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데타 -->
'역시 알고 있었나.'
이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마틴을 상대로 서신을 빼앗기지 않을 가능성은 없었다. 이브는 오히려 당당하게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잠시 그것을 살펴보던 마틴이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의회 소집령을 내릴 생각이었나?"
"그렇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의외로 너무 쉽게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왕의 처형은 이틀 후다. 그렇다면 개최 시일은 내일 9시, 소집자는 신관 이브. 오늘 안에 우리를 제외한 23개 클랜에게 의회 소집 명령을 담은 서신을 보내놓도록 하지. 서신 내용은 공정하게 위원회 사람들이 작성하도록 해놓겠다. 이 정도면 됐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하지만 소집령을 허락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다시 보도록 하지."
*
왕궁 지하 감옥.
로드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입에서는 짙은 피 맛이 났다. 눈을 뜨니 처음 보인 것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의 모습이었다. 꿉꿉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로드는 버릇처럼 눈을 비비려고 했다. 철커덩! 그러나 그 대신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팽팽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양 팔의 구속구에 사슬이 연결되어 좌우 벽 끝에 고정되어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일어나자마자 팔이 저리다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다.
"……주인님!"
베아트리체가 로드가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손목에는 유니벨이 채웠던 수갑이 그대로. 한 쪽 발목에는 구속구가 채어져 있었으며 연결된 사슬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와 로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로드는 상의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걸 느꼈다.
"괜찮아? 베아?"
"……네. 주인님은요?"
"나도 그럭저럭."
가슴에 파묻힌 그녀가 고개를 들자 로드는 갑자기 밀려오는 고통에 한 쪽 눈을 찡그렸다. 마틴에게 얻어맞은 부분이 몹시 쓰렸다.
"주인님!"
"괜찮아, 괜찮아."
통증은 나름대로 참을 만 했다. 하지만 지하실의 한기에 몸이 절로 으슬으슬 떨렸다.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이런 장소에 이런 꼴로 매달아 놓다니……. 마틴에게는 조금 섭섭한걸."
로드가 애써 웃음 지으며 농담을 던져 보았지만 베아트리체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무 걱정하지 마."
로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팔이 구속되어 있는 걸 다시 깨닫고는 포기했다.
"마틴은 바로 날 죽이진 못해. 무리하게 군대를 밀고 들어와 왕궁을 점거한 것부터가 무리수였으니까. 거기서 왕인 나를 자기 멋대로 죽인다면 국민들의 불만과 반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겠지. 특히 난 전쟁으로 어느 정도 주가가 오른 상태라, 처형하려면 그에 걸맞은 명분이 필요 할 거야."
"명분… 이요?"
"응. 뭐, 물론 그런 명분도 어느 정도 준비됐으니까 왕궁을 친 거겠지만."
베아트리체가 다시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그건 그렇고, 마틴도 참 대단하다니까.'
이번 전쟁의 승리로, 로드는 국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언더하임을 도우러 오지 않은 마틴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거기에 어젯밤에는 스카 파치노의 의욕만 앞선 자책골로 마틴의 인지도는 더더욱 떨어질 터였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하루. 장기판에서 로드가 '장군'을 외치는 순간, 마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판을 통째로 뒤엎어버렸다. 이른 아침 왕궁을 점거하면서 모든 이슈들을 그대로 묻어버린 것이다.
로드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결단력과 행동력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감옥의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며 창살 너머로 빛이 보였다. 로드의 옷자락을 붙든 베아트리체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둘 다 잘 있군."
횃불을 들고 창살로 고개를 들이민 것은 중년의 마피아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열쇠들을 보니 그가 이곳의 간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뒤에는 그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마피아가 있었다.
"국왕 나으리. 감옥 안은 좀 어떠신가? 좀 지낼 만 하신가?"
간수역의 중년 마피아가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다 좋은데 너무 추워. 불 좀 피워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로드가 넉살 좋게 대꾸했다. 간수가 클클 웃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얌전히 있으셔. 얼마 안 가 처형식이 시작될 테니까. 밖이 좀 소란스러워서 보스께서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거든. 어라?"
간수가 손에 든 횃불을 옆으로 움직였다. 로드의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보였다.
"어? 저 년 저거 암살단장 아닙니까?"
뒤에 서 있던 후배 마피아가 말했다.
"오, 그렇구만! 데려온 은혜도 모르고 왕에게 꼬리를 친 그 ‘귀검’이 아니신가?"
간수가 탐욕 어린 눈으로 그녀의 몸을 위 아래로 슥 훑었다.
"딱히 보스께서 저년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도 없으셨으니까."
철컹! 간수가 감옥 문을 열고 성큼 성큼 들어왔다. 그리곤 베아트리체의 구속구에 있던 벽에 걸린 고리를 풀어냈다.
"무, 무슨!"
간수가 다가와 수갑에 묶인 베아트리체의 팔을 잡아 당겨 강제로 몸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곤 바짝 다가온 그녀의 몸을 품평하듯 바라보았다.
"히야! 이 짓거리도 오래 하고 봐야 돼. 이게 왠 호사야!"
간수가 그녀의 하얀 다리를 슥슥 문질렀다. 베아트리체가 질색하듯 몸을 뒤틀었다.
"아, 가만히 있어! 이년아!"
철썩 그녀의 뺨이 돌아갔다. 간수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두 팔을 낚아채 올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몸을 더듬었다.
"...싫어!"
"쪼끄마한 년이 발육은 괜찮군."
희롱하듯 다리에서 서서히 올라오던 간수의 손이 이내 그녀의 둔부를 꽉 움켜쥐었다.
"하읏!"
간수는 그녀의 표정을 감미롭게 감상하며 손을 땠다. 그리곤 이번엔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베아트리체가 새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간부가 신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어이, 들었냐? 들었어? 응? 이년 아주 물건인데!"
"아, 형님! 미칠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회는 있는 거겠죠?"
"기다려봐 새끼야."
간수가 베아트리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수치심으로 입을 앙다물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런 가련한 모습이 간수의 탐욕을 더욱 부추겼다.
"이봐."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로드가 입을 열었다.
"어이쿠, 국왕 나으리! 잘 참고 있는 듯 하더니 결국 한계인가 봐? 하지만 이를 어쩌나. 당신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닌데! 그냥 네 부하가 당하는 걸 지켜보고나 있으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로드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내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당신들도 들었지?"
"크흐흐! 자?알 알고 있지. 왕노릇 할 때는 아주 질펀하게 놀아나셨더만? 응?"
"그런데 있잖아. 나는 저렇게 귀여운 여자애를 곁에 두고도, 여태껏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어. 왜 그런지 알아?"
"……엉?"
로드의 눈에 보랏빛 마력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그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움직였다. 목소리는 내지 않았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간수의 표정이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히, 히이이이익!"
그가 끔찍한 것이라도 만진 듯 베아트리체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시, 시발! 아아아! 야, 문 잠그고 와! 으아아아! 시발!"
간수가 도망치듯 감옥을 뛰쳐나갔다.
"혀, 형님? 아니 왜 그러세요? 형님!"
후배 마피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와 뛰쳐나가는 선배를 번갈아 보더니, 감옥문을 잠그고 그를 뒤따라갔다.
"……?"
베아트리체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가고 나서야 로드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으, 개 같은 자식들! 못 참고 뒤엎을 뻔 했네. 밖에 나가면 저 새끼는 내 손으로 직접 조진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주인님."
베아트리체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뭐라고 하신 거예요?"
"엉?"
로드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어? 으음, 어…… 음. 비, 비밀이야. 아직 네가 알기엔 사 년은 이르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로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
이브는 집무실에 있는 자료들만으로 의회에서 로드를 변호할 내용의 문서들을 만들어 나갔다. 마틴이 의회에서 어떤 꿍꿍이를 벌일지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지금은 각 클랜들이 마틴의 눈치를 보고 있지만 그들 모두 아로게쓰와의 전쟁 때 로드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그의 활약을 가까이서 지켜본 자들이었다. 과반수의 득표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밤을 새서 자료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마틴이 집무실로 찾아왔다.
"약속대로 어제 모든 클랜들에게 의회 소집령을 보냈네."
"그럼, 회의실로 가죠."
밤을 샌 이브가 퀭한 눈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신관."
"……네? 이제 와서 무슨!"
마틴은 뒤에 서있던 부하에게서 서신을 받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 의회 위원회에서 밝힙니다. 의회 소집자 '이브'님의 의회 소집령은 과반수 이하의 클랜이 참석에 거부 의사를 밝힘에 따라 기각됨을 알려드립니다.
〈24개 클랜 중 2개 클랜 참가. 〉
서신을 읽은 이브가 털썩 주저앉았다.
"말해두지만, 본인은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서신의 작성도, 전달도 모두 위원회 측의 손에 맡겼지."
"……."
마틴이 시가를 물며 말했다.
"이게 현실일세."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네들이 그동안 애써온 것들, 클랜들의 눈에 들고자 노력하고, 협력을 받아낸 그런 모든 노력들, 전부 무의미하단 말일세. 이 세상은 그저 힘의 원리로 돌아갈 뿐이야."
마틴이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그들과 친해졌다고 생각했나? 하지만 결과는 어떻지? 이게 그대들이 지키려고 한 자들의 실체일세.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문제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등을 돌리지. 본래 대중들의 속성이 그러하네. 혜택을 누리길 바라지만 책임은 회피하며, 당장 자신들의 먹고 사는 일 밖에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야. 그런 자들을 다루는 방법은 화합과 협력이 아니라 그저 압도적인 힘과 공포, 그리고 밥줄을 틀어쥐어 통제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을 테라광산에서 펼치고 있는 건가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 신관. 이곳은 패배자들과 낙오자들의 나라다. 애초에 사상부터가 건전하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은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지. 이대로 내버려두면 이 나라는 멸망해. 그리고 본인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말을!"
"그래서 본인은 생각했다.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낙오자들을 다룰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그리고 악역을 자처하여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여 들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질리도록 돈만 모으는 귀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본인은 그 돈을 조금도 낭비한 적 없다. 전부 이 나라를 사기 위한 값이지."
"산다구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군요. 이 나라는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마틴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더 이상 말하는 건 곤란하군. 아직 자네는 내 부하가 아니니 말이야."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마틴은 벽에서 몸을 때 등을 돌렸다.
"처형식은 내일이다, 자네도 재판관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게 될 걸세. 어디 한번 힘써보게나."
"……."
집무실을 걸어 나가며 마틴이 팔을 슥 들었다.
"그럼, 내일 처형장에서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