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신전 문명게임-43화 (43/296)

<-- 현실과 이상의 경계 -->

여기서 마틴은 몇몇 사실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중들의 지지는 이미 로드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고, 엄청난 임팩트가 있었던 마틴의 영상을 본 관중들은 그에 대한 의심을 절대 지우지 못할 것이다. 마틴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로드는 자신이 있었다.

"…크크큭."

마틴이 의미 모를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노인 재판관이 재촉했다.

"마틴 대부. 반론하시오!"

"……"

"내 말 안 들리시오? 반론을……."

피어난 광기와 함께, 마틴의 시선이 움직였다.

타앙!

"……!"

총성이 광장에 크게 울려 퍼지며 재판관이 마력탄을 맞고 쓰러졌다. 관중들의 놀란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늙은이가 꽥꽥 시끄럽군."

마틴이 머스킷의 총구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재판이라…… 역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니 이런 사단인가."

쿠구구구구구구구!

'왔다.'

마틴의 고유 능력이 발현되었다. 로드는 저릿저릿한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머리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공포의 감정은 눈 앞의 마틴이 마치 두 배, 세 배로 커진듯한 착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윽!"

"으으으으!"

그 영향은 재판관들과 클랜장들, 심지어 주위의 관중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고유 능력의 범위가 무슨……!'

로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본색을 드러낸 마틴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살기 뿌려대는 괴물 앞에 홀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로드의 머릿속에는 마틴이 달려들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그런 끔찍한 상상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좋다, 로드 폴렌티아."

마침내 마틴이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자네의 말대로 본인은 카사르와 손을 잡았다."

로드는 침착하게 마틴을 응시했다. 아직 대화의 여지는 있는 듯 했다.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당황스러운걸요. 어째섭니까? 당신은 이미 이 나라의 최정점이었습니다. 굳이 외세와 손을 잡을 이유는 없지 않았나요?"

"후후후, 본인을 너무 소인배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들과 손을 잡은 이유는 권력이나 돈 때문이 아니다."

그의 눈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모든 것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

로드는 공포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의아함이 일었다.

"생각을 해봐라, 로드. 우리의 영토는 대륙의 정중앙, 주위의 6개국들이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 때 이곳은 경작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은 땅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 위상이 달라졌지. 대륙의 어디든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테라가 나오는 광산을 가진 영토. 주변 6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정벌을 꿈꾸는 나라라면 누구나 이 땅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이 땅을 스스로 지켜낼 힘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마틴이 일갈했다.

"작은 전쟁하나 중단시킨 것 가지고 유난 떨 때가 아니다, 로드! 아로게쓰와의 전쟁은 서막에 불과하다. 앞으로 대륙에선 수많은 전쟁들이 벌어지게 될 터, 허나 우리는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고 스스로를 지킬 힘은 없다. 정말로 이런 형편없는 전력을 가지고 대륙의 진짜 기사들, 마법사들, 망자와 광신도, 고대의 존재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들의 군사력은 격이 다르다!"

그가 몸을 돌려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이 나라는 타국의 깃발 아래 짓밟힐 것이다. 수인들은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어 팔려나가고."

마틴의 눈이 스노노에게로 향했다. 스노노가 화들짝 놀라며 유니벨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조폭들은 군인들에 의해 도시 밖으로 쫓겨나 굶어 죽을 것이며!"

그의 시선이 피닉스에게로 움직였다.

"이단이라 불리는 종교의 신도들은 전부 효수당해 목이 성문에 걸리고! 불법 연구회들은 해산 되고 모든 자금을 빼앗길 것이다!"

한데 모여있는 망자 연구회와 더 인텔리전스의 클랜장이 움찔했다.

"다른 클랜에 속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노예가 되어 평생 광산에서 곡괭이를 휘두르다 죽어가겠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마틴의 눈이 번뜩였다.

"멸망당해 권리를 박탈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속국이 되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 나라의 일원으로서 완전히 종속된다. 그 후에 본인은 '이 도시'를 살 것이다."

"……!"

로드는 팔에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서야 마틴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은 여러 국가들을 고려했으나 카사르가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강력한 전쟁 국가이면서 신분제가 없다. 기사 작위 아래의 모든 자들은 평등하지. 본인은 카사르의 왕과 연락하여 이 나라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 대신 이 도시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자치권? 우리가 그런 좋은 조건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을 텐데요."

로드가 바로 헛점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마틴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이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자치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도시를 카사르로부터 사들여야만 한다. 따라서 카사르 측에서 요구한 막대한 돈을 모으기 위해, 본인은 악역을 자처하여 악착같이 국민들을 쥐어짜 돈을 모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였다. 목표한 금액 또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이제 카사르의 수호 아래 치외법권의 무법 도시, 언더하임이 되는 것이다!"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일이 잘 풀려서 그렇게 된다고 한들, 이곳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어비스가 아니고, 언더하임이 아니게 될 겁니다!"

"만약 그렇다 해도 그것이 최선이다."

마틴이 덤덤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나라는 원래 우리들이 주인입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겁먹어 주인 자리를 내려놓고, 돈과 땅까지 가져다 바쳐 타국의 가호를 받는다고요? 왜 우리의 힘으로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들의 한계를 단정 지으려고만 하십니까?"

로드의 외침에 마틴도 목소리를 높였다.

"현실을 직시해라, 몽상가! 희망, 미래, 자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설탕 발린 말들로 군중을 현혹하려 들지 마라! 불가능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당신이야 말로, 썩어빠진 패배자의 마인드로 모두를 굴복시키려 들지 마십시오. 피를 흘리지 않고 만들어지는 자유 따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몽상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기싸움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예리한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마틴은 재미있다는 듯 클클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좋다. 잠시 본인의 방식을 내려놓고, 네 방식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본인은 국상의 권한으로 의회를 소집하겠다!"

그의 시선이 좌석에 앉아있는 클랜장들에게로 움직였다.

"이미 다 모여 있으니 거추장스러운 절차는 필요 없겠지. 그대들이 결정해 보라. 본인의 말에 따라 지금이라도 현실적인 길을 모색할 것인지, 저 선동가의 혓바닥에 놀아나 되도 않는 전쟁놀이 준비를 할 것인지!"

갑자기 결정권이 클랜장들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갑작스런 전개에 클랜장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당황해 했다.

상황을 통제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브는 재판관들을 바라보았지만 최고 장로가 총에 맞은 이후 그들은 마틴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좋습니다. 마틴 대부의 안건을 받아들여 지금부터 '어비스 의회'의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발언하자 모두의 시선이 이브에게로 쏠렸다.

"안건은 앞으로 우리 어비스의 미래에 대한 주요 쟁점입니다. 마피아의 대표인 마틴 대부가 주최하였으므로 마피아 클랜을 제외한 나머지 23개 클랜에게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그에 앞서 두 분, 각자 발언하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마틴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인의 의견은 앞서 전부 말했다. 그대들 자신을 알고,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라."

"가능성이나 미래, 자유. 저도 이런 이야기는 지금 이 자리에선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로드도 지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결정해 주십시오."

로드가 말을 마치고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분의 발언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국왕 폐하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오른팔을 올려주시고, 마틴 대부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그대로 팔을 내린 채로 있어 주십시오."

이제는 이 광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클랜장들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나라의 명운을 결정하게 된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 이었다. 골똘히 고민하는 사람, 여전히 겁에 질려 마틴의 눈치를 보는 사람,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

"그럼, 셋을 세겠습니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준 후에, 이브가 입을 열었다.

"하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관중들은 까치발을 들어 클랜장들을 바라보았다.

"둘."

유니벨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피닉스는 웃는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셋."

그리고.

완벽한 정적이 광장을 휘감았다.

"투표 결과."

클랜장들을 바라본 이브가 고개를 되돌려 선언했다.

"23:0으로."

대기가 떨렸다.

"폐하의 의견이 채택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와 광장을 뒤흔들었다.

'미친, 정말이냐.'

로드가 헛숨을 들이켰다.

전혀 예상 못한 결과였다.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심지어 친 마피아 세력으로 알려져 있는 용병 길드의 메넬라오스까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우호적인 클랜들을 포섭해 두었기에 자신은 있었으나, 완승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로드가 픽 웃었다.

'…역시 못 말리는 꼴통들이라니깐.'

마틴의 의견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안정'을 택하지 않았다.

마틴 또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브의 의회 소집령 때와는 전혀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전에 제게 했던 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마틴."

이브가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현실입니다."

*

"…크큭, 크하하하하!"

마틴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 정도로 이 나라의 격이 떨어졌다는 건가! 헛바람에 빠져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니! 민중을 향한 노력은 고독하며 공허하다고들 하나, 이건 실로 그 상태가 심각하구나!"

"민중을 향한 노력? 당신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드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착취자들의 억압과 위협을 피해 천민, 노예, 범죄자, 가축이라 손가락질 받던 자들이 어느 버려진 땅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억압받지 않고, 천대 받지 않는 자유의 나라를 만들겠노라고. 하지만 그동안 당신의 정책은 어땠습니까? 국민 모두의 생존권을 틀어쥐고 힘으로 억압해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당신은 현실의 사정을 핑계로 그들에게 지배당할 것을 강요하며, 당신의 악행을 합리화 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방식으로 이 나라의 패망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착취자라는 주인의 자리만 바뀌는 결과만 낳을 뿐, 이 땅에 자유는 영원히 없을 겁니다!"

로드가 잠시 말을 멈추며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로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주목하고 있었다. 광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관중들에 대한 완벽한 장악감. 로드는 비로소 이 자리에서 왕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로드는 시선을 돌려 마틴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왜 민중을 폄하하고 패배자나 낙오자로 여기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이 자유의 나라의 새로운 착취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멋대로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 현실의 사정을 핑계 삼지 마십시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만 합니다!"

로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들에게서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로게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느꼈던 그 가슴 벅찬 감정이 다시 폭발하며 광장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래 좋다. 짐승들에게 백 번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틴이 잔혹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본인의 방식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군."

========== 작품 후기 ==========

와, 선작이 좀 올랐네요~ 감사합니다. 정주행 하신 분들도 고생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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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eata / ㅠㅠ 말빨은 이번편에서 털렸습니다. 마틴에게 이제 남은건 무력과 카사르와의 연줄 정도네요.

사람인생 / 앞으로 다양한 나라들과의 책략전 또한 고민해 보겠습니다. 코멘트 계속 달아줬다고 리코맨 해주는건 아녜요. 흥.

Lgb / 음, 과거의 이런 뒷이야기들을 본편에서 빼니까 개연성이 떨어져 보였던건 당연한것 같아요 ;ㅅ; 사실 Lgb님처럼 본편을 보고 이거 좀 이상한데? 하는 의문을 느끼는게 당연한 것 같습니다. 언제나 코멘 감사해용

Noist / 옙, 감사합니다--!

직업마스터 / 한번 혀를 찔러보고 싶었어요!

ppk12 / 마틴신사까지 비밀칭구 하렘에 포함시키면 너무 광범위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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