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과 이상의 경계 -->
"오오, 자네도 가는 건가?"
"암, 가야지. 왕의 처형식이라며?"
"이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될는지 원……."
무수히 많은 인파의 행렬이 대광장으로 줄줄이 향하고 있었다.
언더하임의 외곽에 위치한 대광장. 주로 처형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이나, 어비스는 '공개 처형'이란 제도 자체가 드물어 평소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엔 백색 타일로 이루어진 사각의 강단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보는 사람이 압도되는 커다란 단두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처형 무대로 향하는 네 갈래의 길이 뻗어 있는 구조로, 관중들은 그 길 사이에 포진되었다.
강단 끄트머리에 위치한 높은 단상에는 다섯 명의 재판관들이 앉아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이브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브는 결국 오늘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판관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반대해야 로드의 처형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브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어비스의 장로들. 기본적으로 왕실보다는 마피아에 더 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브는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부정이라는 것은 사람의 약점을 찾아 마음을 갉아먹는 괴물.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만 늘어났다.
그리고 재판관들로부터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어비스를 대표하는 24개 클랜장들이 앉은 좌석이 있었다. 의회 소집 때와는 달리 전원 참석하였다.
유니벨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하여 흥미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죄인이 입장하겠습니다."
덜커덩! 동굴과 연결된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 사이로 팔에 구속구를 착용한 모습의 로드가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에 광장이 떠들썩해졌다. 로드는 덤덤한 표정으로 강단을 걸어갔다.
'……폐하.'
그때 로드와 이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드는 마치 안심하라는 듯 웃는 얼굴로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브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폭발하기 전에 간신히 꾹 눌러 담았다. 자신은 재판관의 신분으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로드에 이어서 베아트리체가 수갑을 찬 채로 걸어 나왔다. 그녀 또한 숙청 대상이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마피아들이 길목 중간에서 무릎을 꿇렸다. 로드만이 단두대가 있는 중앙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그리고 단두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마치 저승사자처럼 버티고 있는 거구의 남자. 마틴이었다.
두 번째 만남 만에 입장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로드는 낡은 옷을 걸치고 팔에는 구속구를 착용한 죄인의 입장으로서 그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숙부님."
로드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러나 웃음으로 감출 수 없는 눈이 퀭하게 들어간 모습은 그간의 고생이 잘 드러나 있었다.
"좋아 보이시는군요. 폐하."
"전부 숙부님이 걱정해준 덕분이죠."
두 사람은 날 선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재판관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현 어비스의 국왕, 로드 폴렌티아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관들 중 정중앙에 앉은 노인이 말했다.
확성 구슬을 장착하는 등의 법정 절차가 모두 끝나고, 노인 재판관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마틴 대부! 발언하시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의 관중들을 슥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일어난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는 자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가 확대되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본인은 언더하임에 돌아오자마자 국왕을 긴급 체포하였고, 며칠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서 재판을 열고 있다. 먼저 본인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밝힌다. 본래 어비스에는 공개적인 재판을 여는 상황이 드물긴 하나 지금 죄인은 한 나라의 국왕이며, 사태의 엄중함 또한 크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을 빌려 모두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인이 오펙투스의 침공을 막기 위해 드러그팜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신분을 알 수 없는 수상한 남자가 병사들에 의해 발견 되었다. 오펙투스의 간자일 수도 있어 병사들이 불러 세웠으나, 그는 무장한 병사들을 보자마자 등을 돌려 도망쳤다. 결국 치열한 추격전 끝에 그 자는 우리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도망을 쳤는지……."
마틴이 고개를 돌려 로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전혀 모르겠군요."
마틴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그자의 정체는……"
마틴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마피아 하나가 포대 자루를 어깨에 들쳐 메고 나타났다. 그가 입구를 봉한 끈을 풀고는 내용물을 쏟아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한 때 사람이었던, 썩은 고깃덩이다.
"이 자는 다름 아닌 왕실 정보부 요원이었습니다. 폐하."
"저, 정보부?"
사방에서 군중들의 수군거림이 일었다.
'……흠.'
로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완벽하게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입고 있는 복장은 정보부 요원의 것이 맞았다. 그리고 얼굴을 훼손하지 않은 걸로 보아 마틴이 허술하게 대역 같은 걸 내세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마틴이 등을 돌려 관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자가 가지고 있던 서신은 몹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틴이 재판관들에게 다가가며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자네가 한번 읽어주겠나? 신관."
그리고 그는 다섯 명의 재판관 중에서 이브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녀가 마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하지만 모든 관중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서신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친애하는 어비스의 국왕, 로드 폴렌티아께.
귀국의 의사는 잘 전달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귀하의 결단 또한 높게 평가합니다.
앞서 논의 드린 대로, 모든 것은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병력이 언더하임에 도착하게 되면, 성문을 열고 병력들을 무장해제 시켜 주십시오.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물론 약조한 대로, 귀하께 돌아갈 보상 또한 확실히 마련해두었습니다.
귀하의 이 위대한 결정은, 후세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무쪼록, 언더하임에서 뵙겠습니다.
- 카사르의 국왕, 아크 더 라운드 드림.
마지막 발신인을 읽는 순간 이브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무려 카사르의 왕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관."
마틴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숱한 국제 서신을 다뤄본 그대라면 잘 알고 있겠지. 그 서신의 가장 아래에 찍혀있는 인장, 카사르 국왕의 것이 맞는가?"
"……."
이브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부정하기엔 너무나 정확했다. 이 인장의 문양은 정말이지 빼도 박도 못하는 카사르 왕실의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웅성웅성웅성
관중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급격히 커져갔다. 재판관들 또한 놀란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저 이브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동상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자, 폐하."
마틴이 로드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증거가 나왔습니다. 여기 병사들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이 자는 폐하의 정보부 요원, 그리고 품에 있던 서신에는 폐하의 이름이 정확히 명시되어 있으며 카사르 왕의 인장까지 찍혀있습니다."
"……."
로드는 침묵했다.
마틴은 등을 돌려 그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결론을 말하겠다. 현 국왕 로드 폴렌티아는 카사르의 국왕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했다. 그가 아로게쓰와의 전쟁에서 필사적이었던 것도 당연하다. 모든 것은 카사르와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북쪽의 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드러그팜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태가 일단락되자, 우리는 언더하임에 복귀해 왕을 긴급 체포했다. 이상이 이번 사건의 전말이다."
마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장에서 거대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이 질러대는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벌써부터 '배신자!'라는 목소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형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이 만약 썩은 과일과 오물을 준비해 두었더라면, 진작에 던져버렸을 듯 한 흉악한 분위기였다.
노인 재판관이 관중들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그럼 폐하께서는 반론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로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마틴을 바라보았다. 여유만만한 표정, 반론 할테면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분위기는 완전히 마틴에게로 넘어갔다. 이브마저 인정할 정도로, 누가 봐도 완벽한 증거를 가져온 것이다.
'후우우우우.'
몸을 타고 흐르는 아찔한 긴장감에 로드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마틴이라는 높디높은 벽이 눈 앞에 있었다. 증거가 제시되었고, 관중들은 이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두 팔이 구속당한 죄인의 입장. 어비스에 무법 추정의 원칙 따위는 없다. 애초에 이런 처형 직전의 재판 자리는 그저 죄인을 죽이기 전에 행하는, 명목상의 심문 절차 같은 것이었다.
'좋은 한 수다, 마틴. 명분도 충분하고 증거도 강력해. 확실히 무리해서 왕궁을 점령할만하군.'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로드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뇌와 심장은 지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오히려 기뻐하며 한층 더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은 후, 로드가 입을 열었다.
"숙부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잘 만들어진 시나리오군요. 하지만 그 이야기로는 한 가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바로 아로게쓰의 침공입니다."
마틴이 눈썹이 꿈틀했다.
"……외국의 돌발적인 침공 같은 게 무슨 설명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아뇨,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저와 아로게쓰의 장군인 바얀이 처음 전장에서 대면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력이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나름대로 방어 체계를 갖춘 점은 칭찬해 줄만 하다. 솔직히, 당신들이 이 정도로 저항할 수 있을 줄은 예상 못했다.' 즉, 바얀은 이미 우리의 병력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이 이야기는 그 전투에 참가했던 수많은 병사들도 들었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로드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총 병력은 2500명으로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드러그팜의 병력이 내려와 앞뒤에서 포위한다면 곤란했겠죠. 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은 숙부님의 군대는 전력으로 염두 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숙부님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처럼요."
"푸흐흐! 그럼 내가 아로게쓰에게 정보를 흘렸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로드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아로게쓰가 숙부님의 말만 믿고 쳐들어올 바보들은 아니까요. 이렇게 된 겁니다. 제가 카사르와 손을 잡은 게 아니라, 숙부님이 카사르와 손을 잡은 겁니다."
"……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틴과 로드의 진술이 완전히 갈렸다.
'…다행이군.'
관중들이 사실에 의문을 품는 것은 로드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법률적 시스템이 명확하게 체계화 되지 않은 어비스의 법정에서는, 대다수 관중들의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재판관들 또한 법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닌, 그저 사실 관계와 타당성을 고려하려 자신의 주관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군중 심리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누가 더 군중의 지지를 얻는가, 이것은 재판이라는 탈을 쓴 정치 게임이다.'
로드가 마틴을 바라보았다. 처형장을 무대로 한 진검 승부. 이 곳이 마틴의 영역일지는 몰라도, 게임은 로드의 영역이었다.
"숙부님은 카사르와 오랜 기간 동안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숙부님이 드러그팜에 주둔하게 되었을 때, 초조함을 느낀 당신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아크에게 접촉했고, 계략을 하나 짜냈습니다. 바로 아로게쓰를 끌어들이는 거죠."
그 말에 마틴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불성설이군요. 카사르가 어떻게 아로게쓰를 끌어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아직은 정황이긴 하지만, 카사르와 아로게쓰가 비공식 동맹 관계라고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습니다. 카사르의 왕은 그 정보를 이용해 그렇지 않아도 저한테 한번 물 먹은 적이 있는 대추장 자무카를 꼬드겼습니다. 자무카는 숙부님의 정보가 아닌, 동맹국 왕의 정보를 신뢰했기에 언더하임에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아로게쓰는 초반에 이득을 봐야 하는 국가였고, 로드의 폭로전 이후 슬슬 몸이 달아오르고 있을 자무카에게는 아주 달콤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수도의 정규 병력이 500밖에 없다는데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틴이 인상을 쓰며 반박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카사르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아로게쓰에게 그 사실을 알렸겠습니까? 그런 정보를 알았다면 카사르가 쳐들어오는 편이 더 유리했을 터!"
로드는 당당히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첫째, 카사르는 북쪽의 '글레이시온'과 적대 중이라 섣불리 병력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둘째, 카사르가 얻는 이득은 있습니다. 또한 같은 편이자 정보 제공자인 숙부님도 얻는 이득이 있죠."
"……그게 뭡니까?"
"카사르와 마틴 숙부는, 우리의 병력과 아로게쓰의 병력이 소진되기를 기다렸다가 참전하여 둘 다 쳐 낼 생각이었던 겁니다. 왕실, 경비대, 클랜들까지 모든 세력을 한꺼번에 줄이고, 이 나라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겠죠. 당연히 숙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사르 또한 덩달아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제가 전쟁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그 계략은 막히고 말았습니다."
마틴이 드러그팜에서 출군 준비를 한 것은 확실히 드러난 사실로, 로드는 스파이를 통해 그 광경을 메모리얼 수정구로 기록하여 바얀과 협상할 때 써먹기도 했다.
로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숙부님이 내놓은 사실에 대해 반박하겠습니다. 저기 죽어있는 친구는 제 정보부 요원이 맞습니다. 하지만 카사르와 서신을 주고받기 위해 보낸 게 아니라! 아로게쓰가 쳐들어올 때 숙부께 도움을 요청 드리려고 보낸 자 입니다."
그를 역류시켜 놨다가 계략에 사용한 것은 로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였다.
"하지만 숙부님은 저의 지원 요청에 침묵했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 전쟁을 종결시켰습니다. 숙부님은 입장이 난처해졌겠죠. 그래서 아크와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아크에게 부탁해 제 이름이 들어간 서신을 쓰게 하고, 미리 역류 시켜둔 정보부 요원을 죽인 후 품에 그 서신이 있었던 것처럼 속인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마틴이 큰 소리로 웃었다.
놀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의 웃음에 여유 있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 게임에서 우위에 서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놀랍습니다, 폐하.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맞추어 낸 기개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폐하의 상상력을 뒷받침해줄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카사르 왕의 인장이 찍혀있는 서신.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로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다른 의혹은 대충 넘어가도 괜찮다는 거군요. 뭐, 좋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정말로 숙부께서는 카사르의 왕실 측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마틴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차갑게 대꾸했지만 로드는 다시 물고 늘어졌다.
"다른 이유로라도, 카사르 측과 접촉한 적이, 정녕 단 한 번도 없습니까?"
로드는 그렇게 물음을 던지며 묘한 미소를 흘렀다. 마틴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맹세컨대, 없습니다."
로드는 고개를 돌려 관중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했다. 그러자 관중 속에서 검정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강단으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강단을 지키던 마피아들이 움찔하며 그를 제지하려 했다.
"이쪽으로 오게 해주시죠. 제 증인입니다."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재판관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재판관이 그렇게 하라고 하자 마피아들은 하는 수 없이 길을 터주었다. 로브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바닥에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메모리얼 수정구?'
마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우우웅!
남자가 수정구를 작동시키자 몸체에서 빛이 흘러나와 홀로그램처럼 분사되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의 화질은 나빴지만, 주위 관중들도 볼 수 있을 만큼 컸다. 수정구가 지직거리며 영상이 출력되었다.
- 좋다. 서신을 보낼 테니 대기하고 있도록.
- 예.
'……저 영상은!'
마틴의 눈이 부릅떠졌다. 영상에 비친 사내는 다름 아닌, 마틴 본인이었던 것이다.
-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 아! 벼, 별건 아니고, 여기로 올라오는 길에 우연찮게 외부인을 봤습니다. 놀랍게도… 옷의 무늬를 보나 억양을 보나 카사르 쪽 사람 같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도 그와 이야기하여 거래를 좀 트고 싶은……
-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구나.
영상의 마틴은 갑자기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영상의 주인공의 시점이 마틴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것 같았다.
- 대, 대, 대부!
- 호기심은 명을 재촉한다, 꼬마.
마틴의 커다란 손가락이 영상을 보고 있는 모두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푸확!
관중들이 기겁한 소리를 냈다. 영상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남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적 속에서, 한동안 '끅끅!' 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신음만이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 본래는 죽여 마땅하나, 중요한 손님의 졸이라 목숨을 건지는 줄 알거라.
- 크흑, 크으으윽! 자, 자,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대, 대부!
시뻘건 화면이었기에 영상은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 네가 본건 모두 잊어라. 만약 어떤 수단으로든 발설할 시에는…….
모두의 침묵 속에서, 낮고 으스스한 마틴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우우웅!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
싸늘한 정적이 광장을 휘감았다.
관중들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적막을 유지할 뿐이었다.
'…됐다.'
로드는 관중들의 표정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마틴이 눈을 후벼 파는 장면은, 어비스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내포하고 있는 마틴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 터였다.
그러나 이 관중들의 한 줄기 도화선과 같은 침묵은, 점차 그러한 감정들을 은은한 분노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저게 숙부님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실 수는 없겠죠?"
로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처럼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마틴도, 이번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모두 보셨다시피, 숙부는 카사르 쪽 사람을 목격했다는 남자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로드가 눈을 찡그리며, 너덜너덜해진 목소리를 냈다.
"그의 눈알을 뽑으면서 까지요."
"……"
깊은 정적이 이어졌다. 말소리는 없었지만 수많은 감정들이 허공에서 교차하고 있음을, 로드는 알 수 있었다.
때가 됐다. 이제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차례였다.
"왜 마틴 숙부는 그렇게까지 해서 이 사실을 숨겨야만 했을까요? 당연한 이야깁니다. 카사르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겠죠. 아로게쓰를 불러들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우리의 손길을 거부했고, 저를 모함하기 위해 카사르의 왕에게 부탁해 인장이 있는 서신을 쓰도록 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러 간 죄 없는 요원의 목숨과 한 청년의 눈을 희생하기도 했죠. 숙부와 카사르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숙부님. 그리고 여러분!"
광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작은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장악감을 느끼며, 로드가 긴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건, 어느 쪽입니까?"
"ㅡㅡㅡ!"
끓어오르는 화산이 하늘로 솟구치듯, 폭발과 같은 관중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제정신이 아니야!"
"입만 열면 거짓말이냐! 마틴!"
"저 자식은 우릴 그냥 가축으로 보는 게 틀림없어!"
"죽여라!"
얼굴이 벌겋게 물든 채, 관중들은 악바리를 써가며, 또 목이 쉬어가며 소리쳤다. 수십 년 간 어비스의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마틴에게, 그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무대.
한 명 한 명의 불만과 목소리는 미약하여 마피아들의 구둣발에 짓밟혔으나, 이 무대는 달랐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이 뭉쳐 마틴에 대한 공포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을 때, 관중들은 묻어두고 또 묻어두었던 설움과 분노를 남김없이 토해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온갖 고함과 폭언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마틴은 애써 침착하게 영상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드러그팜의 성에서 통신 수정구로 아크과 이야기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방문한 손님. 이미 부하들의 세밀한 신체검사를 통과했을 테니 메모리얼 수정구 같은 커다란 걸 품에 들고 있었을 리는 없다.
로드가 저 영상을 확보한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손님은 자신의 소속을 이렇게 밝혔다.
'흑익.'
마틴의 눈동자가 확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클랜장 좌석으로 향했다.
'……설마!'
유니벨은 이미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은은한 미소를 띠운 채로.
"미안, 아저씨."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에 걸기로 했어."
========== 작품 후기 ==========
하드 분량! 로드와 유니벨의 전략에 대한 부연 설명은 다음에 들어갈듯 합니다.
이번 세편 동안 유난히 로드가 고생한 이유는 로드가 마틴의 꼭두각시에서 왕좌를 온전히 되찾기 위한 성장통이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계속 고구마만 먹이는 하드한 작품은 아니옵니다!
비판 의견은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든지 수용하겠지만 제발 욕설이나 근거없는 일방적인 비난은 자제해주세요.
(명절에 주인공 잠시 감옥에 잡아넣었다가 욕을 엄청 먹는군요 ;ㅅ; 멘탈이 너덜너덜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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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eata / 제 글을 열심히 봐주신것 같아 감사하네요! 사실 그런 의문이 드는게 정답입니다. 나중에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을 쓸 생각입니다.
ginsen /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도 저는 에피소드 한 편을 쓰면 그 마무리 정도는 생각해 두는 지라, 감당못할 전개는 아예 안 하는 주의입니다. 에피소드의 끝맺음은 정해놓고 쓰고 있으니 안심하고 봐주세요...
이러저런한폐인 / 이런... 제가 주인공을 좀 굴리긴 하겠지만 그렇게 막 하드하지는 않아요 ㅠㅠ
헬크랩 / ;ㅅ;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라토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언급될듯 합니다.
쓰굴 / 잘가요
사람인생 / 저도 고구마 세편만에 이렇게 욕 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ㅅ; 연참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세이브 분량이 거의 없어서...
Lgb / 자, 다시 답이 보이는 상황으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설명이 안된 부분도 마무리 할테니 믿고 기다려 주세용.
ppk12 / 다, 다행이다. 간수까지 비밀칭구가 됐으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