드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무슨 일 있었나요?"

이브가 상냥하게 묻자 메이드는 결국 눈물샘이 폭발했다. 그녀는 평소 언니처럼 대하던 이브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이브는 말없이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시 후, 메이드가 진정되자 이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많이 놀랐겠군요. 왕궁이 마피아들에게 장악 당해 이런 일이……."

"언니들도 주방 밖으로는 나오지도 못하고 있어요.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면서……."

이브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로드 또한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해.'

그녀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메이드의 어깨를 짚었다.

"부탁이 있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네?"

한 나라의 신관인 동시에 왕궁 총무이기도 한 이브는 '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어비스 의회'는 발언권을 가진 24개 클랜의 대표가 참석하여 국가 작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의제를 올리고 그것에 대한 투표를 통해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물론 어비스의 문화적 특성상 자주 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브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브는 금세 빈 종이에 서신을 작성하고는 말했다.

"이 서신을 음식 안에 숨겨서 주방으로 가져가 주세요. 어떻게든 의회 위원회에 가져가야 해요."

"…위, 위원회요? 하, 하지만 주방으로 가져가는 건 어렵지 않아도 그 다음엔 어떻게……?"

"제게 계획이 있어요."

쿵!

갑자기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며 마틴이 불시에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메이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덜덜 떨었고 이브는 책상의 서신을 자연스럽게 손바닥으로 가리며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죠? 문을 잠가 놓았을 텐데."

"아, 실례했군. 신관."

그가 문 손잡이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것은 이미 간단히 박살 나 있었다.

"혈색이 많이 안 좋군. 식사도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군이 갇혀있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음식이 넘어가겠습니까?"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틴은 클클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눈물 나는 충심이로군. 충성스러운 자는 싫어하지 않아. 그대의 능력과 신관으로서의 상징성은 본인도 높게 평하는 바이다. 어떤가? 앞으로는 본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그런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마틴!"

그녀의 외침을 들은 마피아 몇몇이 발끈하여 나섰다.

"대부께 예를 지키시오! 신관!"

"되었다."

마틴이 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을 저지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의 손바닥 아래에 있는 걸 좀 봐도 되겠나?"

========== 작품 후기 ==========

귀성길 무사히 돌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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